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8주일설교 꽉 막힌 곳에서(시편71:1-24)
본문: 시편71:1-24
제목: 꽉 막힌 곳에서
오늘은 시편71:1-24의 말씀을 가지고
“꽉 막힌 곳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꽉 막힌 곳에서”
요즘은 다이아몬드를 최고의 보석으로 여기어서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면서
청혼하고 사랑을 약속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가장 강하고 변하지 않고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보석이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옥반지로 사랑의 징표를 삼았고
옥으로 장신구를 써서 몸에 지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교 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에서
옥은 군자의 덕으로 상징합니다.
부드럽고 따사롭고 광채가 나는 것은 인자함이요
짜임새가 고르면서 굳은 것은 지혜요
깨끗하면서 쉽게 깎이지 않음은 바른 것이요.
몸에 드리워 떨어질 듯 함은 예의요
두들기면 그 소리가 맑고 은은하게 뻗어
슬쩍 감추는 것은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옥의 성질은 끈기와 온유, 은은함과 인내 등으로 표현되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품성에 비견되고 있습니다.
귀한 옥인지 버릴 돌인지 구분 하는 것을
옥석을 가린다고 합니다.
옥석을 가리는 기준은
그 단단함의 경도가 6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단함이 경도 6은 되어야
돌이 아닌 옥이 되는 것입니다.
경도 6의 단단함을 다듬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다듬어진 인생은 참으로 멋집니다.
옥처럼 다듬어진 인생
그래서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본다면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눠웠던 시편69,70편과 마찬가지로
시편 71편도 개인 탄원시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누게 될 시편의 저자는
유일하게 노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노인은 원수들의 공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원숙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노인의 기도”로 불리기도 합니다.
아직 나 자신을 노인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약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든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무엇을 할 수는 없어도
어떤 놀라운 일은 하지 못한다고 해도
묵묵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자녀 손들에 보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욕심이 많아지고
너무나 쉽게 삐지기 잘하고
아이처럼 투정이나 부리는 자라는
말을 듣는다면 참 슬픈 일입니다.
오늘 시인은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1.하나님을 향한 부름(1-4절)
시인은 고난의 때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하나님을 부르고 간구합니다.
시인은 주님만이 피난처임을 알기에
주님을 피신처로 찾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계속되지 않도록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간구하여 구원을 호소하는 것은
“주의 의”를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보통 나의 힘든 상황을
해결해 주기만을 바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의만 보고서
기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의만 생각하면
누가 그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와 자애로운 의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함과
보살핌 그리고 너그러움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긍휼함과 보살핌과 너그러움에
힘입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의 보살핌과 너그러움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하나님을
자신이 항상 들어갈 수 있는 반석과 산성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런 하나님이라고
약속하셨다고 믿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
자신의 반석과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면서 원수들을 가리켜
악인, 불의한 자, 흉악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원수에게 고통을 당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반석이 되고 요새가 되어
보살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고
자애롭게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신뢰 고백과 찬양(5-8절)
5-8절은 시인의 신뢰 고백과 찬양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참 중요한 사실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복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선택권을 무시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복은 없습니다.
태어나보니 북한이 아니고 남한에서
태어난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부모밑에서 그렇게 믿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각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서
한평생 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6절)
지금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의 고통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마땅히 보존해 주실 것임을 확신하는 표현입니다.
7절에서 시인은 이상한 징조를 봅니다.
그것은 은총의 표시라기보다는
진노의 표시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인의 존재를
불길한 징조로 취급합니다.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살아온 자신이
그런 취급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망하고 낙담하여야 할까요?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주님을 변함없이 신뢰하면서
찬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8절의 찬양 서원에서도
경건한 찬양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내 상황이 어떠하던!
내 형편이 어떠하던!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3)적들로 인한 간구(9-13절)
9-13절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늙을 때”와 “쇠약할 때”라는 9절의 표현을 보면
이 시의 저자가 노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유년 시절의 하나님과
노년 시절의 하나님이 같은 분입니다.
시인의 대적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헐뜯고 음모를 꾸밉니다(10절).
대적들의 말을 들으면
시인은 현재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11절).
그들은 비열하게 시인의 약점을 공격해서
그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밀어 넣습니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의 현존과 도움을
급히 간청함으로써 당면한 위기를 대처합니다(12절).
그러면서 대적들이 자신에게 입힌 그 수치가
그들에게 바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13절).
수치는 당시 사회와 문화의 지배적인 가치와
행위를 스스로 저버린 사람에게
공공이 가하는 비난에 가까웠습니다.
이는 명예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엄청난 사회적 압박으로 여겨졌습니다.
4)신뢰 고백과 찬양(14-17절)
이 단락에서 시인의 고백과 찬양이 다시 등장합니다.
14절은 “그러나 나는”으로 시작합니다.
주변의 오해와 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시인의 성향과 체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세상이 뭐라 해도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성향이 되고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주의 공의와 주의 구원을 온종일 찬양합니다(15절).
시인은 오직 ”주님의 능하신 행적“과
”주의 공의“에 집중합니다(16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또한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유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경험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전하겠다고 서원합니다(17절).
5)사명을 위한 간구(18-21절)
시인의 기도는 성장하여 18-21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사명을 놓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노인이 된 시인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18절)
그는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을
후대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신앙인이 노년이 되었다고 하면
바로 후대 곧 자녀 손 들에 후배들에게
주의 능력과 힘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의 노년을 보내는 자로서
그것만큼 큰일은 없습니다.
19절에서 시인은 ”지극히 높으시니이다“라는
수직적 범위의 표현을 사용하여
”주의 의“를 높이 찬양합니다.
”누가 주의 같으시리이까?“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다른 어떤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함을 강조합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그 어떤 신과 같을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임을 경험하였기에
그것을 증언하고 가르치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신도 주님이 펼치시는
힘과 능력에 준하는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20절의 땅 깊은 곳은 죽음의 땅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죽음의 고통에서
자신을 온전히 건져 달라고 간구합니다(21절).
시인의 삶으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의 삶은
무수히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그러한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을 겪습니다.
그러할 때 기도할 수 있고 의탁할 수 있고
건져지는 경험을 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하였고
자녀 손들에 보여주었습니다.
6)찬양 맹세(22-24절)
그래서 시인은 22-24에서 찬양 맹세를 합니다.
시인은 비파와 수금으로
주의 성실을 찬양하기로 맹세합니다.(22절)
하나님을 찬양할 때 찬양하는 자들은
입술과 영혼이 즐겁게 됩니다.
시편1:2의 시인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과 같이
이 시를 지은 시인의 혀도 주의 의를 쉼 없이 읇조립니다.
결국 시인의 원수들을 패망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시인은 그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이 시를 마무리 합니다.
보통 탄원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찬양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백발의 노인이 된 시인은
평생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기를 고대합니다.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을 붙들고 호소하는 시간보다
그분을 굳건히 신뢰하고 찬양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아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심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많은 험난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주님의 보살핌과 너그러움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항상
그리고 종일토록 주님을 신뢰하고 찬양했습니다.
인생의 풍랑이 일 때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신뢰와 찬양으로 고비를 넘겼습니다.
우리도 이 시인의 모습처럼
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언제 어떤 상황을 맞더라도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이들이 아무리 조롱하고 비난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기리며 바르게 행하는 자입니다.
옥이 어떤 상황에도 옥으로서
빛과 소리와 따뜻함과 강함이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를 위에 먼저 다른 사람이
알아주길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운 바 뜻에 따라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행하는 일이
목숨을 버릴지라도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처음은 누구나 다 노력하지만
끝까지 계속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신앙은 계속 깨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주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나를 붙잡아줄 주님이 계시기에
나를 용납해 줄 주님이 붙잡아 주시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서서 주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갈 때
옥처럼 빛나는
옥처럼 맑은 소리를 내는
옥처럼 강인한 모습으로
옥처럼 따뜻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