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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Ⅰ. 열 처녀의 비유 25:1-13
(1) 이 비유는 대체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여 주신 비유가운데 13장과 같은 비유는 천국이 현재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지만 본문에서의 비유는 앞으로 되어질 천국의 모습과 하나님의 신비가 풀리는 때에, 결국 천국이 아버지께로 들리워 올라간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2) 이 비유에 의해 예증되고 있는 것은 결혼의 엄숙성이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절).
신부가 들러리들의 도움을 받으며 기다리고 있는 신부의 집으로 신랑이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 찾아가는 것은 때때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결혼관습이었다. 결혼식을 아주 즐겁게 축하하기 위하여 신부와 들러리들은 신랑이 오고있다는 통지를 받게 되면, 그들의 손에 등을 들고 나아가 격식을 차려 정중하게 불을 밝혀 신랑을 집으로 안내했다.
1) 이 신랑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주님이 그의 배우자인 교회에 대해 전대미문의 사랑을 베풀뿐 아니라, 신실하고 확고한 언약을 맺고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2) 처녀들은 신앙 고백자들, 즉 교인들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신부의 친구들로 묘사되어 있다.
3) 이 처녀들의 임무는 신랑을 맞이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의무인 동시에 그들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들은 신랑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가 그가 나타나면 그의 시중을 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다음과 같이 될 것을 고백한다.
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기위하여 그리스도를 시중드는 사람이 될 것을 고백한다.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이다.
②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될 것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 종교의 중심이며, 모든 경건한 생활이 지속적인 관련을 가지고 지향하는 중심이다.
4) 그들의 주요 관심은 이와같이 그들이 신랑을 맞이할 때 그 신랑에게 경의를 표하고 시중을 들기위하여 그들의 손에 등불을 들고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3) 이 열 처녀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증거가 뚜렷한 그들의 상이한 특성 :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2절). 사람들 가운데에서 동일한 신앙고백과 교파에 속한 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다른 특성들을 지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 중에는 슬기로운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참된 종교는 참된 지혜이다. 죄는 미련한 것이다. 이 특성의 증거는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물건 자체에 있었다.
①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3절).
미련한 처녀들의 어리석음은 그들이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신랑을 맞이하려고 했다는 시늉으로써, 당분간만 불을 밝힐수 있는 정도의 기름만을 준비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신랑이 늦어질 때를 대비하여 그들은 기름을 보충하기 위한 기름병이나 항아리를 전혀 준비해 두고 있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자들 곧 이러한 외식자들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식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전혀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손에 신앙고백의 등을 들고는 있지만 그러나 현재의 봉사들과 시련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둘째, 그들은 미래를 예상하지도 않고 또한 그것에 대비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시적인 겉치레를 위하여 등불을 들고있었지만 나중에도 사용할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해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미가 하는 것처럼 미래를 위해 대비하지 않으며, 또한 장래를 위하여 저장하지도 않는다(참조. 딤전 6:19).
②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4절).
그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유지시키고 보존해줄 좋은 행동원리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마음은 그릇이다.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왜냐하면 좋은 보물창고에서 좋은 것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뿌리가 썩게된다면 꽃은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그릇속에 담아야 될 기름은 은혜이다. 우리의 빛은 선한 행위들을 통해서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춰야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하나님과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확고한 원리가 없다면 이 빛은 오래갈 수도 없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그들의 그릇에 기름을 담아 준비했던 자들은 신랑이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했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최악의 경우를 위해 준비하고, 오랜 포위공격을 위해 저축해 두는 것이 좋다.
2) 신랑이 지체하는 동안 그들이 저지른 공통된 잘못 :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5절). 신랑이 지체했다. 다시말해서 그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그렇게 빨리오지 않았다. 우리는 평소 우리가 확신하여 기다리는바가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시는것 같이 보일지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으시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이 생각했던 시간은 지나치실지라도 그가 정하신 시간은 어기지 아니하신다.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에 그를 기다리던 자들이 점차 방심하게 되었고,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다 졸며 잘새(5절). 이는 마치 그들이 그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주님께서 어쩌면 급작스럽게 오실지도 모른다고 하여 준비했던 사람들도 기대했던 바와 다르게 주님께서 지체하시면 안오시려나고 생각하기 쉽다. 슬기로운 처녀들도 그들의 등불을 계속 밝히고 있었지만 계속 깨어 있지는 못했다. 너무나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고백을 오래 지켜오면서 점차 태만하게 되고, 그들의 은혜들이 활기를 띠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함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상실될지라도 첫번째 사랑은 남아있다.
3)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전달된 갑작스러운 호출 :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6절).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지체하실지라도 결국 오실 것이다. 비록 그가 더디오시는 것같이 생각될지라도 그는 틀림없이 오신다. 그의 친구들은 '이 묵시가 정한 때가 있다'는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원받는 자들의 때는 확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가 그를 거의 찾지 않는 한밤중에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은 세상이 악하게 되었을 때에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절대주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가 원하실 때 오실 것이며,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오실 때를 가르쳐 주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를 맞으러 나가야 한다. 그를 맞으러 나가라는 것은 항상 준비가 된, 실제로 채비가 된 사람들을 부르는 소명이다. 그리스도의 접근을 알리는 통지와 그를 맞으라는 부름은 눈을 뜨게할 것이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그리스도의 초림은 아무런 주지도 받지 않았고, 또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다시말해서 그는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모든 세상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4) 이 호출에 그들이 응했던 태도 :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7절).
다시말해서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까맣게 탄 심지를 잘라내고 등불에 기름을 채웠다.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신랑의 오심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를 나타낸다. 죽음을 대비하여 잘 준비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평강 가운데서 발견되고(벧후 3:14), 일하는 것이 발견되고(마 24:46),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기 위하여(고후 5:3) 실제로 준비해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탐색과 조사의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때 우리가 어떻게 발견 될런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미련한 처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헛된 자만, 그들의 상태에 선함에 대한 자부, 그리고 내세를 위한 그들의 준비를 나타낸다.
5)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모자라 당하게 될 고통(8,9절) :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나타낸다.
① 어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우매함을 볼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 현세에서의 그들의 비참한 형편을 깨닫게 된다.
② 그들은 내세와 심판에 있어서의 그들의 실제의 비참한 형편도 깨닫게 된다.
첫째, 그들의 등불이 꺼졌다. 위선자들의 등불들은 현세에서 종종 꺼진다. 그것은 그들이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이 시들해지고, 그리고 신앙고백의 신용이 상실된다. 소망들이 무너지고, 소망들의 위로가 소멸된다. 외식적인 신앙고백의 유익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때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마 7:22, 23).
둘째, 그들은 등불이 꺼졌을 때 사용하기 위한 기름을 원한다. 아주 변덕스럽고 외적인 신앙고백은 어떤 사람을 먼 곳까지도 인도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어떤 사람을 살아있는 현세동안은 안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장애물들이 그것을 꺾어버리고 말 것이다.
셋째, 그들은 그들의 빈 그릇들에 기름을 보충하기 위하여 스스럼없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신세를 지려고 했다.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8절).
현세에서 종교의 엄격함을 증오하는 자들로 사망과 심판 때에 종교의 견고한 위로들을 바랄 것이다. 의인의 생활을 사는데 관심이 없는 자들도 의인의 죽음을 죽고자 할 것이다.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는 말은 다시말해서, "우리를 좀 도와달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심판장께서 모든 사람의 참된 성격이 어떠한지를 알고 계시는 마지막 심판 때에는 증인들이 하등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성화시키며 다스리는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저 세상에선 자기들을 구원케 하는 은혜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때는 너무 늦다. 시장이 끝나면 물건을 살 수 없으며, 촛동강이가 다타서 떨어지고 나면 문이 닫힌 가게문을 아무리 두드리며 불러대도 소용이 없다.
넷째, 그들은 동료들에게 기름을 나누고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9절).
(한글개역 성경에는 'not so'에 해당하는 번역이 없음-역주). 이러한 단호한 거절의 뜻이 원문에는 없지만 성경 번역자들에 의해 보충이 되었다.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유가 없는 단정적이 거절을 하기(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보다는 오히려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고자 했다. 그들은 곤궁에 빠진 그들의 이웃들을 돕기가 아주 쉬웠다. 그러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하게 되지않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우선적으로 자기의 혈육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구원받게 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은혜를 반드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도들의 교제와 타인들의 신앙과 기도를 통해 유익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성화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변호를 해야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심판날에는 결코 자신의 변호를 위해 다른 사람을 호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나누어 줄 수 있는 은혜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수 있을만큼 충분한 것이 못된다. 가장 좋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빌려야만 한다.
그들은 어떤 이웃에게도 빌려줄 수 있는 은혜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의 태만을 나무라지 않고 그들에게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는 아주 좋은 충고를 해주고 있다. 목회자들은 평생 하나님과 자기들의 영혼에 관심을 쏟지않다가 임종을 맞게된 사람들을 만날 경우 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와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슬기로운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씁쓸한 문제를 되도록 잘 처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목사들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행해야 할런지를 말해주는 도리밖에 없다. 만일 시간이 늦지 않았다면,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하는 것도 현재는 좋은 충고가 될 것이다.
6) 신랑의 도래와 이 모든 일의 결과.
①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10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자신들의 중요한 일을 죽을 때 까지 미루는 사람들은 정작 죽을 때가 될 경우 그 일을 할 만한 시간을 요하는 일이지 서둘러 급작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영혼이 병상에서 몹시 혼란된 가운데 회개와 기도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영혼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마쳐야 되는지를 거의 알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름을 태워야 할 때 기름을 살려고 하고, 또 우리가 은혜를 사용해야 할 때 은혜를 구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신랑이 왔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 이 중요한 심판의 날에 그의 백성들에게 오실 것이다. 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화려한 의장을 갖추고 오실 것이다.
②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10절). 영혼히 영화되는 것은 주님의 직접적인 임재속에서 그와 더불어 아주 밀접한 친교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현세에서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한 자들만이 내세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③ 문이 닫힌지라(10절).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동료가 왔을때 문이 닫혀있었다. 문이 닫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은 낙원 안에 있었지만 낙원의 문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낙원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된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낙원에 들어가게 될때 다시 나올 수 없도록 갇히게 될 것이다.
둘째, 문밖에 있는 자들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그 문은 좁긴해도 여전히 열려있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그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려 잠기게 될 것이며, '큰 구렁이 끼어' 건너갈 수 없도록 가로막게 될 것이다(참조. 눅 16:26).
④ 미련한 처녀들은 너무 늦게 왔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너무나도 늦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허락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마치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한 망령된 에서처럼 말이다. 위선자들은 헛된 신뢰로 말미암아 행복을 기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늘나라의 문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할 경우 그들은 내쫓김을 당하고 말 것이다.
⑤ 그들은 에서가 그랬던 것처럼 거절을 당했다.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12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우리는 모두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려고 생각해야 된다(사 55:6).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요청할 때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약속에 의해 그것이 잘 이루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가 너무 늦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이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실제적인 교훈(또는 결론)이 있다(13절). 그런즉 깨어있으라. 우리는 이 권고를 앞서 고찰했었고(마 24:42),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것이 가장 절급한 경고로써 반복되고 있다. 우리의 중요한 의무는 깨어있는 것이다. 깨어 방심하지 말라. 우리 주님께서 재림할 시간이 아주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Ⅱ. 달란트 비유 25:14-30
우리는 여기에서 세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들의 비유를 대하게 된다. 마치 열 처녀의 비유가 우리의 기다리는 상태를 암시해 주는 것처럼, 이 비유는 일과 사명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습관적인 준비의 필요성을 나타냈던 반면에 이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현재의 일과 봉사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근면성의 필요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고 종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비유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이 종들에게 맡겨진 책임(14,15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그들의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14절). 다시말해서 그들에게 일을 지정한 뒤에(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종들을 결코 나태하게 지내도록 허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일이든 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실행하게 내버려 두었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해 소유하고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 이외에는 어떤 것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은 그를 위하여 사역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용코자 한 것이 무엇이든 여전히 그것의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
(1) 어떤 경우에 이 책임이 이 종들에게 맡겨졌는가. 주인이 타국으로 여행중이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참조. 엡 4:8).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에 가셨을때 그는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과 같으셨다. 가실 때 그는 그의 부재기간 동안에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그의 교회에 세밀히 마련해 주셨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승천 했을 때 그의 교회에 그의 재산을 맡기셨다.
(2) 어떤 비율로 이 책임이 맡겨졌는가. 그는 달란트들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풍부하고 귀하며 또한 측량할 수없이 귀한 피로 구입한 것들이므로 그중 어느 것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좀더 많이 주셨고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 덜 주셨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셨다. 신의 섭리가 사람들의 능력에 차이를 만드실 때 은혜가 적절히 영적인 은사들을 분배하지만 여전히 그 능력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달란트는 가졌으며, 그리고 그것은 첫 발을 내디디는 가난한 종에게는 결코 얕잡아 볼만큼의 자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은 우리들 각 사람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이며, 그리고 그것은 일을 통해 우리에게 발견될 것이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무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사람은 공동의 선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유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똑같은 능력과 기회들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의 지체들처럼 모두가 제각기 자기에게 적합한 임무를 갖고 있는 것이다.
2. 이 책임의 상이한 운영과 활용(16-18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 종들 가운데 두 종은 잘 활용했다.
1) 그들은 근면하고 신실했다. 그들은 가서 장사를 했다(16절). 그들의 주인이 떠나자마자 그들은 즉시 그들의 사업에 열심히 종사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기 해야 될 일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그 일을 즉시 착수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바로 가서 장사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장사꾼이다. 장사꾼이란 자신이 거래하는 것을 직접 선택하고, 수고를 통하여 그것을 습득하며, 또 그일에 계속 종사하여 그것을 자신의 사업으로 삼고, 모든 다른 용무들을 그 사업에 집중시키며, 그 일에서 얻어진 이익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본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의 자본을 맡은 관리인들로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재능들(은사들)-세상의 즐거움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만 한다. 복음의 규례들과 그 규례들을 실행하는 우리의 기회들은 반드시 그것들이 제정되었던 목적을 위하여 활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유지되는 하나님과의 교제 및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실행되어야 한다.
2) 그들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본을 두 배로 만들었다(17절). 근면한 사람의 손은 은혜와 위로와 선행의 그릇을 부유하게 만든다. 종교에도 근면을 통해 이루어질 일이 아주 많이 있다. 보상은 취득한 것에 비례한다. 사람이 보다 큰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큰 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가 두 달란트만을 준 사람들에게서 그는 두 달란트의 활용만을 기대하신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재능과 기회를 최대한 살려서 선을 행하는데 전념한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만큼 선을 행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2) 세 번째 종은 잘못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18절).
한 달란트만을 받은 사람은 불성실한 종이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고 그것들을 모두 땅에 묻어버리고 지내는 사람들이 확실히 많이 있다. 다시말해서 많은 재능들과 많은 장점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한 달란트만을 받은 자가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것 때문에 이와같이 죄인으로 여겨진다면 그보다 더 많이 받았으면서도 그것들을 땅에 묻어버린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될 일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해야 될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그것을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하겠다고 말한 것을 실행에 옮길만한 자본이 없다고 변명하는데 그들은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실행하려 하지않고 또 그냥 앉아서 아무런 일도 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달란트만을 관리하도록 맡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한 달란트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나태를 더 심화시키는 것이다.
2) 그는 땅을 파고 한 달란트를 묻었다. 그것은 행여나 한 달란트를 도적맞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돈이란 거름과 같아서 (베이컨 경이 늘 말하곤 했던 것처럼) 쌓아올린 퇴적 더미 속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고 퍼뜨려져야만 효력을 발생한다. 그것은 영적인 은사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은사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은사들을 받게 된 목적을 위하여 그것들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의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만일 그 돈이 그 자신의 것이었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용했을런지도 모른다. 그의 동료 종들은 바쁘게 장사를 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은 분명히 그의 열정을 자극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을때 우리는 게으름을 피우며 지낼 것인가?
3. 이 달란트 활용에 대한 계산(19-30)
이 계산이 늦추어지고 있다. 오랜후에 주인이 그의 종들과 계산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회계의 날이 왔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19절).
우리 모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들을 위해 행한 선과 타인들을 위해 행한 선을 반드시 회계 받게 될 것이다.
(1) 신실한 종들의 훌륭한 회계 보고 : 신실한 종들이 다음과 같이 회계 보고를 드리고 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0절)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2절).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한다.
"주여 당신께서 내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베풀어 주셨나이다." 우리가 받은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며 유익을 얻을때마다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재산을 우리에게 맡기심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에 대해 전체적인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그의 재산을 늘렸다고 생각해선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활용해 주신 것으로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신실한 종들은 그들의 신실성을 나타내는 증거로써 그들이 이익으로 얻는 것을 제출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들은 그들의 근면성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네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선한 자는 그것을 나타내 보이라(참조. 약 3:13). 그리고 단지 두 달란트만을 가졌던 자도 다섯 달란트를 가졌던 자처럼 즐겁게 그의 회계 보고를 드렸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회계의 날에 우리의 위로가 우리의 성공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과 우리의 진지함에 따라서 있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의 기회들의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들의 정직성에 따라서 위로를 받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회계 보고에 대한 주인의 열납과 인정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21,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1) 그는 그들을 칭찬하셨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그가 머지않아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올바른 성격들, 곧 착하고 충성된 성격들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들이 열납될 것이다. '잘하였도다'라고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종들을 그리고 오직 이러한 종들만 일을 잘한 착한 종들로 부르실 것이다. 만일 우리도 선을 이룬다면 동일한 칭찬을 받게될 것이다. 어떤 주인들은 몹시 까다로운 나머지 그들의 종들을 결코 칭찬하는 법이 없다. 이는 곧 꾸지람을 듣지않은 것만으로는 만족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종들을 잘했다고 반드시 칭찬하신다. 그들이 받은 칭찬이 사람들의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만일 그가 잘했도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행복한 것이다.
2) 그는 그의 종들에게 보상해 주신다. 그들의 모든 사랑의 행위와 수고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보상이 여기에서 두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며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낮은 직위들에서 충성한 사람들을 더 높은 직위들로 승진시키는 것은 군주들의 궁전과 고관들의 가계에서 통용되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멋있게 일을 수행한 그의 종들을 승진시키는 주인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한 자들을 위하여 영광을 준비해두는 분이시다. 이 땅에서는 그들이 걸인들일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들이 통치자들이 될 것이다.
① 행위와 보상간의 불균형을 유의하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일이 몇 안되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될 일들은 많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임무와 우리가 이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실행한 일은 우리들 앞에 놓여있는 즐거움에 비한다면 아주 적은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② 이 보상은 이 비유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축복받은 사람들의 상태는 즐거움을 누리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이상과 성취, 거룩의 완성및 축복받은 자들의 교제 등이 있는 곳에는 충만한 즐거움만이 넘치게 된다. 이 즐거움은 그들의 주인이 누리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 즐거움은 그가 직접 그들을 위하여 값주고 사신 즐거움이다. 즉 이 즐거움은 구세주의 슬픔으로 값주고 산 구원받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충성된 신실한 청지기들에게 그와 함께 공동의 상속자들이 되어 그 자신의 즐거움에 참예하도록 허락하신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준비했던 자들이 결혼잔치에 들어갔던 것처럼, 이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즐거움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머지않아 그들은 그 즐거움에 참예하게 될 것이며, 영원속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2) 게으른 종의 잘못된 회계 보고
1) 그 게으른 종의 변명(24, 25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비록 그가 한 달란트만을 받았을지라도 그는 그 한 달란트에 대해 의당 보고를 해야 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회계 보고를 요청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모든 회계 보고를 해야만 한다.
① 게으른 종이 밝히고 있는 보고는 다음과 같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설령 내가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당신의 돈을 더 불리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그것을 더 적게는 만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변명을 할 경우 그 주인에게 칭찬은 받지 못해도 안전은 보장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너무 많이 일하기를 두려워하는 게으른 신앙을 한 사람들처럼 대우받게 되기를 바란다. 이 게으른 종은 이 회계 보고가 아주 만족스럽게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계산으로 하늘나라에 대해 큰 소망을 걸고 있다. 마치 더이상 요구되는 것도 없고 또한 더이상 기대될 수 있는 것이 없기라도 한 양 말이다.
② 게으른 종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달란트를 묻어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그는 마치 큰 잘못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아니 그는 그 달란트를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여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은 자신의 신중함에 대하여 당연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기라도 한 양 말하고 있다.
③ 그가 말하고 있는 변명은 무엇인가.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24절).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알았으므로 나는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들은 사랑을 일으키며 그 사랑은 우리를 근면하고 신실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적의를 품으면 그것이 두려움을 일으키고, 그 두려움은 우리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 그의 변명 속에는 원수가 품고 있는 감정이 나타나 있다. 나는 당신이 굳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그의 방어는 그의 공격이 되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는 당신이 그러한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주인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가 무정한 주인이기는커녕 땅을 그의 선하심으로 가득히 채우시는 분이며, 또한 심지 않은데서 거두기보다는 그 반대로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는 곳에 아주 많이 뿌리는 분으로 알고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악한 자들과 감사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해를 비추게 하시고 비를 내리게 하시며, "전능하신 자여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양식과 즐거움으로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게으른 종의 제안은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비방할 때 흔히 쓰는 말들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지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죄와 파멸에 대한 모든 비난은 그가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멸망한다 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 그의 변명은 노예정신을 나타낸다. "나는 두려워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나쁜 감정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관념들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생각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에게 봉사를 하지못하도록 만들뿐 아니라 봉사를 하더라도 방해를 받게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으며 그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적인 행동을 전혀 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2) 이 변명에 대한 그의 주인의 대답 : 게으른 종은 그일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① 그의 정죄(26,27절) :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는 두 가지 사실들에 대해 정죄를 당하게 된다.
㉠ 게으름 :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게으른 종들은 악한 종들이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무관심한 자는 마귀의 일에 분주한 자와 아주 유사하다. 태만은 죄이며, 그리고 반드시 심판을 받게되어 있다. 게으름은 악을 범하게 만든다. 집이 비게되면 부정한 악령들이 차지하게 된다. 사람들이 잠잘때 원수가 가라지들을 뿌린다.
㉡ 자가 당착(26~27절) :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겨두었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내가 그렇게 굳은 주인인 줄로 생각했다면 너는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더욱 근면하고 조심 해야 되지 않았느냐? 설령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해도 말이다."
둘째, "만일 네가 나를 굳은 주인으로 생각했으므로 그 돈을 잃을까 두려워 감히 그 돈을 은행에 맡길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나는 내 돈의 이자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주 어렵고 위험한 일들에 우리가 보다 안전하고, 쉬운 일들을 회피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는가?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일을 하지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만일 우리가 용기를 발휘해야 할 일속에서 용기를 보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의를 입증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둔다고 한다면 그 돈이 네게는 무가치한 돈이로구나.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곧 그 달란트는 너희가 간수할뿐 아니라 활용하도록 맡겨진 나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② 그가 받은 정죄 : 게으른 종은 다음과 같은 선고를 받는다.
㉠ 그의 달란트를 빼앗기는 선고(28,29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의미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적용될 수 있다.
첫째, 현세의 축복, 즉 세속적인 부와 소유 : 우리가 이것들을 떠맡게 된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없는 자는 즉 이것들을 소유하긴 했어도 활용하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는 빼앗기리라.
둘째, 은총의 수단 : 자신들이 얻은 기회들을 향상시키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증대시켜 주실 것이다.
셋째,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 : 이 은사들을 가지고 선행을 하는 자는 풍성하게 될 것이다. 이 은사들은 실행에 의해 향상되며, 또 활용됨으로써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가 더욱 많은 은사를 쓰면쓸수록 우리는 신앙적인 일을 더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속에 있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은사들을 녹슬게 만들고, 부패하게 만들며, 방치된 불처럼 소멸시키고 말 것이다.
㉡ 바깥 어두운데로 내쫓기는 선고(30절)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첫째, 그는 무익한 종의 특성을 갖고있다. 게으른 종들은 무익한 종들로 여김을 받게될 것이다. 게으른 종은 신체 중 쇠약해진 부분과 같으므로 아무쓸모도 없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들 모두가 무익한 종들이다(눅 17:10). 다시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롭게 해드릴 수가 없다. 해치지않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해도 그는 영광을 받게 된다(요 15:8).
둘째, 그는 바깥 어두운데로 내쫓기는 운명에 놓일 것이다. 그들의 형편은 다음과 같이 된다. 먼저 아주 음침하게 된다. 그것은 바깥 어두운 곳이다. 어두움 속에서는 어떤 사람도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이 형벌은 게으른 종에게 아주 적절한 형편이다. 그것은 '바깥' 어두움으로써, 신실한 성도들에게만 허용되는 천국의 빛을 대하지 못하며 또 주님의 기쁨을 대하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잔치에 참예하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다음엔 아주 쓸쓸하게 된다.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된다. 이것이 게으른 종의 운명이 될 것이다.
Ⅲ. 양과 염소의 비유 25:31-46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심판 과정이 이곳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를테면 이 비유는 앞의 비유들에 대한 설명이다.
1. 심판의 보좌에 앉은 심판자의 자리(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①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시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② 마지막 심판 때에는 인자가 심판을 주관하게 된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마지막 심판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를 '인자'로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아들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자신도 동일한 속성을 지니셨으므로 그는 아주 나무랄데 없는 심판자이시다).
③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실 때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그는 참된 영광을 누리며 심판의 보좌로 나올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현재 믿고있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밝히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어두운 구름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밝은 구름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④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의 영광 가운데 강림하실 때 그는 그의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분에게는 영광스러운 수행원, 곧 그의 거룩한 무리들이 따르게 될 것이다.
⑤ 그때 그는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실 것이다. 그는 지금 성부와 함께 그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영광의 보좌, 즉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가 육체로 계실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법정에서 죄수로 심문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의 재림 때에는 그가 재판석에 앉아 재판을 하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 앞에 인간들의 자녀들이 나타남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32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마지막 심판날에 있을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 나오게 될 것이다. 땅위에 사는 모든 국가와 모든 민족이 다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3. 그 때 이루어지게 될 구별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3절).
그가 모든 민족을 각각 분별하실 것이다. 이는 마치 가라지와 알곡이 추수때 구별되고, 좋은 생선과 나쁜 생선이 해변에서 구별되며, 알곡과 겨가 마루에서 구별되는 것과 같다. 악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이 지상에서는 함께 살고 서로가 확실하게 구별이 되지않더라도 마지막 심판 날에 그들은 구별되어, 영원히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서로를 식별할 수 없으며(고전 5:10). 또 어떤 사람이라도 그들을 구별할 수 없다(마 13:29).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백성들을 아신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구별하실 수 있다. 이것은 여기서 목자와 양과 염소를 나누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장이시다. 그는 지금 목자처럼 그의 무리를 먹이고 있지만 멀지않아 그의 것과 그의 것이 아닌 것들을 구별하실 것이다.
② 경건한 사람들은 결백하고, 온유하고, 인내하며 유용한 양들과 같다. 그러나 악인들은 양보다 맛도 좋지않고 다루기도 어려운 염소들과 같다. 양들과 염소들이 이땅에서는 낮동안에 동일한 목초지(초장)에서 풀을 뜯지만 밤에는 서로 다른 우리속에 넣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구별할 때 그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이다(33절).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주신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우리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과 같다. 그때 구별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성도들과 죄인들, 성화 된 자들과 성화 되지 않은 자들로 나누는 큰 구분은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이다.
4. 이들 각자에 대한 심판의 진행(34-46)
(1) 오른편에 선 경건한 사람들에 관한 심판.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목하라.
1) 경건한 사람들에게 수여된 영광.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절).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목자이셨던 그가 여기에서는 임금이시다. 이 임금이라는 말이 있는 곳에는 권능이 있다. 이 판결에서는 두 가지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다.
① 성도들이 주님의 축복을 받게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 :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그는 그들을 복받을 자들로 선포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들이 복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복받게 해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의 아버지의 복받을 자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비난을 받고 저주를 받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천국의 것으로 받는 우리의 모든 축복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신 것이다(엡 1:3). 그가 그들을 나아오라고 명하신다. 이 나아오라는 부르심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나의 아버지의 축복들을 마음껏 받으라. 아주 마음껏 받으라. 그리고 내게로 나아오라. 나아와서 나와 더불어 영원토록 있도록 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던 자들아. 이제는 면류관을 쓰고 나를 따라오라." 우리가 지금은 담대히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지만 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영광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게될 것이다.
② 아버지의 축복과 나라를 성도들이 허락받게 됨.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절)
㉠ 그들이 소유하게 될 행복은 아주 풍성하다.
첫째, 그것은 '나라'이다. 그 나라는 지상에서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생각되며,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지니고 있다. 이땅에서는 거렁뱅이들이고, 죄인들이고, 모든것 가운데 가장 더러운 쓰레기로 간주되는 그들이 그때는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다.
둘째, 그것은 '예비된 나라'이다. 이 축복은 반드시 아주 큰 것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낸다. 먼저 이 사실은 이 축복이 그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다음으로 이 사실은 그 축복에 대한 그들의 소유와 권리를 나타낸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기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다시말해서 이 축복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해서 예비된 것이다.
넷째, 그것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예비된 것이다. 이 축복은 성도들을 위하여 계획되었고, 그와 동시에 성도들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즉 영원 전부터 그 축복을 받도록 예정되었다(엡 1:4).
㉡ 그들이 축복을 누리게 하는 소유권은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와서 그 소유권을 상속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을 정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양자된 덕택으로 상속을 받게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이다'(참조. 롬 8:17). 상속자란 명칭은 가장 듣기좋고 확실한 명칭이다. 이세상에서 성도들은 그 아버지의 정한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있는 아직 성인이 되지않은 상속자들과 같다(갈 4:1,2). 그러나 성인이 되면 그들은 은혜를 통하여 상속자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나아오라, 그리고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 이 축복의 근거(35,36절)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35절).
우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선행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을만한지를 추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과 동일한 규칙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므로 그 법칙에 순종했던 사람들에겐 분명 보상을 해주실 것이다. 이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한 성도들에게 수여될 것이다. 성도들로 하여금 상속자가 되게한 것은 그리스도가 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약속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에 순종하는 자만이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행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의 행위들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랑을 통해 역사되는 믿음이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네 행위들로 네 믿음을 내게 나타내 보이라. 여기에서 서술되고 있는 선행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① 자기 부정과 세상에 대한 경시 : 이는 세상적인 것들을 통하여 선을 행할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선을 행할 재력이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가난한 생활을 만족스러워하고 즐거워함으로써 이와 동일한 성향을 나타내야만 한다.
② 형제들에 대한 사랑 : 이것은 두 번째 중요한 계명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교제를 나눌수 있도록 준비를 함으로써 이 사랑을 증거해야 만 한다. 선한 바램들은 선행이 없을 경우 단지 비웃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라도 선을 행하도록 해야한다.
③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인 관심 : 여기에서 보상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선행들은 그때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골 3:7).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 하늘나라의 진미들로 대접을 받게 될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 본향을 둔 자들이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는 것도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옷입은 자들이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의복조차 부족하다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못된다. 건강한 영혼들을 소유한 자들이 병든 몸들을 가지고 있고, 감옥안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롭게 해방시킨 자들이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능력에 따라 자선을 베푸는 것은 구원에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앙고백적인 순종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자비를 전혀 베풀지 않는 자들은 냉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의인들은 이러한 자선 행위를 겸손히 부정하고 있는데 재판장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해 나가고 있다.
㉠ 의인들이 그 이유를 묻고있다(37-39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그들이 나라를 상속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또는 그들의 선행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선행위를 아주 존중하시며, 또 그를 위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행해진 자비를 특별히 좋아하신다. 이 의인들의 질문들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겸손하게 찬미하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들이 했던 아주 보잘것 없고 무가치한 봉사들이 크게 칭찬을 받고 매우 풍성한 보상을 받게된 것에 대해 찬미한 것이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37절).
은혜스러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선행들을 초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특별히 장차 계시될 영광과 비교해서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그들이 그곳으로 오게 된 것과 또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봉사들을 그토록 존중해 주시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어느 때에 우리가 주의 주리는 것을 보았나이까." 이것은 다음의 뜻으로 한 말이다. "우리는 곤궁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가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보았나이까?" 그리스도께서는 생각보다는 더많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 재판장이 직접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절).
성도들의 선행들은 그것들이 대 심판날에 제시될 때,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첫째, 그 선행들은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행들은 냉수 한그릇이라도 결코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그 선행들은 그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연약한 것들을 가장 좋게 만드시는 것처럼 그는 그들의 봉사들을 가장 유리하게 만드신다. 그런데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선을 행할 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사람들은 내쫓김을 당해야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 가장 적은 자라도 그들을 그의 형제들로 인정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형제들로 부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도 않으실 것이며, 또한 그것이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도 그의 가난한 형제들을 부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의 가난한 형제들에게 행한 친절을 그 자신에게 행한 친절로 생각하실 것이다. 내게 한 것이니라. 이 말씀이 나타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던 부자들뿐만 아니라 구제를 받았던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존중하는 것이다.
(2) 왼편에 선 악인들에 관한 심판(41-46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대하게 된다.
1) 악인들에게 내려진 선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절).
① 그리스도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은 비록 그의 찌푸린 얼굴을 대할지라도 상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떠나라. 이 세상에선 그들이 종종 생명과 안식을 얻도록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는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귀를 막아 버렸다. 이땅에서는 그들이 전능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판 때에는 그가 그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②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야만 한다면, 그들이 친절하고 온정적인 말 한마디라도 듣고 떠날 수 없을까? 그런 일은 전혀 있을수 없다. 떠나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않고 축복을 상속받을려고 하는 자들은 저주의 멍에를 걸머지고 주님을 떠나야만 한다. 의인들은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축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그의 축복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단순히 '저주를 받은 자'들로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저주는 그들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③ 만일 그들이 떠나야 한다면 그들은 어떤 편안하고 쉴만한 장소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들이 축복을 상실함으로써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충분한 실행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불'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이다.
④ 만일 그들이 예비된 불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면 그 불을 잠간 동안만 타게하든가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그 불을 통과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수 없다. 왜냐하면 자비와 은총이 영원토록 배제되어 그곳에는 그 불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⑤ 만일 그들이 그처럼 끝없는 불행에 빠져야한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좋은 동료들을 사귈 수 없을까? 아니 절대 그럴수 없다.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사귈 수 없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마귀를 섬겼으므로 마귀가 있는 곳에 있도록 선고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를 섬겼던 사람들이 그가 계신 곳에서 그와 함께있도록 선고를 받는 것과 같다. 이 선고가 내려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 선고를 내리게 된 그들의 책임은 바로 태만이었다. 이것은 앞의 비유에서 게으른 종이 그의 달란트를 낭비해서가 아니라 단지 땅에 묻어두었기 때문에 정죄를 당했던 것과 같다.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너는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네가 나를 구제할 수 있었던만큼 너는 나를 돕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멸을 당하게 되는 것은 바로 태만 때문이다.
㉡ 그들이 이 선고를 받게된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을 소홀히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선고를 받게된 것은 심판, 자비, 믿음과 같은 율법의 중요 문제들을 소홀히 한 것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저주받을 죄를 범하는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죄인들은 그들이 행할 수 있었던 선을 소홀히 여긴것 때문에 대 심판날에 정죄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선고를 받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죄인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44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저주받은 죄인들은 그들이 증거할 변명이 전혀 없을지라도, 헛되이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벗으신 것을 보았나이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를 스스로 알고 있는만큼 그 죄를 완전하게 고발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변명은 그들이 전에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때가 너무 늦어버린 지금까지도 알려고하지 않는 것에 대해 소홀히 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들이 멸시한 사람들이 단지 가난하고, 허약하고, 어리석고, 경멸스러운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한 사람들은 그 행동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둘째, 이 선고를 내린 이유가 재판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그는 다음의 규칙에 의거하여 근거를 제시하고 계신다(45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반대하여 행한 것, 심지어 그들가운데 가장 작은 자를 반대한 행동조차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거스려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 따라서 그들이 고난을 받으면 그도 고난을 받게된다. 주님의 백성들을 건드리는 자는 바로 그의 눈동자의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나 진배없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이들 두 선고들이 모두 집행되고 있다(46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①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가리라. 그때가 되면 심판이 신속하게 집행될 것이다. 이세상에서 은혜의 날이 낭비되고 있을때 죄인들이 그들 자신의 본성을 바꾸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②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다시말해서 그들은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34절). 하늘나라는 생명이며, 축복의 전부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곳에는 생명 그 자체를 한정하는 죽음이 없으며 또한 생명의 즐거움을 한정하는 노년도 없으며, 또한 생명을 한층 더 비참하게 만드는 어떤 슬픔도 없다. 우리가 자신의 길을 선택할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목적을 정할수 있도록 우리앞에 생명과 사망, 선과 악, 그리고 축복과 저주 등이 제시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