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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류산행기(巨流山行記)
전호준
가쁜 숨을 심호흡으로 가다듬으며 산 아래를 굽어본다.
한반도 지형을 빼닮았다는 당동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점이 움직이듯 크고 작은 배들이 미끄러지듯 흰 줄을 그으며 오간다. 해안선을 따라 성냥갑 같은 집들이 늘어선 뒤쪽 산 위로 다랑논들이 지도위 등고선같이 이채롭다.
겨우내 녹슨 몸과 마음을 씻어보고자 나선 산행길이다. 추위를 빙자해 습관화된 늦잠이 걱정된다. 휴대전화 알람을 오전 6시에 맞추어 머리맡에 놓고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일까? 선뜻 잠이 오질 않는다.
평소 산을 좋아하지만, 공식적인 산악회에 들러리 등산을 해보기는 이번 산행이 지난달 거제도 노자산에 이어 두 번째다.
퇴직 후 소일거리로 시작한 농장일로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와중에 짬을 내어 아내와 같이 이 산천 저 골짜기로 세월없이 노닐며 봄이면 산나물의 향기에 취하고 여름이면 우거진 녹음에 더위를 식히며 싸리버섯이며 송이를 찾아다녔다. 가을 열매 사냥이 끝나면 겨울잠에 들어간 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농사를 접고 대구로 나온 후 무릎이 별로 좋지 않아 겨우 수성 못이 내려다보이는 법이 산 봉수대를 간혹 찾은 것이 나의 산행이력서의 전부다.
처음 상록수필 문우로부터 건우한마음 산악회 산행에 함께하자는 전화를 받고 망설임보다 걱정이 앞섰다. 공식적인 산악회에 들어 그들과 함께 산을 오를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내가 잘 알기에 긍정도 부정도 힘이 든다.
연장자인 문우의 고마운 배려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고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일단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사실 무릎도 무릎이지만 고혈압에 부정맥 소견이 있는 나로선 추운 겨울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산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임을 알기에 선뜻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내의 걱정 어린 잔소리 보다, 내 몸은 내가 아는 터 건강을 위한 산행이 오히려 건강에 위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망설일 수밖에 없다. 평소 건강을 자신하며 화려한 산행경력을 자랑하던 친구가 무릎 수술 후 절뚝거리며 무리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번 산행은 경남 고성 거류산으로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출생지이며 기념관이 있는 그곳에서 시산제를 올린다는 내용에 호기심이 갔다. 시산제란 말은 들어는 본 듯한데 보거나 참여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전 9시가 가까워 대구 도심을 벗어나 한동안 달리니 현풍휴게소다. 휴게소 한 모퉁이에 서서 먹는 노천식당 따끈한 우거지 국밥 맛이 일품이다.
쭉 뻗은 길 위로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바둑판같이 잘 정리된 들판이며 언뜻언뜻 스치는 공장건물과 형형색색 펼쳐진 그림 같은 집들을 바라보며 선진국 대열에 한발 들어선 조국이 자랑스럽고 아름다워 자연 기분이 들뜬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엄홍길 대장의 기념관 앞 주차장이다.
준비해온 제물들을 차리는 손들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세련되고 가볍다. 세종대왕이며 사임당 신 씨를 한가득 입에 물고 헤벌레 웃고 있는 돼지머리를 보니 돼지도 사람처럼 돈을 좋아 하나 보다. 돼지를 한자로 돈(豚)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해본다.
돼지머리를 중심으로 떡과 4 실과가 차려지고 산악회장님의 초헌을 시작으로 축문 읽는 소리가 구성지다. 아헌 종헌을 거쳐 한해의 산행에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자유헌작이 이어졌다. 호기심을 갖고 유심히 보았지만, 여느 산신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즐거운 음복 시간, 한마음 한뜻으로 건강과 무사안일을 기원하며 나누어 보는 정은 막걸리 맛만큼 시원하고 컬컬하다.
오후 3시 30분까지 하산하라는 산대장의 전언을 듣고 등산길에 올랐다. 여느 때처럼 무리하지 말라는 아내의 당부도 당부지만 조금 오르다가 힘겨우면 되돌아 내려올 요량으로 대열에 끼어 따라나셨다. 정상까지는 571m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고성의 명산으로 알려진 거류산은 일명 한국의 마터호른(Materhom)이라 불린다 한다. 알프스의 깎아지른 뜻이란 마터호른은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서 있는 해발 4,478m 설산이다. 명성 그대로 가파른 산길이 일자형으로 이어진다. 중간중간 경사가 심한 곳에 인공계단이 놓여 있지만, 계단 또한 급경사로 사다리를 오르는 기분이다.
가볍게 출발은 같이했지만, 어느새 잔류 그룹에 뒤처진 자신을 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으로 숨을 고르며 위를 쳐다보니 아득하다. 선두 그룹은 이미 시야에서 벗어났고 나를 배려해 속도를 조절한 중위 그룹의 수필 반 문우 멤버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올라오라며 손짓을 한다.
그들과의 거리도 까마득하다. 그만 내려가겠다고 손사래를 쳐보지만 올라오라며 기다린다. 숨도 가쁘고 몸은 천근인데 어느 세월에 따라가나 쳐다볼수록 자신이 없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아야지,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쳐다보지 말자 앞만 보고 걷자 고개를 떨구고 발끝만 보며 한발 한 발 내딛다 보니, 어느새 동료들이 기다리는 발밑에 도착했다. 욕심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거북이의 근성과 끈기로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지지(知止) 불태(不殆)란 경구를 떠올린다. 모든 일에 나아 갈 때와 그칠 때를 알면 위험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산행에 적용할 경구는 아닐지라도 모든 삶과 생활에 분수를 알고 절제하는 마음으로 과욕을 경계하는 말이리라.
연료 보충을 위해 자연이 내준 낙엽방석에 아무렇게나 퍼질고 앉았다. 바위 상에 차린 도시락은 그 자체가 선식(仙食)이 되고 마셔보는 물 한 모금과 신선한 공기는 불로장생의 보약이다.
등 뒤로 펼쳐진 고성평야는 바다와 맞닿아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고 눈을 들면 들어오는 당항만의 탁 트인 절경에 속이 다 후련하다. 온갖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정상을 고집하는 산악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약속 시각을 맞추느라 정상 79m를 남겨두고 492m 하산 지점에서 산을 내려왔다. 그만그만하던 마음에 반갑기도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또 무슨 연유일까? 산악인들의 정상도전의 묘미란 이런 것일까? 정상을 향한 인간들의 도전과 욕망은 선천적 본능이라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엄홍길 전시관에 들렀다. 5,000여 평의 부지에 200여 평의 건평, 아담하고 깨끗한 전시관이다. 엄홍길 대장의 성장 과정과 발자취를 시작으로 등반에 사용했던 도구들과 소품들이 일목요연하게 설명과 더불어 잘 정리되어있다. 평소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에 대한 명성은 나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출생이 경남 고성이라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다.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세계최초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이라는 위대한 업적 앞에 말문이 막힌다. 특히 엄 대장이 등반한 대형 히말라야 영상물을 보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 엄홍길 대장의 위대함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다.
겨우 500m도 못 미치는 평지 같은 산길을 걸으면서 힘에 겨워 중도 포기를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나 나약하고 서글퍼진다. 하기야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정복자이고 나는 생명 연장과 건강을 위한 힐링(Healing)이니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위대한 한국인 엄홍길 대장의 업적과 도전 정신에 경의와 박수를 보내며 전시관을 나왔다. 차창 밖으로 멀어져 가는 거류산을 바라본다. 산은 언제나 아버지 가슴같이 듬직하면서도 어머님 품속 같은 편안함을 준다. 기회가 주어지면 정복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분에 맞는 산행을 가끔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7. 2. 14 거류산을 다녀와..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3.16 04:31
첫댓글 산행의 과정이 그림처럼 그려지고 마음의 흐름이 따뜻하게 전해져 옵니다.
이제 좋은 산사람 한 분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문우로서 산우로서 인생길 함께 희로애락을 즐겨봅시다.이제 산악인이 다되었습니다.축하드리며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 산악회장으로 부터 거류산에 간다는 엽서가 왔는데 선생님께서 거류산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을 해주셔서 사전 준비를 미리 한 기분입니다. 저도 관절이 안좋아서 많이 못 걷는데 정상까지 571m가 눈에 들어옵니다. 모두가 고만한 나이라 산 중턱에서 되돌아 오는데 맘에 준비를 단단히 하면 도전 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계산해 봅니다.
저도 옛날에는 산을 즐겨 찾았는데 지금은 건강이 별로 좋지않았어 산을 찾는 것이 뜸해지고 있습니다. 항상 마음 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거류산 엄홍길대장의 기운을 받으시고 시산제까지 올렸으니 이제는 산악인으로 입문하신 셈입니다.
지난 산행을 생생히 떠올리며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거류산에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지만 감기 때문에 거절 했었는데 거류산 산행 모습이 적라나 하게 그려져서 간접 경험을 하는 듯 합니다. 엄홍길 산악인의 발자취를 보았으니 그것으로도 큰 성과인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산행의 마음, 풍광 등을 스크린 보듯 잘 묘사 했네요, 글쓰기 초보인 저에게는 잘 정리된 글 부러울 따름입니다. 산행과 함께 건강도 회복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