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욥기 39장 1절 – 30절)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11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5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과,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의 변론(32-37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변론이 다 끝난 상황에서,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내용의 중간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통치 섭리에 드러나는 주님의 주권과 지혜와 권능에 대한 70여개의 질문들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쏟아내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동물 생태에 나타난 주권자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와 권능에 관한 질문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들의 생태에 관한 간략한 묘사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창조하면서도 서로 다양한 다른 생태적 환경과 모습으로 살게 한 것에 대한 증언을 욥에게 질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 현존의 미해결 문제인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선과 악이 혼재하여 공존함으로써, 불의하고 모순된 상황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와 판단력으로는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깨닫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동물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지혜와 특성의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근거한다는 것을 욥에게 깨닫게 하심으로서, 욥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의 의미도 욥 자신으로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물들의 생태적 성품과 움직임까지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욥에게 동물들의 생태 상황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39:26,27)라고 반문하여 물으신 이유이며 의미입니다. 1. 왜 욥에게 야생 동물의 습성을 묻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앞부분(38:39-41)에서 동물의 왕인 “사자”와 아주 연약한 존재에 불과한 “까마귀 새끼”의 생태를 대비하여 증언하며, 욥에게 과연 네가 그들에게 그러한 생존의 지혜를 줄 수 있으며, 누가 그렇게 그들에게 생존을 위한 세밀한 관심을 보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향한 세밀한 관심과 권능적인 지혜를 나타내 보이시는 한편, 인간이 가진 연약함과 한계성을 대비하는 질문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다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욥이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몇 종류의 야생동물의 생태적 습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인간이 마치 서로 자신들이 아는 것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얼마나 한계적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는 질문을 연속하여 하나님은 욥에게 던집니다. 이 질문이 단지 욥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친구를 위로하기보다 가르치려고만 했던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세로 다른 사람이나 만물과 교감해야 하는지를 겸허하게 생각할 줄 아는 이들이 지혜로운 신앙인들입니다. 첫 번째로,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39:1,2)라며, 성질이 사납고 인간이 접촉하기 쉽지 않은 바위가 많은 광야와 황무지라는 험한 지형에서 서식하는 야생동물인 “산 염소”와 “들 사슴”(새번역)에 대한 출산 생태를 아느냐고 욥에게 묻습니다. 자주 대하는 가축이 아니다보니,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야생 동물의 생태를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일반 가축과 다른 독특한 출산 과정과 생태 형태를,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39:3-4) 곧 “언제 구푸려서 새끼를 낳는지를 아느냐? 낳은 새끼를 언제 광야에다가 풀어 놓는지를 아느냐? 그 새끼들은 튼튼하게 자라나면, 어미 곁을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새번역)라고 하나님은 밝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상황들이, 우리 각자가 아는 방식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자각과 각성의 요청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39:5) 곧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주어서 자유롭게 해주었느냐? 누가 날쌘 나귀에게 매인 줄을 풀어 주어서, 마음대로 뛰놀게 하였느냐?”(새번역)라며, “들 나귀”를 집에서 사는 가축과 달리 하나님께서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39:6)고 하심으로써, “들판”에서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습성과 “소금기 있는 땅”(새번역)에서 사는 생태 환경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욥에게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들 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39:7-8) 곧 “들 나귀가 시끄러운 성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아무도 들 나귀를 길들이지 못하고, 일을 시키지도 못한다. 산은 들 나귀가 마음껏 풀을 뜯는 초장이다. 푸른 풀은 들 나귀가 찾는 먹이다.”(새번역)라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옮겨 다니는 “들 나귀”의 습성과 인간이 길들이지 못하는 야생적인 본능을 증언하심으로써, 사람의 의지와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그러한 습성으로 살도록 주관하시고 존재케 하시는 분이심을 밝힙니다. 세 번째로,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39:9)라며, 인간의 통제 하에서 인간을 위해 일하는 가축과 달리 야생 동물인 “들소”는 인간을 위해 일하지도 않을뿐더러 집 “외양간”에 머물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욥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39:10-12)라는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과 달리 우리 인간이 주관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문의 질문이었습니다. 미물인 짐승조차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모두 하나님의 세밀하고 철저한 주권적 섭리와 능력에 의해 각기 특유의 습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밝힙니다. 야생 동물이 단지 “힘이 세다고” 의지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과, 우리 인간의 생각과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상황들을 자신의 판단에 제한하지 말 것을 일깨웁니다. 2. 왜 욥에게 타조의 어리석음을 설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야생 동물의 서로 다른 다양한 습성과 생태 환경을 욥에게 질문한 것은, 그만큼 우리의 상황과 현실은 우리 인간의 경험과 지각과 판단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것들이 그렇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이 살아가게 허락하셨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39:13) 곧 “타조가 날개를 재빠르게 치기는 하지만, 황새처럼 날지는 못한다.”(새번역)라며, “타조”의 생태적 비유를 통해서 “타조”라는 야생 동물이 장점만 가진 것이 아니라 단점을 가지고 있고, 그렇다고 단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타조”는 현존하는 조류 중에 덩치가 가장 커서 길이가 2.5m에 이르며, 몸무게도 130여kg의 잡식성 동물입니다. 따라서 엄청나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무거워서 날지 못하는 새라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타조”의 생태 방식이 우리 인간이 보기에만 어리석어 보이는 것일 뿐, 또 다른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흔히들 간과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고 섭리한 것인지를 깨닫는 이들이 복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열대 지방에 서식하는 “타조”의 새끼 부화 방식은 다른 새들과 달리,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39:14)라고 함으로써, 모래에 구멍을 파서 그 안에 알을 낳아 따뜻한 흙의 온도로 부화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 알을 낳고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때문에,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39:15-16)라고 밝힙니다. 굉장히 지혜롭게 새끼를 양육하는 다른 새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39:7)고 하나님은 밝힙니다. 결국 만물이 생존하는 각기 다른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타조”의 알은, 망치로 깨어야만 깨어질 만큼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기에 “타조”의 부화 방식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타조”가 멸종하지 않고 대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또한 “타조” 자체가 생존하는 방식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보호하심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이처럼 부화 방식이나 새이면서도 날지 못하는 미련해 보이는 “타조”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39:18)고 할 정도로, 말이 네 발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속 70-80km인 반면, “타조”의 탁월한 특성은 그 큰 덩치로 더군다나 두 발로 시속 90km의 달리기 속도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야생동물의 생태 방식이 우리 인간의 생각과 시각과 판단과 달리, 어리석어 보이는 그 존재 자체도 또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시각과 판단이 얼마나 편협하고 제한적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질문을 욥에게 계속하신 이유입니다. 3. 말과 독수리의 특성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말”과 “매”와 “독수리”의 서로 다른 독특한 습성과 생태를 통해서, 욥에게 그들 각자가 지닌 지혜로운 생존 본능과 생태적 모습을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39:26,27)고 묻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39:19-20) 곧 “욥은 대답해 보아라. 말에게 강한 힘을 준 것이 너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달아 준 것이 너냐? 네가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만들었느냐? 사람을 두렵게 하는 그 위세 당당한 콧소리를 네가 만들어 주었느냐?”(새번역)라며, 하나님께서 욥에게 과연 “말”을 용맹스럽게 한 것이 누구이며, 네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로 드신 동물 중 유일한 가축인 “말”은 전쟁이나 운송 수단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근대까지 “말”은, 전쟁에서 대열의 맨 앞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기병대로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무기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이 가진 뛰어난 용맹성의 특성을, 전쟁터에서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39:21) 곧 전투의 격전지인 “골짜기”에서 달리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여 땅을 긁어대는 힘찬 “발굽질”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39:21-22)라고 밝힙니다. 더군다나 “말”은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화살이 난무하는 혼란스럽고 위험한 와중에도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39:23-24)라며, 거친 함성 속에서도 힘찬 기백을 잃지 않고 오히려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39:25)고 했습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죽음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휘관들의 호령”에 순종하여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말”의 힘과 용맹의 독특성에 대한 증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획일적인 모습으로 만들지 않고 각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해서 다양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증언합니다. 우리의 획일적인 사고와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를 제한하지 말 것에 대한 일깨움의 질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두 번째는, 이제 들짐승에서 날짐승이 가진 본능적 특성을 예로 들어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39:26)라며, 매년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겨울이 닥치면 “남쪽으로” 움직이는 이동 본능을 가리켜서 욥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이냐고 하나님께서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한 이동 본능을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지만, 자연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섭리와 지혜를 강조하는 질문입니다. 세 번째는,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39:27)라며,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못하는 높고 험한 벼랑 위의 바위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생태적 속성을, 욥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냐고 묻는 질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조류들과 다른 “독수리”의 생태적 습성을 가리켜서,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39:28), 그렇게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어도 괜찮은 것은 시각이 밝아서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39:29)라고 밝힙니다. 특히나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39:30)며, 죽은 사체를 먹는 “독수리”의 습성을 증언합니다. 이 때문에 티베트에서는 “독수리”의 이러한 습성을 이용하여, 죽은 시신을 내어주어 쪼아 먹게 하는 천장(天葬) 또는 조장(鳥葬)이라는 장례 풍습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수리”의 습성이지만, 인간의 단편적 지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 생태계에 이어서 야생 동물들의 다양한 생태 상황을 질문하신 것은,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창조와 통치 섭리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앞에 순종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야생 동물들의 서로 다른 독특한 습성과 생태와 지혜를 증언하는 질문을 통해서,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39:26,27)고 물으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연 만물의 존재 방식이 너무나 다양하고, 심지어 동물들의 생존 방식조차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동물들의 서로 다른 생태 환경과 습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욥과 친구들과 우리 모두에게 피조물마다 하나님이 정하신 독특한 본능과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능력으로 창조하셨다는 것과,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존재 의미와 재능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깨닫고, 주님만을 의뢰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우리가 처한 상황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이겨낼 것에 대한 당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러한 질문 과정을 통해서,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사43:10)고 말씀하신 것처럼, 욥으로 더욱 견고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롬1:19-22,새번역)라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연 생태계에 다양한 존재 방식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 인간 각자가 알고 있는 단편적이고 편협한 지식과 경험과 생각과 논리의 주장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이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