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61)> ‘한국미술 100년’ 하반기 개강
어제(9월 12일, 화요일)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방문한 국립중앙박물관 후원 연못 주변에는 백일홍(百日紅, 배롱나무)이 피었다가 지고 있었다. 낮 최고기온은 30도였다. 24절기(節氣)에서 가을 절기(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중에서 立秋(8월 8일), 處暑(8월 23일), 白露(9월 8일)는 지났고, 앞으로 秋分(9월 23일), 寒露(10월 8일), 霜降(10월 24일)이 다가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소강당에서 열리는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하반기 강의가 어제 시작되었다. 올해 11월 28일까지 6강좌(12시간)가 계속된다. 어제 강의(제10강)는 정하윤 박사(이화여대)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1980년대, 민중 미술가들: 오윤, 신학청, 이종구>을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다음 강좌(9월 26일) 주제는 ‘1980-90년대 여성주의 미술가들’이다.
민중미술(民衆美術)이란 1980년대를 기점으로 등장한 미술 흐름의 한 장르(genre, 그룹)이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 진압과 그 반작용으로 제5공화국에 대한 저항이 사회운동으로 확산되던 무렵에 등장한 미술 흐름의 한 형태이다. 즉 민주화 운동과 함께 태동한 사회 변혁과 비판을 위한 미술 운동을 말하며, 민중미술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주제를 표현했다.
민중미술은 젊은 작가들이 미술의 사회적 참여를 요구하며 결성한 소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각각의 소집단 사이에는 문제의식과 활동방식이 달랐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 재정립에 나셨던 다양한 예술적 실천과 실험들을 포괄한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진보적인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민중미술의 단초는 1969년 오윤, 임세택, 김지하 등이 ‘현실동인’을 결성한 이래, 동시대 문학의 민족주의와 통일에 대한 전망 등과 교류하면서 잉태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작은 1979년 김정헌, 오윤, 주재환 같은 작가 및 성완경, 최민 등 평론가들이 ‘현실과 발언’을 결성하여, 1970년대까지 한국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했던 모더니즘(modernism)미술을 비판하면서 이루어졌다.
민중미술은 주로 서구적 표현법과 그 이면에 내재한 개인적 내면성, 자의식, 존재의식을 표현하며, 민족적·민중적 전통미술을 발굴, 계승하고 대중적인 표현 양식을 개발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개인의식과 서구적 표현양상, 전문성이 소시민적 계급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미의식을 투영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다.
1990년대 초반 동서 냉전의 와해와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집권 이후 민중미술의 운동적 성격이 약화되었고,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을 계기로 역사적인 미술운동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미술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현실비판적인 측면, 그리고 소통을 중요시하는 개념은 미술계의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오윤(吳潤), 1946-1986>은 1946년 4월 13일 부산에서 소설가인 오영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 누나 오숙희와 친분이 있던 김지하(金芝河, 1941년생)를 알게 된다.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던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과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선언문’을 발표했다.
1980년부터 83년까지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계속 참여하면서, 1982년 석형산, 김호득 등과 함께 서대문 미술학원을 설립하여 조소(彫塑)를 지도한다. 이후 잦은 음주와 흡연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88년 간경화로 고려병원에 입원했다. 판화집 ‘칼노래’를 출간하고, 화실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1986년 7월 5일 40세 짧은 생을 마쳤다.
현대 판화(版畫) 선구자로 평가받았으며,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민화, 무속화, 불화, 탈춤, 굿 등 한국 전통의 민중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민족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판화를 비롯하여 수채화, 유화, 삽화, 조각, 탈 등으로 된 작품을 만들었으며, 걸개그림이나 책 등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마지막 시기의 대형 유화로 ‘통일대원도’가 있다. 2005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종구(李鍾九)>는 1955년 12월 20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출생했다. 1976년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인천 동산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1988년에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2004년부터 2021년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지도했다. 2022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임명되었다.
이종구는 1982년 임술년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종구는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농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이종구 화백이 그린 노무현 대통령 초상화가 청와대에 전시돼 있다.
<신학철(申鶴澈)>은 1943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주로 동네 풍경이나 달력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실력을 길렸다. 독일계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던 성의상업고등학교(현 성의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한복 입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한국식 성화(聖畫)로 연하장 만드는 일을 도맡았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시절 콜라주(collage) 형식의 그림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AG전’에 참여했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방법전’에 참여했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한 ‘모내기’가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징역 10월에 선고유예를 받아 구치소 생활 3개월만에 보석으로 나왔다. 이후 2000년에 사면복권(赦免復權)이 되었다. 제1회 미술기자상(1082), 제1회 민족미술상(1991), 제16회 금호미술상(1999) 등을 수상하면서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사진> (1) 오윤 작가와 작품, (2) 이종구 작가와 작품, (3) 신학철 작가와 작품(모내기), (4) 박물관 후원.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13 September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