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은 한바탕 굿마당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불운을 만나 가슴 속에 응어리를 앉고 살아가는 민중들 앞에 신명난 무당이 나타났다. 진짜 무당은 아무런 과정 없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남 보다 더 큰 고통, 남이 겪지 않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어야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멸문지화를 당하여 지옥의 문 앞까지 다녀온 조국은 총선판에서 한 바탕 굿판을 벌일만한 신명난 무당으로서 자격이 충분할 터이다.
공감(empathy)과 연민(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같은 뜻으로 쓸 때가 많지만, 사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공감은 같은 입장에서 느끼는 적극적이라면 연민은 보다 소극적이다. 그런 면에서 조국 일가에 대한 감정은 공감 보다는 연민의 감정의 영향이 클 것이다. 특별한 정치적 신념이 없어도 조국 일가에 대한 조리돌림에 대하여 단순히 “너무하다”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총선 판도에 돌풍 아닌 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조국혁신당 기류의 중심에는 이와 같은 한풀이의 심리가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은 선의에서 운세를 보아 주겠다고 연락을 해오는 무당들이 섭섭하게 “그런 것 안한다.”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 조국은 자신이 무당이 되어 검찰독재귀신을 쫒아내는 한바탕굿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조국신당의 영입인사의 면면을 보니 ‘윤군에 대한 원한’이 맺힌 모이는 수호지의 양산박 느낌이 난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정치판에 발을 담그는 이유는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지만 조국을 정치판으로 이끈 원인은 ‘원한’ 때문이다. 조국이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를 하지 않았을 입장에서 복수를 하기 위해서 결단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정치에는 대의뿐만 아니라 싸워야 할 적이 있어야 한다. 조국이 원한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적은 누구인가? 그의 적을 나의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의 원한은 폭발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 일가의 지옥문 앞의 시련이 검찰독제 청산의 불쏘시게가 될지는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십자가는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지는 것이다. 조국 일가는 지난 몇 년간 지옥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들이 걸은 길은 지옥 길이 아니라 ‘검찰개혁’이라는 언덕 길이라는 것을. 검찰개혁의 길은 골고다의 언덕처럼 험한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