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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갈4:21-31절)
작금의 세계는 경제적인 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심각한 경제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경제 문제 이전에 인간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성의 문제는 가정의 문제요, 자녀의 문제요, 그리고 후손의 문제입니다. 인간성이 파괴되면 경제적 문제, 정치적 문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인간성과 도덕과 종교, 그리고 세계관, 가치관을 세우게 하는 산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교육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그보다 더 깊은 문제, 즉 생명의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내 생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바른 해결이 없으면 어떤 교육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 내용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옛날로 돌아가서 처녀와 총각이라고 한다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겠습니까.’ 그랬더니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답변한 사람이 60%가 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자기 존재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그 자신을 평가해 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사랑 받는 자만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할 때에는 자기 생을 소흘히 여기게 되고, 자학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남의 생명까지 해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 근본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유형의 인간, 두 존재의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상징적 비유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은 이스마엘입니다.
이 아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서자입니다. 육신으로는 엄연한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혈통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는 분명히 서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 그의 아내의 노예로 얻은 하갈이라는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의 법대로 따진다고 해도 그는 분명히 노예입니다. 향락의 부산물, 인본주의의 부산물, 허무와 정욕의 부산물입니다. 처음부터 부모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별로 원하지 않았던 아이였기 때문에 출생에 대해 축복받지 못했고, 잔치 한 번 하지 않았고 키우는 동안에도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는 왜 태어났느냐’ 고 했으며, 결국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부모의 축복 대신에 저주를 받은 격이 되었고 결국 그는 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침내 전쟁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분쟁의 사람이요, 싸움의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하여 살리라 하시니..
하나님은 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의 일생에 대해 예언해 주셨습니다. 이 아이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는 불신앙의 자녀입니다.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상속도 없습니다.
순간적인 인간의 잘못된 생각에서 빚어진 불행한 출생이었습니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운명 속에 태어나서 저주를 받으며 평생을 분쟁과 불화로 일삼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것이 이스마엘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악이요, 힘이요, 포악입니다.
반면에 그와는 대조적으로 또 하나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약속의 자녀, 곧 후일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삭이라는 친아들입니다. 이 아들의 출생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의 성취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셔서 그 창조적인 능력으로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무려 25년을 기다리고 기다려 얻었습니다. 이 아들은 자유인이요, 합법적인 아들입니다.
양심의 자유, 도적적 자유, 윤리의 자유 속에서 영광스럽게 태어납니다. 그 이름 자체가 ‘웃음’입니다. 부모가 웃고, 가족이 웃고, 온 이웃이 다 웃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축복과 기쁨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롬9:6-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구별되었습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본문 29절에는 성령을 따라 난 자라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상속이 있고, 권세가 있고, 명에가 있고, 신앙의 유산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삭은 이런 유형의 자식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약속’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율법과 약속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약속이 율법보다 승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놓고 이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비유된 하갈과 이스마엘은 후사를 잇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방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후사인 이삭은 노쇠한 사라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 은총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율법보다 약속이 승한 이유입니다. 즉 율법은 인간의 노력, 인간적인 방법, 공로, 수단, 생각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을 요구하고 그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비하셨던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좌절과 실패, 죽음만을 맛보게 되지만 약속을 따르는 자들은 성공과 소망,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스스로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그 스스로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약속은 우리를 다시는 율법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그 약속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하나의 계약입니다. 계약이란 그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로 인한 효력이 쌍방 간의 성실한 이행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쪽이 그 계약을 파기하면 다른 한 쪽이 아무리 그 계약을 지키고자 하여도 그 노력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율법이 이와 같습니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는 그 계약은 인간 편에서 파기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의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신도 그 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율법의 한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이와 다릅니다. 약속은 쌍방 간의 합의나 계약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에 아브라함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는 일방적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일방적 언약이라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은 피조물의 행동이나 의사에 아무런 상관이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인생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지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이 율법보다 승한 이유입니다.
율법의 구원의 능력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제한되지만 약속은 결코 제한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인생은 죄를 깨닫고 율법의 완전함과 거룩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무능과 더러움을 깨달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죄의식을 일깨워 주고 스스로의 무능을 깨닫게 하여 구세주를 찾게 하는 율법의 기능 때문에 구원이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오로지 구원의 시작일 뿐 완성은 되지 못합니다. 율법 안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음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보다 승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님은 무리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마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은 인생에게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가두고 구속합니다. 위로와 평화가 아닌 좌절과 절망이요, 희망이 아닌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진실로 약속이 오기 전까지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매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속량해 내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것입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 억압과 구속, 저주 가운데에 우리를 가두었다면 약속은 우리를 그러한 저주 가운데서 자유하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날도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본성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기 때문에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본처와 여종을 두 언약이라 보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을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유자라 하였고, 하갈에게서 난 아들을 시내 산의 율법에 속한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비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라는 말 ‘파라볼레’라는 말과는 다른 언어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비유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예로 들어 진리의 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비유는 ‘알레고루메나’인데 이 말은 ‘우화’ 혹은 ‘알레고리’ 라는 것으로 역사성이나 현실성을 무시하고 오직 그 뜻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은혜에 대한 신학을 바탕으로 옛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빌레몬서를 해석할 때 빌레몬을 하나님으로, 바울을 그리스도로, 오네시모를 죄인인 인생으로 비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두 여인의 관계를 살펴보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갈은 본래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라의 몸종이었으며 아브라함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자함으로 사라의 추천으로 아브라함은 마음에도 없는 그녀를 취하였고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동반자도 아니었고, 영원히 함께 할 한 몸도 아니었습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율법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본래적인 구원의 동반자는 아닌 것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오실 이가 오실 때까지 잠시 맡겨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역할은 일시적이요, 임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녀의 위치는 하갈에 의해 잠시 흔들렸지만 확실하고 영원불변한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하갈의 역할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위치는 회복되었습니다.
곧 율법은 일시적인 것에 비해 복음은 본래적이고 영원한 동반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여인은 출산한 자녀의 신분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하갈은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들의 신분 역시 종이었습니다. 이는 그 어머니가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인이 여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면 서자라 하여 아들의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율법과 관계를 맺으면 주인인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고, 사망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무리 철저히 지켜도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바울은 열심히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죄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종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성경이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4:24-25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낸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그러나 사라의 아들 이삭은 자유자였습니다. 이는 그의 어머니 사라가 아브라함의 정실 부인으로서 자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갈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능력, 복음의 권세를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관계를 맺는 사람은 누구라도 자유인이 되며 진리가 그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과거의 신분이나 경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적인 범죄나 미래적인 범죄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말하기를 ‘은혜가 왕 노릇 한다.’ 고 하였습니다.
두 여인은 자녀를 출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을 때 육체를 따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갈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이는 남녀가 만나 동침하여 자연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은 것을 말합니다. 이는 율법이 인간의 본성에 의해 ‘죄인’을 양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인간의 육체적인 본성을 고발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본성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은 모두 죄인으로 정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장하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정죄하셨습니다.
반면에 사라의 출산 방법은 초자연적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불임 여성이었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복음의 구원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허황되고 가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를 통해 이삭이 태어났듯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가지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는 풀 수 없는 영원한 비밀의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이 비밀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두 여인에게는 자손들의 유업에 있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갈은 그녀가 낳은 이스마엘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하지 못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의 영원한 처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율법의 자녀들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메마른 광야, 물이 없는 갈급한 땅에서 살아가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똑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종이 된 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라의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 받아 가나안 땅에서 축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와 그의 후손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단지 사라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창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복음을 믿는 자들, 곧 복음의 자녀들이 하늘나라를 상속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공로나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복음을 믿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두 여인은 그 아들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습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14살이 되었을 때 사라의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이를 시기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기업을 얻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로 쫓겨나고 맙니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 곧 율법만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이스마엘과 같은 존재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후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과 같이 육체의 혈통을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약속의 자녀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의로운 제사를 드린 아벨을 그의 형 가인이 쳐 죽였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최후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총에서 쫓거나는 것입니다.
*갈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성도가 받는 유업은 단순한 유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업에는 사명을 감당한 충성에 대한 칭찬과 동시에 환난과 시련을 감당해야 했던 그 아픔에 대한 위로와 상급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계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였음이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들이 그가 믿는 하나님과 진리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인정하셨지만 그것을 이기는 자에게 베풀 위로와 상급 역시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자유자와 비자유자,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때로 대적과 핍박을 만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위로와 유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토록 모진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진리만을 사수한 것은 바로 이 복음이 참 된 진리라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들입니다.
*갈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한 억압과 압제로부터 오는 해방이 아니고 신분의 상승, 곧 종의 신분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자유자의 신분으로 변동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자라는 것은 단순히 율법이나 규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나 규례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진리를 바로 깨닫고 그 진리에 거한다는 사실, 그 진리가 나를 온전히 자유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난 것이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취득했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것은 분명히 사소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고 친밀한 관계에 들어갔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며 살아갑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대장이 되어 주시고,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이 나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불같은 보혜사 성령님이 나를 감싸고 보호해 주시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무슨 불평이 있겠습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 것을 크게 기뻐하고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나안 복지를 유업으로 받은 이삭과 같이 우리는 영원한 약속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 존재의 가치, 내 존재의 의미, 내 인생의 축복을 깨닫고 아는 자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가정의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경건한 자녀를 출산하여 약속의 사람, 은총의 사람으로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축복의 자녀들을 낳고 키우는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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