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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리영희 / 고은
은하수 추천 0 조회 19 14.12.13 12: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리영희 / 고은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원만하지 않으므로 그 결핍이 아름다웠다

모진 세월이 아니었다면

그 저문 골짜기 찾아들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맹세하건대

다만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에서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역정은

냉전시대의 우상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하고

구매품 사과와 건빵 차려놓고

관식 받아 차려놓고

불효자는 웁니다

이렇게 세상 떠난 어머니 시신도 만져보지 못한 채

감방에서 울었다 소리죽여

 

- 시집『만인보』(창작과비평사, 1986)

...........................................................

 

 지난 12월 5일은 만델라의 1주기이기도 했지만,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할 리영희 선생이 타계하신지 4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시절에 자신의 생각을 한 치의 주저 없이 글로써 진실과 정의를 알리려 했던 선생이셨다. 리영희 선생과 도타운 교분을 가졌던 고은 시인은 4년 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이라는 추모시를 트윗에 올렸다.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이라며 선생의 행동하는 지성을 증언했다.

 

 한편으론 “옥방에서/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이라고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을 전했다. 그리고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흐느끼며 시를 끝맺었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으나 한때 내게도 ‘사상의 은사’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나뿐 아니라 양심이 있고 양식을 가진 모든 젊은이들에게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귀감이었다.

 

 우리시대 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은혜를 베풀고 떠난 선생의 글을 책으로 처음 접한 건 ‘전환시대의 논리’였지만, 그보다 ‘우상과 이성’이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의 글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라고 설파한 첫머리는 영원히 간직해야할 말씀으로 여겼다. 말씀들을 몇 번이나 꼭꼭 접어서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주머니 밑창이 타개지고 그 말씀들은 서서히 새나갔다.

 

 선생은 훗날 책의 개정판을 낼 무렵 “우리 사회에서 하루속히, 읽힐 필요가 없는 '구문'(舊聞)이거나 '넋두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망각의 소이인 일상의 고단함에 굴복한 무뎌진 감각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지만 선생의 소망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데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인 나태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항쟁과 민주적 혁명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선생의 가르침대로 양심을 가동했지만, 이성은 단단하지 않았고 논증은 철저하지 못했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용기마저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권이나 그랬지만 권력에 아부하면서 이권과 특혜를 누리는 언론인과 곡학아세하며 개인의 영달만을 도모하는 교수들이 여전히 넘쳐나는 현실이다. 진실로 선생이 바라는 바대로 ‘우상’이 판치지 못하는 세상을 소망하건만, 지금 불행히도 민주와 인권이 후퇴한 상황에서 낯 두꺼운 ‘유령’들에 의해 국정이 농단당하는 어이없는 세상에 머물고 있다. 더구나 존경받는 원로들은 점점 줄어들어 헛헛하기만 하다. 하지만 정의와 진리가 보편타당해진 세상에서 선생의 저서들이 극복되는 날은 반드시 오리라 믿으며, 한 시대를 진동시킨 사상의 풍운아 리영희 선생을 다시 추모한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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