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령을 경유하는 정예 에이팀을 안성매표소에 살포시 뿌려 놓은 우리의 느림보
리무진은 오래지 않아 곤도라가 설치되어 있는 무주 리조트에 당도한다.
덕유산 똥바람은 왜놈 순사 말채찍 보다 더 매섭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일단 고구마
장수 털모자를 깊이 눌러 쓰곤 등을 떼 밀리다 싶이 황급하게 곤도라에 탑승을 완료하니
입구 쪽에 오랫만에 나오신 욕지도 출신 여전사 꼭지님이 앉아 계신다. 흐 흐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급경사를 위태롭게 올라 가는 곤도라 내에서 이긴 하지만
꼭지님을 뵈니 자꾸만 자꾸만 그 생각이 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어느 해 무더운 여름 날 소데나시 등산티를 입고 나타 나셨던 꼭지님과 하산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 뚬벙(웅덩이)에 뛰어 들어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쫒으며 잼나게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 났기 때문이다. 빌어 묵을 나이는 왜 자꾸만 쳐 먹는지...
흐미 겨울철이면 똥바람이 미친년 널 뛰듯이 천지 사방으로 불어 대던 덕유산 정상부는
눈풍경이 마치 삼태기에 담아 둔 재 처럼 미동도 없이 안온하다.
신기할 정도로 따뜻한 날씨이기 때문에 점심은 향적봉 대피소에서 해결키로 하고 설천봉을
경유하여 향적봉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좋은 날씨 탓인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서해안 갯펄의
게떼처럼 와글거린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부터 주소를 지명 대신에 도로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도로명을 사용하면
주소지를 찾기가 아주 편리하다고 한다. 허나 우리가 여지껏
사용해 온 지명은 그 의미나 역사적 유래 등등이 그냥 흘러 버리기엔 너무 아쉬운 점이 많다.
이곳 덕유산 향적봉만 보아도 예사로운 지명이 아니다. 왜 이다지도
높은 산 꼭대기에 고운 향내가 켜켜이 쌓인다는 향적이란 의미를 부여하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쌀가루 같은 흰눈이 겹겹이 쌓여서?
단양에 있는 소백산 구인사란 사찰에 있는 사찰 내 식당(공양칸)엔 향적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여러 대중들을 위해서 쉼 없이 올라 오는 된장국 끓이는 냄새와 보리밥 뜸
들이는 구수한 냄새가 아무래도 켜켜이 쌓일 터이다.
무주 리조트에서 설치한 휴계 식당에서 오뎅 국물 우리는 냄새와 햄버거 굽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케 할 줄을 우리 조상들은 이미 알았던 것인가?
그리고 내 고향땅에만 해도 듣기만 하여도 절로 정감이 가는 지명이 무수히 많다.
한문으론 송야(松夜)로 쓰지만 우린 솔밤이라 불렀고 운곡(雲谷)은 구름장골이라고
불렀으며 후삼국 시절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일대 접전을 벌렸던 다리는 합전교라
하였고 그 일대의 지명이 막곡리인 것은 당시에 두 군대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장막을
치고 숙영을 했었던 곳이라 해서 막곡리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내 고향
안동 사람들은 간고등어와 문어를 즐겨 먹는 것으로 유명한데 콩 또한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 유명한 안동 국시는 반죽을 할 적에 밀가루와 함께 콩가루를 반드시 섞어 넣고
겨울철에 시래기국을 끓일 적에도 시래기를 일차로 콩가루에 버무린 연후에 국을 끓였다.
대두콩을 많이 심는다고 하여 대두서란 마을 이름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예로 부터
지명에 안동처럼 편안할 안(安)을 쓰는 곳은 천재지변이나 난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고려 때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홍건적을 피해 안동땅으로 몽진을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코가 닿을 듯이 바로 옆에 있는 평택은 물난리가 나도 유기로 유명한 안성땅은
꺼떡도 없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는 시골에서 콩농사를 하는 농민들이 정부에 대고 통 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일부 정치인들이 중소기업을 보호한답시고 콩나물이나 두부를 비롯한 일부 식품을
대기업에서 취급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하고 나니 국산콩이 도무지 팔리지를 않는다는 것이
농부들의 하소연이다.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얼씨구나 하면서 값싼 수입콩으로 콩나물이나 두부를 만들어 버리니 국산콩이
팔릴 턱이 없는 것이다.
기 막힌 조망과 바람 한 점 없는 포근한 날씨로 마치 어머니 뱃속을 연상케 하는 어느 넓다란
난장에서 맛난 점심과 쐐주 한꼬뿌를 후딱 해 치우곤 향적봉 대피소로 내려 오니 염 고문님이
마악 식사를 마치시곤 기다리고 계신다.
중봉을 경유하여 오수자굴로 내려 가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이곳에서 바로 백련사로
하산을 하자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내 목표는 향적봉도 구천동도 아닌 바로 이곳 백련사이다. 본론으로 들어 가기
전에 잠시 스프 한 접시를 드셔 보는 기분으로...
해외 토픽에서 잠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중국의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산천을 훑고 다니면서 수석을 채집하였는데 1에서 부터
0 까지 숫자가 뚜렷하게 새겨 진 돌을 줏어 모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을
삿짜라고 해서 넉 4 외에는 저 마다의 숫자에 나름대로의 좋은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특히나 아홉이란 숫자는 그 의미하는 바가 상당하다.화투 놀이에서도
아홉이란 숫자는 갑오라고 해서 최고의 숫자로 사용되듯이 무주 구천동의 아홉이라는
숫자는 9나 구천이라는 숫자의 의미 보다는 무한대로 많다는 의미가 아닌 가 생각된다.
우리와는 달리 중국 사람들은 아홉 보다는 여덟이란 숫자에 더 연연해 한다. 아마도
아홉이란 숫자는 보름달처럼 여차직 하면 기울어 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아직 채
차지 않으면서 뭔가 넉넉해 보이는 여덟이란 숫자를 택하는 것이 아닌 가 생각된다.
사연이 많으면 구구절절이요 꼬랑지가 무수히 많으면 구미호가 되듯이 구라는 숫자는
많으면서도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숫자인데 흐 흐 제가 살고 있는 동네가 바로
분당구 구미동입져. 화투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가 대박이 터졌다는 신조어가 나오기 전에는 노가 났다 노 났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
했었는데 이 뜻은 도리찌꾸땡이란 화투 도박을 할 적에 선(오야)이 먼저 일정 금액의
판돈을 걸고 이 금액 범위 내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뱃팅을 하게 되는데 이때 오야는
범위 내의 돈이 전부 올인되거나 아니면 판돈이 세배로 불었을 경우에는 노가 났다고
하면서 선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 주게 되면서 생긴 말이다.
고찰 백련사 대웅전의 현판엔 명필 한 석봉이란 이름이 뚜렸하게 새겨져 있었고 법당
벽면에 세로로 만들어 새워 둔 주련과 돌배나무가 앞에 있는 우화루라고 하는 누각의
현판은 오대산 탄허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일보에는 이 규태 칼럼 이라는 글을 쓰셨던 검은 뿔테 안경의 참으로 박식하셨던
이 규태란 분이 계셨고 최근에는 같은 전북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이야기 꺼리를 줏어
모으는 채담가라 칭하면서 여러 분야에 달통하신 젊은 학자 조 용헌이란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이 최근에 조선일보 조 용헌 살롱에서 탄허 스님의 예언에 대해서 쓰신 글을
염 고문님께서 들려 주신다. 조 용헌 선생은 박식할 뿐만 아니라
글을 참으로 맛깔나게 쓰시기 때문에 이 분이 쓰신 책은 빠짐없이 섭렵을 하였지만 사실
탄허 스님의 남북 통일에 대한 예언은 어째서인지 기억이 아심삼삼하다. 염 고문님
으로 부터 들은 조 용헌 살롱의 탄허 스님의 예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해 올리면...
1983년에 입적을 하신 탄허 스님은 유불선에 달통하신 당대 최고의 선승이셨는데 자신의
죽을 날짜를 비롯해서 일본 열도 침몰설 까지 여러가지 일에 대해서 많은 예언을 하셨고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신라 향가 해독의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강연이 있을
때면 자칭 국보라고 하셨던 양 주동 박사가 이 탄허 스님의 장자에 관한 강의를 듣고 나선
설령 죽었던 장자가 다시 살아 와서 자신의 책을 강의해도 탄허 스님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극찬을 하셨던 탄허 스님께서 어느 때
월악산 송계 계곡에 있는 덕주사란 사찰에 오셔서 월악산 영봉이 물에 비추이고 3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 우리나라에 여자 임금이 나타 나시게 되고 이 여임금이 나타 나시고 삼년
정도 뒤에 남북통일이 된다는 것이다. 묘하게도
충주 제천 일대에 충주호가 생기면서 월악산 영봉이 물에 비추이게 되었고 그로 부터
삼십년 세월 뒤에 현재의 박 근혜 대통령님이 나타 나신 것이다.
탄허 스님 박물관이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 세워 진지가 오래지 않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방문해 보심도 좋을 듯 합니다.
2011년도 초에 이곳 백련사에서 삼공리로 하산을 할 적에 우연히 강 대장님을 만났었고
얼음 밑을 종횡무진하는 수달 부부를 보면서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
뒤를 돌아 보니 사진에 취미가 많으신 야생화님과 구름님이 오시길래 수달을 가리키며
사진을 주문을 했던 기억이 뚜렸하다. 집꾸석에 있는
우리 예폔네 말 중에서 새겨 들을 말이 딱 한마디 있다. 당신이라는
작자는 돈 버는 재주와는 거리가 멀고 씨잘데기 없는 일로 대가리를 꽈악 채우는 일엔
아주 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쏙으로만 중얼 중얼 거려 본다.
이 마한너무 예폔네야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 오기만 해 봐라.. 이렇게 사느니
땅벌 구녕에 그시기를 드리 대고 사는 게 헐 낫재.
분당 탄천변에서 쟈이언트 수달 돌삐 드립니다.
첨언 : 국문학자 양 주동 박사는 동국대에서 오래 강의를 하셨는데 당시 일차 대입에서
낙방을 하고 이차로 동국대에 입학을 한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자리이면 꼬옥 나오셔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동국대가 이차 대학이라고 해서 조금도 실망을 하지
말라신다. 동보(동국대 보물)인 양 주동이가 있기 때문이라며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만들어 지시곤 하셨는데 말년에 뛰어 난 재담 덕분에 방송에도 출연하시면서 좌담회 같은
곳에서 맹활약을 하셨는데 어느 프로에서 사회자께서 양 박사님께 어떤 당연한 것을
기대하면서 낚시에 대해서 양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여쭙기 바쁘게
자연을 벗 삼는 신선놀움 어쩌구 저쩌구를 기대했던 예상과는 달리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아악씨이 아니 사내 대장부란 놈이 머어 할 일이 없어서 수채구녕을 뒤져 지렁이
몇 마리를 잡아선 바늘에 꿰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물고기를 속이면서 고기야 고기야 제발
내 낚시를 물어 달라면서 하루 쥔종일 땡볕에서 쮸구리고 앉아 죄 없는 물고기를 속여
먹고 있냐며 입에 거품을 문다. 뛰어 난
언변의 양 박사님이 강의 도중 딱 한번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여름철이라 모시 적삼을 입고 강의를 하시느라 팔을 치켜 들어 칠판에 글씨를 쓰시자
배꼽이 드러 나게 되었는데 이를 앞좌리에서 올려다 본 여학생이 키 키 거리며 웃자
양 박사께서 아니 학생은 좀 전에 내 얼굴을 보고는 웃지 않더니만 왜 내 배꼽을 보곤
웃냐며 역정을 내시자 저어어
교수님 얼굴은 구면이고 배꼽은 초면 이라서 그래요.
나도 그때는 한창 낚시에 미쳐 있을 때라 저런 분이 왜 저룬 말씀을 하시나 했었는데
낚시가 살생이란 생각이 들어 낚시 보따리를 아궁이에 집어 넣어 버린 지금에선 양 박사님
말씀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 진다.
첫댓글 덕유산 산행기에 붙여진 여담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럼 3년후엔 통일?
ㅎㅎ..모든 말들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않되는데..ㅎ
염선생님과 하산하셨으면 두분 이야기가 구천동보다 더 길어졌을듯합니다.
백련사 현판을 자세히 본적이 없는데.
다시 가본다면 똑똑히 보고 와야겠습니다.
돌삐님의 구수한 산행기 다음주 계방산에선 못 보겠지요?
돌삐님 오신다면 연지평님을 초대할려했었는데 말입니다.ㅎ
계방산 아래 터를 잡으신 연지평님도 뵙고 싶어서요.
온화한 덕유산 덕분에 향적봉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사방 켜켜이 산그레메와 눈맞추고 왔습니다.
양주동박사님 지두 참 많이 좋아했는디
말씀이 시원시원하고 코믹했다고나할까
하지만 참으로 속이 시원하게 뚫어주시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돌삐님 세대나 지세대나 함께하는듯 하네여
누 누 누님! 나이도 비슷허고 세대도 도찐 개찐이고 흐흐
같은 삼국대 출신이니 맞 먹어 보십시다 그려
지난 송년 잔치 때 화장실 갈려고 문 밖을 나섰다가 마침 계단으로 내려
오시던 누님께서 제가 눈까리에 띄기 무섭게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시면서
오른쪽 무릎을 위로 올릴려고 하시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꿈도 소름이
끼친니다. 니킥으로 남자들 붕알 까기에 명수란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지라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을 가선 오들 오들 떨던 기억이 여태도 쨍쨍 합니다.
돌삐선배님! 산행 일기는 아마도 제가 가장 빠른속도로 읽고 이해력도 엄청납니다~~ㅎ지난해 2월 남덕유산행때 뵈었지요..그런데
더 건강해 보이고 멋졌어요~~늘 건강하시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돌삐님 이번 덕유산 사진을 보니 공군 조종사들 쓰는 썬그라스에
배도 두둑하고 딱 대장 스타일~~!!
무전기 하나 채워 드렸어야 하는건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