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909
■ 3부 일통 천하 (232)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5장 하나가 되는 천하 (8)
연(燕)나라에 이어 대(代) 땅마저 평정한 왕분(王賁)은 곧장 함양(咸陽)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 이제 단 하나 남은 나라.
바로 제(齊)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연(燕)나라 도성이었던 계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역수를 건너 남진(南進)했다.
이때 제(齊)나라 왕인 건(建)과 재상인 후승(后勝)의 처신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초나라, 연나라 등이 차례차례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두 사람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우리 제(齊)나라만큼은 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다.
오히려 주변 나라가 진(秦)나라에 통합될 때마다 사절단을 파견하여 축하까지 해주었다.
이에 대해 이사(李斯)와 위요(尉繚)는 제나라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다.
- 제나라와 진나라는 영원한 동맹국이오.
이런 면에서 그들은 철저히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따른 셈이었다.
제왕 건(建)은 진(秦)나라의 이런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전혀 국방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중에 느닷없이 왕분(王賁)의 공격을 받았다.
전혀 싸움이 되지 않았다.
공격하는 왕분(王賁)이 기막혀 할 정도로 제(齊)나라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이것이 한때 패업을 이루었던 제(齊)나라인가.'
진(秦)나라 군사들은 경주라도 하듯 임치성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 곳에서 왕분(王賁)은 또 한 번 놀랐다. 임치성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무슨 계략인가?'
경계했으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평상시대로 성문을 열어놓은 채였다.
왕분(王賁)이 군사를 몰고 임치성 안으로 들어가자 저편에서 한 사람이 수레를 타고 나왔다.
제나라 재상 후승(后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는 진(秦)나라에 항복합니다."
이리하여 왕분(王賁)은 칼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동방의 대국이자 마지막 남은 제(齊)나라마저 점령했다.
승전을 알리러 갔던 사자가 돌아와 진왕 정(政)의 명을 전했다.
- 제나라 종묘를 허물고 제왕 건(建)을 폐서인하여 공성(共城)에 안치하라.
제왕 건(建)은 공성으로 압송되어 갔다.
공성(共城)은 지금의 하남성 휘현 일대다.
제왕 건(建)의 거처는 태항산 기슭의 한 작은 모옥(茅屋)이었다.
사방으로 소나무와 잣나무만 빽빽히 들어찼다.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왕 정(政)은 제왕 건(建)에 대해 감시자만 배치했을 뿐 식량을 대주지 않았다.
고작해야 하루에 좁쌀 한 되뿐이었다.
폐서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었던 사람이다.
여러 시종들이 그 집에 함께 머물렀다.
그런 그들에게 좁쌀 한 되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먹을 것이 없어 늘 굶주렸다.
제왕 건(建)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밤이면 배가 고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왕 건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자신의 처지를 돌이키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제왕 건(建)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시종들은 모두 달아났다.
유일한 혈육인 어린 아들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 제왕 건(建)이 죽은 것은 슬퍼서가 아니라 굶주림 때문이다.
이제는 진나라 백성이 된 제(齊)나라 사람들은 제왕 건(建)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잠시 슬픔에 잠겼다.
누가 지었는지 산동 일대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
소나무야, 잣나무야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구나.
누가 제왕 건(建)을
공성에 살게 했는가
슬프다,
바로 빈객들이로다.
이른바 <송백지가(松栢之歌)> 다.
제나라 재상 후승(后勝)은 진나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수시로 자신의 빈객들을 함양으로 보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사(李斯)와 위요(尉繚)는 그 빈객들에게 더 많은 뇌물을 주어 오히려 진나라 첩자로 만들었다.
빈객들은 임치로 돌아와 늘 말했다.
- 진(秦)나라는 제나라를 극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보고에 후승(后勝)이 오판을 하여 결국은 제(齊)나라를 망쳤다는 것이다.
<송백지가(松栢之歌)> 에 나오는 빈객이란 바로 이 이중첩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후승의 무능함을 비난하는 노래였다.
돌아보건대, 제나라는 강태공(姜太公)에 의해 일어났다.
제환공시대에는 춘추 제일의 패공이 되었다.
그 후로 약해졌다가 제경공(齊景公) 대에 잠시 반짝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전씨(田氏)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나 그 전씨의 제(齊)나라도 결국은 7 대에 이르러 제사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중원에는 진(秦)나라만이 남았다. 마침내 천하가 하나로 된 것이다.
BC 221년(진왕 정 25년)의 일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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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909
김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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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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