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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증발과 사진적 독백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관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개체상실이나 주체부재에 관계하는데, 이것들은 집단 사회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히 세상을 보는 관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가령 내 누님이 어떤 사고로 죽었다고 하자. 물론 그 원인이 개인적 과실이든 사회적 희생이든 여하간 한 인간의 죽음일 것이다. 이때 적어도 개인적 입장에서 누님의 죽음은 너무도 슬프고 비통하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사는 바로 이웃집 사람이라 할지라도 타자의 입장 즉 집단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백사장 한 줌 모래의 증발과 같이 공통된 관심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극히 ‘개인적인 일(?)’이 된다. 이럴 경우 누님의 죽음은 암암리에 묵인된 일종의 공동체적인 “필연적 무감각”에서 오히려 당연한 사회현상으로 이해된다.
집단 사회에서 인간의 증발과 무감각은 또한 기억의 간섭현상을 일으키는 오늘날 엄청난 정보 홍수에서 야기된다. 기억하기도 싫은 대구 지하철 방화, 삼풍백화점 붕괴, 이랜드 화재 등의 참사들은 바로 어제의 엄청난 사건들이었지만, 오늘날 기억 속에 이미 지나간 단순 사건-사고로만 기억될 뿐 당시의 끔찍한 상황은 전혀 기억할 수 없다. 굳이 영상 이미지로 말하자면 모자이크 방식으로 나타나는 디지털 화면이나 뿌옇게 흐려진 사진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특별히 “사진은 기억의 은유”(필림 뒤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개체의 무감각은 집단과 개체의 소통 구조에서 언제나 대중매체의 일방적 전달에 의한 획일화된 가치판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당장 종로로 나가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유심히 보자. 그들은 모두 각자 다른 개성과 각기 다른 차림새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잘 관찰해 보면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디다스 티, 찢어진 청바지, 귀고리, 미니스커트와 긴 양말, 유색 머리, 군용 스타일 옷, 리복이나 나이키 신발 등 그들은 누군가 만들어 놓은 ‘유형’ 안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외모로 드러난 주체부재의 단면일 뿐인데 대상을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와 가치관 역시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언제나 집단적 관점에서 길들려진 우리들의 맹신은 끝없는 개체 말살과 인간의 증발을 야기한다. 이는 사실상 오랫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합리적 사고 즉 논리와 획일 그리고 보편적 사고를 강요하는 구조주의에 빚지고 있다. “언어학적이고 무의식적이고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구조를 가지는 구조주의는 오늘날 예술 영역에서 전개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 오랫동안 인본주의의 상실을 야기했고, 그들 사이에서 신호들을 분절시키는 구조적이고 차이적인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드는 주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여기 보이는 작가 김영석의 미아 사진들은 정확히 이러한 문맥을 주파하면서 주체부재와 개체상실을 말하는 총체적으로 인간 존재의 상실에 대한 사진적 은유로 이해된다. 원래 미아는 말 그대로 단순히 잃어버린 아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익명의 아이들이 집단적 관점에서 분실된 개체의 존재로 이해될 때, 이러한 존재 역시 앞서 말한 누님의 죽음과 같이 극히 개인적 사건일 뿐, 전혀 심각한 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전혀 관심을 가지게 하지 않는 사회적 무감각일 뿐이다. 다시 말해 미아들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에서 어쩌면 개인적인 헤프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바로 내 아이가 미아가 된다면 문제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 관해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미아’라는 불확실한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다른 이들의 아픔보다 자신의 손바닥에 박힌 가시가 더 불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유적으로 우리들 삶의 리얼리즘 또한 여기 보이는 흐린 미아들 이상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가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보지 못했을 뿐, 사실상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진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특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었거나 잠재된 혹은 이미 사라진 죽음 이미지의 은유로서 의도적으로 디지털 확대 이미지의 모자이크 방식으로 이미지를 흐리게 했다. 그러나 이때 흐려진 이미지는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아쉬운 어린 시절의 달콤한 레미니센스나 지나간 첫사랑의 회상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선 작가 자신이 체험한 개인적 존재에 대한 허탈과 허무 그리고 공허한 개체의 증발 즉 존재의 무(néant)에 대한 사진적 독백일 것이다. 집단의 유토피아를 위한 모든 제도적 장치와 합리적 사고, 그것 또한 “우리 모두가 억압자임과 동시에 피억압자(미셀 푸코)”라고 하듯이, 우리 모두가 묵인한 공모임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오히려 그 공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무모한 도박인 셈이다.
이경률(사진 이론가)
김영석 Kim, Young-Seok
개인전 2006 迷兒 - 토포하우스
단체전 2005 포스트유니폼을 향하여 - 아르코미술관 2005 몽유도원 - 쌈지 2004 PLAY BUTTON - 문화일보갤러리 2002 춘천민예총 초대전 - 아트프라자갤러리 2002 공생공사 - 대구문화예술회관 2002 전달자로서의 사진과 영상 - 대구문화예술회관 2000 Urban Scape Seoul 2000 - 하우아트갤러리 2000 환경사진전 - 세종문화회관 2000 성의 사회성과 몸의 접근전 - 대구문화예술회관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현 중앙대, 호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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