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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정상을 오르고 한바퀴 돌아 9시간을 등산 했다. 2019년. 5월.11일(토) 2019년 봄철 무등산 정상을 개방하는 날이다. 본 카페의 <카페 앨범> 방의 '무등산 정상과 입석대 장불재 규봉암으로 산장까지'항목에 관련 사진이 게재 되어 있음 무등산 정상을 오르고 한바퀴 돌아 9시간을 등산 했다. 2019년. 5월.11일(토) 2019년 봄철 무등산 정상을 개방하는 날이다. 점심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섰다. 9시 반에 원효사 산장에서 기다리던 친구 춘열이를 만났다. 그는 30여 년간 산악활동을 한 등산 전문가이며 동창회장으로서 헌신 봉사하는 형 같은 친구이다. 12시 경 장불재(長佛峙) 대피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휴식을 취한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입석대(立石帶)를 향했다. 이곳에서 봉사자들이 신분증 대조를 하고 팔뚝에 출입 허가증의 종이띠를 달아주었다. 또 다시 숨이 가쁘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앞으로 다시는 높은 산에는 오르지 말아야지 하는 나약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땅만 보고 심호흡을 하면서 한발 한발 오르니 그리던 입석대에 당도 했다. 무등산(無等山)은 광주광역시, 화순군과 담양군으로 둘러싸였다. 천왕봉이 1,187m로서 무등산의 정상이다.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30년이 지난 2012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1966년 공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정상 부근이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통제되어 있다. 2011년부터 일 년에 두서너 번씩 정상을 개방했다. 천왕봉이 정상이므로 사실은 정상 바로 아래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상에 올라야 저 너머를 비롯한 사방을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언젠가는 군부대가 이전하고 정상까지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규봉암 가는 길에 석불암(石佛庵)에 도착했다. 암자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아담한 규모의 바위에 새긴 아미타불좌상(磨崖阿彌陀佛坐像)이 있다. 이 상을 시주함으로써 복을 짓고 만수를 누린 후 아미타를 친견하여 삼계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가려는 바람을 담았다고 한다. 주지스님이 홀로 독경을 하고 있었다. 스님도 부처님도 인자한 미소를 띠우며 이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처님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바로 부근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한바가지 흠뻑 들이켰다. 뱃속 깊이 시원하고 묵은 때가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지공너덜을 지나 계속하여 나아갔다. 스님과 덕담을 주고받은 후 다시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등산로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북산 갈림길, 꼬막재, 편백나무 숲을 거쳐서 수필문학 등단 2017, 저서 :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학교 경영(2003), --------------------------------------------------------------------------------------------------------------------- 규봉암의 암벽 주상절리 웅장한 모습 자 료 이몽학의 난 전주 이씨 서얼 출신의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으로 당시 조선 민심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몽학의 아버지는 이몽학을 집에서 내쫓았다. 집에서 쫓겨나서 떠돌이로 살던 이몽학은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 그곳에서 반란 계획을 생각한다. 이후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동갑회라는 조직을 만드나, 실은 이곳에서 오히려 반란을 위해 군사 훈련을 했다. 1596년부터 시작한 반란은 왜적의 침입을 허용한 무능한 정부 대신 왜적을 몰아낸다는 기치를 내세운 덕에 초기에는 홍경래의 난처럼 잘 나갔지만 이후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이 잘리면서 끝났다. 무엇보다 홍주성을 지키던 목사 홍가신과 홍주성을 구하러 온 의병들[1] 때문이었다. •송유진의 난 때는 의병장 이산겸이 반란군과 무관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때려 죽이더니 이몽학의 난 때는 이몽학이 반란군을 결성 당시 했던 "김덕령을 비롯한 몇몇 의병들, 도원수와 수사들이 나와 함께 한다"는 거짓말을 빌미로 김덕령을 모진 고문 끝에 죽게 만들었다.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원균을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그 똑똑한 머리로 두 사람의 차이를 정말 몰랐을 리는 없고 순전히 무장들에 건 견제와 의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끝내 이순신의 파직, 이어서 칠천량 해전, 그리고 선조의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2]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선조와 조정은 김덕령을 제외한 의병들은 대부분 불문에 붙여 풀어줬다. 김덕령이 죽음을 당한 건 그가 그 이전에 벌어진 송유진의 난에도 이름이 언급된 데다 공적은 없는데 살인 문제로 탄핵을 받던 상황에서 이몽학의 난 때 또 다시 이름이 언급되어 당시 법도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조정 중신들 다수가 구명을 하지 않았던 것도 선조의 의심병과는 상관없이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반증한다. 이는 송유진의 난 때 처형당한 이산겸도 마찬가지인데, 이산겸은 군대를 일으키고도 싸움을 거의 벌이지 않아 류성룡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도 이산겸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강하게 의심하던 상황이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몽학이 이 난을 일으킨 해가 공교롭게도 1596년, 병신년이었다.
영화판 오리지널에선 정여립의 난과도 연계하며 본래 역사와 다르게 더 기괴하고 극적인 최후를 맞는데, 도성까지 반란군을 이끌고 올라가나, 임금이란 작자는 자기를 막던 선비들까지 베어죽이며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막상 도착해보니 쓰레기만 널린 버려진 도성 뿐인 상황에서, 일본군이 도성까지 치달아와서 도리어 반란군이 도성을 지키기 위해 왜구와 싸운다라는 기괴한 상황이 벌여져 왜구를 막다가 전멸하고, 이몽학 자신은 반란을 막기 위해 자신이 베어죽인 장님 검객의 제자와 빈 도성에서 싸우다 베여 죽는 것으로 끝난다. <불멸의 이순신>에선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87화에 류성룡과 이순신의 대화를 통해서만 간략하게 나왔다. 사건 자체는 이순신과 관련이 없지만, 간접적인 인연이 있긴 하다. 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홍가신은 이순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 지간이기 때문. 이순신의 딸과 홍가신의 아들 홍비가 혼인했다. 김덕령 (金德齡) 시대 : 조선
생애 및 활동사항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해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高彦伯)· 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첫댓글 류춘렬 회장님의 노고에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