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간호사, 보건 교사)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가 있다. 60년도 더 된 영화이지만 주인공의 깊으면서도 반항기 어린 눈빛이 아직도 강렬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나의 기억 속에서는 그렇게 찬란하기만 했던 배우 알랭 들롱을 영 낯선 사진으로 만난 것도 놀라운데, 오랜만에 들은 그의 근황은 더 충격적이었다. “알랭 들롱 안락사 결정”이라는 뉴스 제목으로 그를 만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 뜻밖의 소식에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이 글에서는 혼용되어 쓰이는 안락사라는 용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안락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안락사의 정의 안락사에 해당하는 영단어 euthanasia는 ‘좋은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의학적으로 안락사란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환자 본인 이외의 사람이, 환자에게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물질을 투여하는 등의 인위적 적극적 방법으로 자연사 과정보다 앞서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안락사는 적극적, 간접적,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하는데, 이는 환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도에 따른 분류다. ‘적극적인 안락사’는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환자가 원하는 경우 또는 환자의 동의는 없으나 가족이 원하는 경우, 환자의 사망 과정에 의사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의도적으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말하며, ‘행위적 안락사’라고도 한다. ‘간접적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이 단축될 위험이 있음에도 환자의 고통을 완화할 목적으로 적극적 처리를 한 결과,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예상된 부작용으로 인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말하며, ‘결과적 안락사’라고도 한다.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의 진행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직면한 환자에 대한 치료를 중지하거나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환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행위를 말하고, 소위 ‘죽게 놓아두다’(letting the patient die), ‘플러그를 뽑는다’(pulling the plug)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소극적 안락사는 2018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이 다루는 일명 ‘존엄사’와 많은 부분이 겹친다. ‘소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은 이 법률 이전의 용어이고 환자를 죽게 만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용어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해 보인다. ‘존엄사’라는 말은 의학 전문 용어가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사용한 용어를 2009년 ‘세브란스 병원의 김 할머니 사건’ 이후로 우리나라 언론에서 사용하고 있다. 존엄사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는 ‘환자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의학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다면, 무의미한 의학적 연명 의료를 중단하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지키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명의료결정법에는 ‘존엄사’라는 말이 등장하지는 않고, ‘연명 의료를 중단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의사 도움 안락사’는 환자가 자신의 생명을 끊는 데 필요한 수단이나 그것에 관한 정보를 의사가 환자에게 제공함으로써 환자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이다. 위에서 말한 알랭 들롱이 나중에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 이것이며, 그가 살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합법적 행위인데 ‘조력 자살’이라고도 불린다.
안락사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여러 관점 교회 안에서 안락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먼저,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인간의 자의적 결정이 불가하며, 자연사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다. 뇌사 상태라도 다른 신체 기능이 살아 작동하고 있다면 영혼이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생명의 신성함 원리를 새롭게 해석하여 현실에 맞는 새로운 존엄사 담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명 치료를 통하여 얻어지는 생명의 기간까지 신성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도적인 입장에서는 연명 치료 중단에 따른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남용의 방지를 담보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안락사’라는 말 안에는 죽음의 순간에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 알랭 들롱이 선택한 안락사는 분류하자면 ‘의사 조력 자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명칭만 바꾸어도 그 어감과 전달되는 가치가 달라져 버린다. 물론, 어떤 말을 사용하든지,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방식을 선택한다. 성경은 안락사를 포함한 여러 의료 윤리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가치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안락사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 연장 기구의 전원을 끌 수 없다고 한다면, 죽음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며, 온갖 기계를 달고 숨만 쉬는 환자의 삶이(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 쪽으로 가게 되면 (교회 안에서 이 입장을 지지하는 의견은 없다), 너무나도 생명을 경시하게 되며 쉽게 삶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죽음을 무조건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양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일 텐데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더 합당한 결론을 쉽게 찾을 수 없을 때는 다시 예수님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의 주제인 죽음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끝까지 고집하지도 않으셨고 가볍게 무시하여 초월하지도 않으시면서, ‘잘 죽어간’ 한 전형적 모델이 되신다. 알랭 들롱에서 시작한 ‘좋은 죽음’(euthanasia)에 대한 생각이 예수님에게서 끝이 나지만,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결국 맞이할 나의 죽음이 예수님처럼 좋고 존엄하고 고귀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계속 답을 찾아 나가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에서 발행한 "안락사와 존엄사, 그리고 좋은 죽음"(2022.5.25) 내용 입니다. #풀가스펠뉴스 #기윤실 #좋은나무 #안락사 #존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