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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2024년 3월 21일 “3분의 기적” 제목: 긍휼의 마음 1
[느헤미야 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버드대학을 다니는 한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환영은 커녕 박사는 그 학생을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몹시 실망한 학생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귀국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중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자 그 학생은 바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박사는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다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누가복음 6:36]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크리스찬들, 바로 우리이며, '먼저' 나 자신부터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가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산 위에서 많은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만심으로 가득찼고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 아래 남을 불쌍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 가는 데도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된다는 이유를 들어 외면했으며, 늙은 부모를 학대해도 성전에 가서 헌금만 두둑하게 내면 대우를 받는 세상, 짐승보다 더 포악한 세상이었습니다.
매정하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한 채 독하게 살아야 사람 대접도 받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거꾸로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만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로는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의 ‘긍휼’이란 말은 더 깊고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긍휼’은 흘러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주시는 태도입니다.
이 말은 내용에 따라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검, 민망히 여김 등의 말로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그만큼 폭이 넓고 심오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처지에서 생각하시려고 하고, 우리를 느끼고 행동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에 동참하시어 우리를 이해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태도는 ‘동일시’입니다. 동일시란 어려움에 처한 형제의 처지에 나를 갖다 놓고 그 형제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면서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일련의 태도와 행위를 말하며, 심리학에서는 ‘감정이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와 동일시하셨고, 우리를 완벽하게 긍휼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포기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의 처지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그냥 구경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셨고, 시험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시험을 몸소 체험하시면서,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두 번 옆에서 함께 마음 아파하고 도와주는 일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도움을 주며 꾸준히 함께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주님이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신비하고도 놀라운 긍휼을 입어서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먼저 받은 자로써 다른 이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맛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내일 계속됩니다.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저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똑같이 시험을 당하시고 저를 도와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먼저 저를 사랑하시고 베풀어주신 그 긍휼을 경험하였음에도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고 무시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예수님의 긍휼의 삶을 배워 이웃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크고 대단한 일, 많은 일을 하기보다 주님이 생명을 다해 사랑하셨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일에 먼저 힘쓰게 하시고, 형식적인 마음이나 행위가 아닌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을 제 안에 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후 2024년 3월 22일 “3분의 기적” 제목: 긍휼의 마음 2
[시편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몹시 추운 겨울의 어느 날, 뉴욕 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 살 정도 된 작은 소년이 브로드웨이가의 신발가게 앞에 서 있었습니다.
맨발인 소년은 치아를 부딪칠 정도로 심하게 떨면서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측은하게 지켜보던 한 부인이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꼬마야! 왜 그렇게 진열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니?”
“저는 지금 하나님에게 저희 가족들에게 신발 한 켤레씩만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그럴 능력이 있으실까요? 우리 가족은 여섯 명이나 되거든요.”
부인은 소년의 손목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인은 우선 여섯 켤레의 양말을 주문하고,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수건을 빌려, 가게 뒤편으로 소년을 데리고 가서 앉히더니, 무릎을 꿇고 소년의 발을 씻긴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었습니다.
부인은 점원이 가지고 온 양말 중에서 한 켤레를 소년의 발에 신겨 주었습니다. 소년의 차가운 발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인은 신발 여섯 켤레도 사 주었습니다. 남은 신발과 양말은 도망가지 않도록 끈으로 묶어 소년의 손에 꼭 쥐어 주면서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꼬마야,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놀라운 분이시란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거라. 자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니?”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띠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부인도 살짝 소년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그녀가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소년이 부인의 손을 잡고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눈가에 물기를 가득 머금고 물었습니다. “아줌마가 하나님의 부인이에요?”🌱
[누가복음 6:36]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자라고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비로운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몇 가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으로부터 배워야 할 첫번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아주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신분의 고하나 빈부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는 자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목자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뿔뿔이 흩어져 헤매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주님은 병든 자, 고아와 과부처럼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는 자, 귀신 들린 자와 같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마음의 상처로 우울증이나 성격장애, 분노조절장애, 히스테리성 인격장애 등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는 예수님처럼 용서를 통해서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시기 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이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못박는 짐승 같은 로마 군인들, 나를 팔아먹은 무지막지한 유대인들, 다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몰라서 한다는 말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불쌍히 여기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면서 불쌍히 여기셨고,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은 긍휼을 베푸는 자,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기심과 갈등으로 인한 풍랑이 일지 않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행복합니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도 주어질 것이요 되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재어서 너희의 품에 안겨 줄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줄 때에 잰 분량만큼 너희가 도로 받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즉 “네가 긍휼히 여기면 나도 너를 긍휼히 여기고 네가 용서하면 나도 너를 용서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고 먼저 불쌍히 여기고 먼저 구제하고 먼저 도와주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ㅍ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받고도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도 얼굴을 돌리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긍휼히 여기십시요.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 원하신다면 먼저 긍휼히 여기십시요.
이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긍휼한 마음입니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면 애타게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바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먼저 긍휼을 베풀어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고통과 절망 속에 빠진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길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에게 큰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주님을 알게 하시고 구원해 주시니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값없이 조건 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지체들, 고통받는 이웃들을 외면하고 매정하게 대한 저를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가 받은 그 긍휼함으로 아직도 내 안에 진정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응어리져있는 악한 마음을 버리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고통과 아픔, 불안과 슬픔, 혼돈과 상처로 신음하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작은 신음에도 반응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치유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요 = 신명기20;1-20(240324)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다.
유비 관우 장비 3형제
유비가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명랑”이라는 영화를 보고 싶어서 관우에게 극장표를 사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장비가 만류할 새도 없이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관우가 극장에 당도해보니 장비가 극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관우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장비가 한다는 말이, “아니. 형님, 이놈들이 말입니다. 글쎄 조조는 할인을 해주고(조조할인), 유비는 안 해 준다지 뭡니까? 으이그 이 나쁜 놈들” 살다보면 장비와 같은 엉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비는 막무가내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장비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을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러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라 하지만, 정복전쟁을 치루지 않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저 주지 않는다.이미 수 천 년 동안, 수 백 년 동안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삶의 터전을 삼던 가나안의 7족속들이 그냥 물러날 리 만무하다.
이들도 가나안 땅을 떠나면 마땅하게 갈 곳이 없다.
이들은 이 가나안 땅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일만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니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쳐들어온다 해도 결사 항쟁하여 가나안 땅을 굳건하게 지켜낼 것이다.절대로 그냥 내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만 된다.가나안 땅의 7족속은 목숨 걸고 가나안 땅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가나안의 7족속은 그들 나름대로 절대로 가나안 땅을 떠날 수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들 간에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전쟁을 치러서 이긴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니 가나안 땅을 지키느냐 빼앗느냐 하는 치열한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전쟁을 하게 되면 양편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함을 가지고 전쟁하게 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전쟁터가 아니라도 늘 무서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죽을 지도 모르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란 존재는 365일 매일매일 두려움과 무서움과 염려와 근심 속에 살아가는 존재 아니던가?
어쩌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 무서워하지 않는 것, 걱정하지 않는 것, 염려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작은 벌레만 봐도 질겁해서 도망가는 연약한 인간이 아닌가?
비가 올 때 작은 천둥만 쳐도, 번개만 번쩍번쩍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요동치고 몸서리쳐진다.
그런데 이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매일매일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어쩌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부럽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 염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우리들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①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4절에서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전쟁이란 군사력의 차이에서 승패의 갈림길에 놓이게 마련이다.
상대의 군사력이 강하여 최신식 무기도 많고, 군인들도 많고 전쟁을 뒷받침해 줄 경제력까지 높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군인들의 사기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상대의 전력이 강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주눅이 들고 겁이 나고 무섭고 두렵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을 먹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중동지역에서 최강대국이라는 애굽 제국에게 10재앙을 내리면서 몰살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히브리민족대이동이라는 엄청난 사역을 이루어 내신 분이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의 최강대국이라는 애굽제국도 몰살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7족속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니겠냐?
그러니 아무리 가나안의 족속들의 군사력이 대단한 것처럼 보인다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새발에 피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결코 기나안 족속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일어서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모든 면에서 러시아가 탁월하게 좋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졌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아주 쉽게 항복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예측을 보기 좋게 빗겨나가면서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고 있는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란 예측대로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예측을 보기 좋게 빗겨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전쟁의 주인이시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전쟁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군사들과 이 세상을 빼앗고자 하는 사탄의 군사들과의 전쟁이다.
그런가하면 이미 사단이 강력한 세력으로 정복한 세상의 모든 영혼들, 권세들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으로 회복시키느냐 시키지 못하느냐 하는 전쟁이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쟁,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눈에 보이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과 사탄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인간들의 더럽고 추한 욕망과 죄악 때문에 발생하는 전쟁처럼 보일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지구촌에서 발생한 많은 전쟁들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죄악으로 인하여 발생한 전쟁이다. 지금도 지구촌의 한 편에서는 전쟁이 진행중에 있다.
하지만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보이지 않는 두 세력 간의 치열한 전쟁이다.
곧 영적인 전쟁, 영전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다. 세상과의 전쟁, 죄악과의 전쟁, 사망의 권세와의 전쟁, 온갖 질병과의 전쟁, 온갖 문제덩이의 전쟁이다.
하나님과 사탄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서로 비난하고 죽이고 빼앗으면서 전쟁하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코 질 수 없다.
처음에는 모든 전쟁에서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탄이 백전백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처절하게 패배당하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전쟁은 처음에 이긴다고 해서 끝까지 이기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전쟁이 끝날 때 이기는 전쟁이라야 진짜 이기는 전쟁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고 무저갱으로 보내버리는 승리하는 전쟁을 하신다.
② 이기는 전쟁을 하시는 하나님.
전쟁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군사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기는 전쟁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패배하는 전쟁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로 징집된 병사들 중에 많은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려고 하면 병사 한 명이라도 더 많아야 되는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새로운 집을 지은 사람이나 새롭게 포도원을 세운 사람들이나 결혼하여 1년이 채 안 된 신랑들이나 마음에 두려워하는 군사들은 집에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아니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틀림없이 군사력이 약해질 것은 뻔한 일이지 않나?
적군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훌륭한 무기들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군사들의 수도 적군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다.
그런가하면 변변한 무기 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말 오합지졸과 같다.
오합지졸과 같은 군사들을 데리고 어떻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라고 하신단 말인가?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병사의 수가 많고 적음에 전쟁의 승패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에 서 계시는가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갈라진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사가 많아야 승리할 수 있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해야 승리할 수 있고, 전쟁을 뒷받침해 주는 경제력이 월등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세상적인 승리의 공식을 완전하게 깨뜨려버리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리, 세상이 추구하는 공식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산산조각으로 깨뜨려버리시는 분이다.
세상의 원리, 세상의 공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깨닫고 인식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전쟁터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신뢰하며 전쟁터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전쟁터에 세워놓는 것이다.
하나님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셔서 가나안의 7족속들을 향해서 직접 전쟁하신다.
가나안의 7족속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무서움을 주신다. 벌벌 떨게 만드신다.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도 전쟁다운 전쟁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두려워서 도망가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신혼인 군사들, 새 집을 산 군사들, 새롭게 포도원뿐만 아니라 무화과 과수원, 올리브 과수원을 만든 이스라엘 군사들, 전쟁에서 죽을까 봐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는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오직 전쟁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전쟁터에 나가게 하신다. 전쟁은 훌륭한 무기, 군사의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직접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신다.
③ 전쟁보다는 화평을 더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0-11절에서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어떤 나라와 민족과 피치 못할 처지에서 전쟁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먼저 해야 할 일은 화평을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먼저 손을 내밀어 화평을 청하고, 상대가 그 화평에 화답하면 전쟁하지 말고 상대를 종으로 삼아서 조공을 바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12-14절에서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화평을 요구했는데도, 그 화평을 거절하면 그들의 성읍을 점령하되, 남자들만 죽이고 여인들과 아이들과 가축들을 살려서 전리품으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렇게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들이나 아이들이나 가축들을 살려둘 대상은 가나안의 7족속이 아닌 다른 민족을 말한다. 가령 모압이나 암몬이나 에돔이나 아람이나 애굽과 같은 민족인 경우에는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은 살려서 전리품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15절에서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라고 말씀하신다.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해야 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가나안의 7족속 외에 다른 민족인 경우에는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을 살려서 전리품으로 삼고, 조공을 바치는 종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19-20절에서 “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의 족속들이 아닌 다른 족속인 경우에는 곡식과 과일과 같은 농작물까지도 보전해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 농작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리품이요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리나 밀이나 올리브나 아몬드나 석류나 포도나 대추야자나 무화과와 같은 곡식들이나 과일들은 직접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잘 보존하여 전리품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무기들이 필요하다.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나무는 잘라서 전차나 창과 같은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가나안의 7족속인 경우에는 호흡할 수 있는 모든 생명체는 진멸하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16-17절에서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7족속들에게는 농작물, 과일을 제외하고 호흡하는 것들은 다 죽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축들까지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 가축들까지도 조금의 긍휼이나 자비도 베풀지 말고 다 죽이면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18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18절에 보면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할 수 있는 민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7족속들은 단 한 생명도 남겨두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민족들은 남자들이건 여자들이건 아이들이건 가축들이건 어느 것 예외없이 깡그리 깨끗하게 진멸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④ 축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누가 봐도 이스라엘 군사들은 약소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고, 백전백패할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전쟁의 뚜껑을 열었을 때 승리하게 하신다.
오직 전쟁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전쟁터에 나가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전쟁터에 나가면 승리의 영광과 기쁨과 유업을 얻게 되지만 여전히 두렵고 무서워서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면 승리의 기쁨도, 영광도, 유업도 얻을 수 없다.
축복은 바로 전쟁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전쟁터로 나갈 때 받는다.
축복은 전쟁터로 나가는 군사가 받는 것이다.
전쟁터로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르시고 대신 전쟁에 참전한 이스라엘 군사들에게는 이에 합당한 기업으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해 주신다.
조금 전까지는 자신들의 땅도, 집도, 농토도 없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했다.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당당히 집과 땅과 농토와 기업의 주인이 되어진다.
자신의 소유물이 생겨나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
지금까지 지구촌에 등장하는 역사(歷史)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의 역사이건 전쟁이 없는 역사는 없다. 전쟁을 통해서 진행되어진 사건들의 연속을 기록한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전쟁은 토속 민족간에도 일어난다.
원주민들도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거나 다른 원주민의 영역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거나 다른 영역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한다.
동식물들도 전쟁하면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거나 지키기 위해서 전쟁한다.
인간이란 존재도 항상 전쟁을 치루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영토분쟁, 주권분쟁, 영역전쟁, 지식과 학문분쟁, 가족과 연애 전쟁도 일어난다.
성경에 기록한 이스라엘 민족사도 전쟁사(戰爭史)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물론이고, 주변국 나라와 민족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면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전쟁을 치루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치러야 할 전쟁은 육신적인 전쟁, 민족간의 전쟁들도 있지만, 영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면서 살아간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과의 영적인 전쟁을 치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영적인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우리들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언제나 항상 영적인 전쟁,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미혹간의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영적인 전쟁이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 영적인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둠의 세력들, 사탄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고 무너뜨리고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주고, 패배의식, 절망감, 낙담감, 실망감을 주어서 포기하게 만들려고 한다.
항상 싸워야 하는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들이 이기고 승리하는 전쟁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될까? 확고하고 변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
영적인 전쟁에서 최고의 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우면 사탄의 세력들은 쥐 죽은 듯이 사라진다.
어떤 특별한 권세를 가진 사탄의 세력이라 해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 죄악의 권세, 율법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함께하시면서 우리들 대신에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6:33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에베소서6:10-17절에서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말씀하신다.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하나님의 권세, 말씀의 권세,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죽으신 십자가의 권세로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승리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백전백패한다.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과의 전쟁에서 지금은 백전백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궁극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한번 이기는 것이 영원한 이김이 된다. 닛시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게 하신다.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무서움이 사라진다. 누구 앞에서건 자신감이 넘친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사모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을 대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도들도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신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면서 마귀들과 싸워 이겨낸 믿음의 용장들이다. 우리들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마귀들을 대적하여 싸워 이겨내는 믿음의 용장으로 세워질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주간을 묵상하면서 더욱 더 주님만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야 한다.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의 권세, 주님의 말씀, 주님의 임재하심,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살 때 이루어진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권, 인권, 물권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오직 주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세상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 온갖 시련과 역경과 고난과의 영적인 싸움, 죄악과 나의 못난 인격, 불신앙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