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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리 한반도 길 나의 길 두만강 300리 길
2차 5월
조식을 마치고 호텔 정문 앞에 대기한 승합차에 오른다.
연길에서 3일간의 모던 일정을 마치고 두만강 국경도시 도문 시로 이동한다.
연길에서 도문 시 국경 전망대까지는 40여 분 채 걸리지 않는다. 최근 완공한 고속도로가 많은 시간을 단축시켜주고 있다.
도문 시는 인구 약 5만의 작은 국경도시로 두만강 건너 함경도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고 양 도시 간 다리와 철교가 놓여있어
매일 정기적으로 열차가 다나며 다리에는 사람들이 걸어서 출입국이 가능하다
강 건너 남양시에는 도시 전체가 빛바랜 시멘트 건물들로 온통 재색 빛이다. 20년 전이나 지금 것 변한 게 하나 없다.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두 번이나 흘렀지만 20년 전 그대로다.. 다리 건너 우측 4층 건물이 20년 만에 푸른색 옷 하나
갈아입은 게 전부다.
북한남양시
사람들이 다리 중앙에 멈춰 선 곳이 북. 중 국경 라인으로 더 이상 넘지 못한다. 다리 색상으로 국경 라인을 구분할 수 있고
중국령 다리까지는 가로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나 북녘의 다리에는 가로등조차 없다.
두만강 교두
다리 건너편 좌측 산 아래 길이 온성 아오지 탄광 길 초입인데 비포장 상태로 아직껏 그대로다. 30여 분 머무는
동안 차량이나 자전거 한 대 다나지 않는다.
20여 년 전 당시에는 간혹 목탄차가 힘겹게 올라가면서 힘에 부쳐 목탄불에 부채질하던ㅋ 기이한
풍경을 볼 수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열차 내부를 가득 채우고 열차 외부 지붕 위까지 올라선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매달려오는 아주 위험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당시 강변에는 노숙자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지금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아오지 탄광길.
사진을 정리하다 20년 전 사진을 찾아보자 또 하나 변한 게 있다. 산기슭에 속도전이라는 대형 글씨가 없어졌다.
. 저들도 부끄러운 것을 알고 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어렵게 통행증을 발급받아 북. 중을 왕래하던 조선족들을 통해 연변의 친인척들에게 서 신을 보내놓고
강변에서 집단 노숙하면서 기약 없이 기다리던 시절..
서신 내용에는 대부분 옥수수 등 쌀 한 말 보내달라며 도와달라는 내용들이다..
당시 국내 북한학 교수들과 연변대학 교수들이 함께 이곳에서 서신을 수집하던 것을 옆에서 지켜본 기억이 있다/
한 사람 건너올 때 보통 서신 4~50편 넘게 가져오고 있었고 당시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북한 전역에서 열차를 타고 이곳으로
모여들어 강변에서 집단 노숙하며 기다리던 작은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지금 이들은 감시가 소홀한 곳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강을 건너는데 목숨을 걸고 잇다.
21세기 북녘의 현실이다.
북한 남양시
홍범도 장군
국경 전망대에서 잠시 이동하면 왕청현 석현진 봉오동 전투장이 나온다.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사에 최초의 승리를 거둔 역사적 현장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다.(1868. 8. 27∼1943. 10. 25))
세상에 나온 지 7일 만에 어머나가 죽고 아버지 등에 업혀 마을 동냥젖을 얻어먹으며 성장한다 9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죽고
고아가 된다. 철도 들지 않은 어린 소년이 이때부터 부잣집 머슴 노릇을 하며 주먹밥 한 줌식 얻어먹으며 성장한다.
15살(1883년) 되던 해 나이를 두 살이나 부풀려 평안도 감영 나팔수로 입대한다.
군 생활 3년 여간 생활은 안정되나 당시 군 교관들의 부정부패 등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참지 못하고 홍범도는 직속상관 한 명을
두들겨 패고
탈영하고 만다. 이후 황해도로 거처를 옮겨 제지소 노동자로부터 머슴 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겨우 감자 주먹밥 하나
얻어먹는 게 전부다
23살 되던 해 금강산 신계사에 절 머슴으로 들어간다 이때 비구니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아들 하나를 얻으나 뜻하지 않은 화적 때를 만나
아내와
자식과 생이별하고., 이후 강원도 산골에 거처를 옮겨
땅을 빌어 밭농사를 지으며 군 나팔수 당시 익혔던 사격술을 활용해 강원도 포수로 변신한다.
당시 조선은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국제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이때 일본은 자국민 보호 구실로 대규모 군인들을 조선에 파견해. 6월 21일 경복궁에 침범해
민 씨 권력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한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다음 해 조선의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며 단발령까지 내린다.
이때 조선 팔도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당시 홍범도는 동료 포수들과 함께 의기투합해 경기도와 , 강원도를 잇는 철령에서 일본 순사 10여 명을 사살한 후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획득해 함경도 북청으로 거처를 옮겨 포수 12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해
함경도 후치령 등 산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이때 헤어진 부인과 자식을 5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난다
1907년 9월 3일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법 시행령을 발표한다. 조선인들이 가진 총기나 화약류 등은 전부 다 관청으로
반납하라는 강제명령이다.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포수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이 무렵 홍범도는 지역 포수들과 함께
총을 압수해 북청으로 반출하던 일본 순사들을 사살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금광을 습격해 여기서 얻은 금괴등을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대담무쌍한 활약을 펼친다.
이후 홍범도는 1년 남짓 짧은 시간에 함경도 등 백두산 일대에서 60여 차례나 교전을 벌이며 한 번도 패한 적 없다는 홍범도의 전설을
만들었다.
민초들 사이에서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는 소문이 나고,’ 홍범도를 잡거나 사살할 수 없던 일본 순사들은 부인을 잡아들여 귀순공작을 벌인다.
부인은 투항 권고문을 쓰라는 일본 순사들의 요구에 망해 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영웅호걸이 어리석은 아낙이
글을 쓴다고 해 굴복하리라 믿는가!”라며 오히려 호통을 친다. 결국 아내는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이후 아들은 1908년 6월. 아버지와 함께 일본군 함흥 수비대와 교전 시 전사한다
16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분을 삭이던 홍범도는. 더한 무장투쟁의 의지를 다진다.
어느새 홍범도는 함경도와 백두산 일대에서 너무 많이 알려져 조선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진다.
1908년 가을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연해주에서 이범윤. 이진용, 이상설, 안창호 등과 의기 투합해 13도 의병을
창립한 후
국내 진공작전을 도모하며 기회를 기다린다.
1910년 4월 주변의 도움과 노동으로 얻은 자금으로 구입한 총기 등으로 무장한 홍범도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 함경도로
진격해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후 다시 두만강을 건너온다.
이후 일본군 초소나 지서 등을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당시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반일 감정은 극도에 달한다. 홍범도 대한 독립단의 국내 진공작전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민초들이 홍범도 근거지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당시 홍범도 대한독립단 본부 근거지에는 3개 중대 300여 명의 병력과 소총 200여 정 권총 30여 정의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지휘부에는 사령관 홍범도 부사령관은 주건 참모장 박경철로 구성된 돼 있었다.
봉오동 전투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 진공작전 횟수가 늘어났고 온성, 회령, 무산 등 두만강 지역 일본군 수비대 피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1920년 6월 4일 봉오동 전투 신호탄이 울린다. 홍범도 휘하 1개 소대 병력이 강 건너 함경도 온성군 강양동 두만강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초소를 습격해 일본군을 사살하고 초소에 불을 지르고 다시 강을 건너와 봉오동 본부 근거지로 돌아온다. 급보를 전해 받은
일본군 함경도
남양 수비대는 1개 중대병력을 파견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를 무단 침범해 추격전을 펼친다.
이를 미리 예측한 홍범도는 두만강변 삼둔자 강변 산기슭에 1개 소대병력을 매복시킨 뒤 유인책으로 몇 명이 앞에 나서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군 중대병력을 산기슭으로 유인해, 일격에 격퇴시킨다.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이다.
6월 7일 오후 1시경 독이 바짝 오른 일본군은 기관단총 대대병력을 앞세워 두만강을 건너와 고려령을 넘고
봉오동 상동 남쪽 300여 m 지점까지 들어온다.
홍범도의 신호탄이 발사되고. 이후 봉오동 전투는 세 시간 넘게 치열한 전투가 벌이졌고 일본군은 사상자가 늘어나자
도주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이날 전투에서 전사자 157명 중상자 300여 명 발생했고. 대한독립단은 전사자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독립 운동사 최초의 승리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거둔 대첩 이후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다.
봉오동 전투와 국내 진공작전등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본은 북간도에 활약하는 무장 독립군들을 진압하지 않고는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대적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진압작전을 세운다.
그 첫 번째 작전이 훈춘 사건이다..
훈춘사건
일본은 중국 마적단 두목 창창하오를 매수하여 훈춘시 일본영사관을 공격케 한다.
1920년 10월 12일 마적단 두목 창장하오는 400여 명의 마적단을 끌고 훈춘성을 공격해 오전 9시부터 네 시간 동안 무차별적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고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등 가리지 않고 100여 명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워버린다.
일본은 자작극 훈춘 사건을 빌미로 자국민 보호 명분을 구실로 그 날짜로 함경도 나진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 등 3개 사단 5만 여 병력을 훈춘시에 출병시킨다.
훈춘 시가지에 나타난 일본군은
방화 약탈 부녀자 겁탈 등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처형을 자행한다
이때 수백여 명의 조선인들이 희생된다.. 이 사건을 훈춘 사건이라고 한다.
청산리 전투
훈춘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3개 사단 병력 5만여 명은 대한독립단을 목표로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일본군 대병력이 두만강 상류를 따라 봉오동으로 진격하지만
홍범도 대한독립단은 사라지고 없다.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홍범도는 지리적 여건이 유리한 화룡현 청산리
이도구로 이동해 한 달 넘게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십리평 북로군정서에 연통이 날아든다. 일본군의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알려온 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오는 것을 감지한 서일은 북로군정서 다음 본부 근거지는 백두산에 새롭게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말경 백두산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10월 10일 안도현과 경 게지역 청산리 삼도구에 도착해 서일은 홍범도 장군을 만나게 된다
같이 싸우자는 홍범도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서일과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일본군은 어느새 청산리 주변을 포위하고
5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서일은 피할 수 없는 전투라는 것을 직감하고 김좌진을 앞세워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간다.
10월 21일 청산리 계곡으로 일본군 선발대가 접어들었다.
또 한 번 홍범도의 지략에 걸려든 일본군은 6일 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나 전사자 150여 명 중상자
수백 명을 내고 홍범도 대한독립단과 서일의 북로군 정서에 패한다. 독립군 전사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청산리 전투를 끝으로 두만강변과 북간도에는 더 이상 독립군의 근거지가 될 수 없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더 많은 일본군이 북간도에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간도에는 크고 작은 무장 독립단 300여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서로 연통을 넣어 연해주에 집결하기로 한다..
홍범도와 서일은 대한독립단과 북로군정서를 끌고 송화강을 따라 북진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한다.
간도참변
봉오동 전투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지원군을 다시 보강해 대오를 갖추고 추격전을 펼치며
봉오동과 청산리로 다시 진격하지만 홍범도 대한 독립단은 보이지 않는다. 패배의 분을 삭이지 못하던 일본군은
조선인 일반 사회단체나 학교 등을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다. 1921년 4월까지 6개월 간 조선인 마을을
대상으로 부녀자 겁탈 등 방화 약탈을 일삼고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이때 화룡, 용정, 연길. 도문, 훈춘등에서
3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되고 2.500여 채의 가옥과 30여 개의 조선인 학교 건물 등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당시 참사를 일컬어 ‘간도참변’이라고 한다.
대한 독립단
간도참변으로 인해 북간도 조선인 사회는 거의 공항 상태에 빠졌고 북간도내 모든 무장 독립 단체는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한다.
무장 독립단체들은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서프스크)로 이동 중 중, 러 국경부근 밀산에서 만나 각 조직을 하나로 통합할 것에 합의하고
조직의 명칭은 홍범도의 조직명인 대한 독립단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하나로 재편된 대한 독립단에 참여한 조직은 다음과 같다.
1. 대한 독립단 (홍범도)
2. 북로군정서 (서일)
3. 한국 독립군 (지청천)
4. 간도 국민회 (구춘선)
5. 대한 신민회 (김성배)
6. 의군부. 광복단 (이범윤)
7. 혈성단 (김국초)
8. 도독부 (최명록)
9. 야단 (김소래)
10. 대한정의군정사 (이규)
11. 군비단 (김백일)
대한 독립단 총재는 북로군정서 서일이 추대되고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고.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은 김창완. 조동식, 오광선, 이범석 등이 선임된다.
대한 독립단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와 27개의 소대로 편성되었고 총병력은 3.500 명이다.
새롭게 태어난 대한독립단은 겨울을 밀산에서 보내고 다음 해 3월 대대별 시차를 두고 러시아
자유시(알렉세프스크)로 이동한다. 당시 연해주 아무르강 일대에서 활약 중이던 오하묵(연해주 자유시 부대장)의
도움을 받아 아무르강을 건너가 이만(달내레츠스크)에 집결한다. 오하묵은 노령 자유시(알렉세프스크)에
주둔지를 마련해 대한독립단을 집결하도록 배려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적군파와 반혁명 군 백군파가 내전 중에 있었고
일본은 러시아 반혁명 군 백군파의 지원을 위해 연해주에 일본군을 파견하지만 실상은 연해주에 활동하는 조선독립군을
진압할 목적이었고. 대한독립단과 ,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들은 적군파와 함께 대일 항전을 펼치며, 적군파를 도와
후일 연해주에 고려족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흑하 사변"
당시 연해주에도 북간도와 같이 많은 조선 독립군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사할린 조선 의용대는 이항 부대라고도 한다. 이항 부대장 박일리아는 이항시(니콜라예프스크)에서 러시아 적군파와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대파하고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온다. 당시 자유시에는 북간도에서 넘어온
홍범도를 비롯해 하나로 통합된 대한 독립단의 부대와 자유시에서 활동 중이던 조선 독립군 오하묵의 휘하 자유부대가 함께 있었다
이때 이항 부대장 박일리아와 자유부대장 오하묵이 전체 독립군 지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이때 양 파의 대립을 조정
하기 위해 고려혁명군 군정의회가 결성되었고 회의를 통해 러시아 적군파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해 조선 독립군의 전체 지휘권을 책임지도록 의결했지만. 박일리아는 이에 불복하고 자신의 이항부대와
북간도 대한 독립단을
자유시에서 5km 떨어진 수라세프카로 이동시킨다. 홍범도는 이때 부하들의 안전을 생각해 자유시 오하묵 자유부대에 남는다.
몇 번의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신의 부대인 러시아 적군파 29 연대를 동원해 1921년 6월 27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박일리아 이항부대와 대한독립단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한다 당시 자유시 부대장 오하묵도
적군파 29 연대와 함께 행동한다. 이항 부대장 박일리아가 저항하면서 쌍방 간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당시 함께 있던 북간도
대한 독립단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다. 이 사태를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 사변이라고 한다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이다. 박일리아를 따르지 않던 홍범도는 살아남았고 당시
박일리아는 무사히 탈출한다. 서일과 , 김좌진은 통합된 대한독립단을 이탈해 참변 수일 전 중국 밀산으로 피해 살아남았으나 총재 서일은
국경을 넘다 중국 마적단을 만나 부하 수십 명이 희생당하자 자책감에 그곳에서 자결하고 만다.
당시 흑하시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후일 사가들의 입장에 따라 내용과 해석이 조금 식 다르게 평가되나 분명한 것은 연해주
독립군들의 파벌싸움에 하나로 통합된 북간도 대한독립단이 연해주에서 대부분 희생되고 와해되었다는 사실이다..
흑하 사변에서 300여 명의 부하들을 살린 홍범도는 재기를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의 부대가 오하묵 자유부대원과 합계
적군파 여단에 편성돼 항일 전을 이끌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홍범도는 적군파를 떠나 55세의 노구를 끌고 연해주
집단농장으로 들어가 조선인들의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을 벌이며 노후를 보낸다.
1937년 10월 스탈린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강제 이주 작전을 전개한다. 천하의 홍범도도 비켜나지 못했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이때 홍범도 나이 70세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서 움막생활을 시작했고
병원 경비 극장 수위 등을 하면서 마지막 노후를 보낸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홍범도는 러시아 군부대를
찾아가. 일본군과 싸우는 전쟁터에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나 거부당한다. 홍범도는 마지막까지 항일무장 투쟁가로서
기개를 잃지 않았다.
대한독립 영웅 홍범도
1943년 10월 홍범도는 주변 옛 동지들을 몇몇 불러놓고 돼지 한 마리를 잡는다.
이것이 홍범도 생의 마지막이었다.
부인과 자식까지 항일무장 투쟁에 다 희생시키고 조국 광복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그토록 바라던 조국광복 2년을 앞두고
1943년 10월 25일 먼 이국땅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지켜보는 피붙이 하나 없이 쓸쓸히 눈을 감는다.
이곳 동포(고려족)들이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정성을 다해 홍범도의 묘지를 조성했고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도 홍범도 거리를 하나 지정해 지금 것 그를 추모하고 있다
그가 일구어낸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 것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금년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95주년이 되는 해다 홍범도는 아직도 머나먼 카자흐스탄 차가운 땅 구천에 떠돌고 있다.
그들이 일궈낸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 부가 넘친다 한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아 ~ 대한민국 우리 조국을
노래하고 춤추고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독립 영웅들은 지금 것 이국 멀리 차가운 땅에 방치해 두고 있다.
악명 높은 일본군 관동군 출신 다까키마사오(박정희)는 국립묘지 양지바른 곳에 편안히 잠들어 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20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다. 북간도 구천에 떠도는
대한독립 영웅들에게
술잔과 함께 이 글을 바친다
도문 시가지를 벗어나자 바로 두만강변길 초입이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동해 방천까지 두만강을 따라 300리다.
강변길을 따라 잠시 후 터널 입구에 막굴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막굴과 차굴은 별 차이가 없고
우측 편이 반정도 열려 있는데
막굴로 표기해 놓았다.
'막굴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막 굴을 지나자 두만강 건너 북녘 땅 첫 마을이 나온다.
남쪽의 60년대 같은 풍경들로 씨앗을 심는 농부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두만강 푸른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5월의 가뭄으로 강바닥이 타들어가고 좁은 강폭의 여울은 어린아이들도 바지를 걷고 한걸음에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더 가깝게 건네본다
5월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지만 햇볕을 가릴 모자 하나 없다.
남쪽 야구장의 흔한 1회용 종이 캠이 떠오른다.
마을은 4~5 가구가 전부다, 외부로 연결된 도로망은 보이지 않고 산에 가로막혀 고립된 강촌 마을로
씨앗을 심는 농부들은 30여 명이 넘는다. 저 많은 인원들이 대체 어디서 왔을까?? 금세라도 강을 건너가 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으나 건널 수 없는 강이다
통일은 대박이다??. 박근혜의 헛소리다. 떴다방이라도 상륙시켜
저들을 살려야 박이라도 터진다.
박근혜 정권은 통일의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경색된 남북대화는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북한농부
두 번째 마을도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는 소도 보이고 자전거가 다니는 것으로 보아 부촌 마를로 보이나 내부는 알 수 없다.
북한 강촌마을
강변 전역에 몇 해 전에 볼 수 없던 철조망이 깔려 있다.
탈북자를 차단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의도다 중국은 백두산 아래 두만강 최 상류에서부터 동해 방천까지
1.300 리 강변길 전역에 철조망을 깔았다. 어느새. 철조망은 녹이 슬고 두만강의 흉물이 돼 중국 공산당의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강 건너 숲 속에 숨은 북한 경비대 초소에는 북한 경계병들이 탈북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두만강
전방 좌측에 훈춘시가지가 보이고
우측 두만강에 작은 다리가 하나 나온다 강 건너 다리 끝에는 북한 무장 군인들이 총을 메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이곳 작은 다리는 훈춘 온성간의 북, 중 이동 통로로 이용했으나 20여 년 전 권하교가 건설되고 폐쇄돼. 지금 다리에는 중국
농부들이 곡식을 늘어놓았다.
여기서 또 터널 압구에 차굴'이라는 한글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 다니는 구멍이라는 뜻이다. 쥐구멍을 쥐 터널이라고 할 수 없듯 차굴
참 재미있는 한글이다
훈춘시 우회 길을 벗어나자 강변길이 끝나고 내륙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20여 분이면 두만강 권하교에 도착한다, 연변지역
무역상인 대부분 출입국시 이곳 다리를 이용한다. 다리 건너 동해 나진 선봉까지는 20여 분의 거리로 평일은
생필품 등을 가득 실은 많은 차량들이 줄을 서 북녘 세관의 통관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중국 노동절이며 공휴일이라 텅 비어 있다
강 건너편에 보이는 작은 마을 앞이 북한의 통상구며 마을 뒤편의 작은 산을 넘으면 그 유명한 아오지 탄광으로 반세기가 넘게 인권의
사각지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곳이다. 저곳에는 또 악명 높은 온성 정치범 수용소도 함께 있다.
이곳에서 약 1km 상류 지점에는 압록강 신대교와 같은 새로운 제2 권 하교가 현재 건설 중에 있다.
중국의 저급 생필품 등을 북한으로 대량 수출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의도가 깔린 건설 사업들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보면 될 것이다.
두만강 권하고
권하교 좌측 초입에 두만강 표지석이 하나 서 있고 도문강(圖们江)이라 표기하고 있다.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土門江)과는
한자 자체가 다르다
서위압록 동위토문 (西爲鴨綠 東爲土門) 즉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의 물줄기를 따라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으로 한다라고 양국이 합의하고 후일을 기해 돌에 글을 새겨 백두산 장군봉 아래
1712년 (숙종 38년) 국경비를 세웠다
국경을 표시하는 글을 새겨 국경바를 백두산에 세워두고 지금 것 논란이 되는 것은 1885년 조 청 감계 담판에서 청나라 측이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중국 측 억지 주장을 수용하면 두만강이 한반도 국경으로 학정 되지만 백두산정계비 동쪽 산기슭의
물줄기는
정확히 토문강을 발원시켜 오 도백하를 거쳐 북간도를 동서로 가르며 송화강으로 흘러간다. 두만강의 발원지가 될 수 없다.
두만강 발원지는 백두산정계비 동북쪽 60여 리 떨어진 백두산 동쪽 자락 21호 경계비 주변의 늪지대 작은 웅덩이다.
그러나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억지 논리를 지금 것 유지하고 있다.
자료들을 검색하다 서울대학교 역사학자 송기호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을 접했다.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1885년 조 청 감계담판에서 조선은 백두산정계비에 표기된 토문강이
송화강이라고 주장하지만 조사 책임자이던 이중하는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말해 주는 흔적을 발견하고 고종에게 보고서를 냈고,
최근 조선족 학자의 조사에서도 이런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송기호 발표)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서울대학교 역사학자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송기호는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면
중국 땅이라는 근거를 함께 내놓아야 한다.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장물로 체결한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다.
간도협약 1조에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 영토로 인정한다라고 적혀 있다. 일본이 국제법상 무슨 자격과 권리를 갖고 남의 나라 땅을 인정 하나.
청나라 또한 장물을 취득한 공범이다..
장물로 체결한 간도협약 전문이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적혀 있다.
① 조·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으로서 경계를 이루되,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조선인의 잡거(雜居) 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나라 백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나라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 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길림[吉林]·장춘[長春] 철도를 연길[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조선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다.
송기호가 언급한 이중하는 누구인가?
1885년(고종 22년) 1887년(고종 24년) 당시 조선과 청나라는 2년에 걸쳐 두 번이나 국경 담판을 벌인다.
이때 조선의 협상 대표가 이중하다.
당시 청나라는 임오군란(1882년)을 기회로 자신들의 군대를 한양 도성에 주둔시켜 두고 대원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이들은 이후 감계담판(1885년)에서 두만강이 토문강이라는 억지를 부리며 국경을 확정 지으려고 했다. 이때 고종의 명을 받은 이중하는
조선의 감계사로 나섰다. 이중하는 청나라 감계사들과 함께 백두산정계비를 중심으로 측량과 물줄기를 따라 한 달여 조사를 마치고
정계비 표지석 자리의 능선이 양강의 분수령이 되고 동쪽으로. 토문강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발원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 답사로
청나라 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중하를 위협하며 또다시 두만강이 토문강이라며. 자신들이 의도하는 국경을
요했다.
이때 이중하는 청나라 대표들에게 ‘내 목을 쳐라 국경은 한치도 줄일 수 없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며 이곳이 토문강의 발원지가 맞다며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번의 협상은 무산되고 1909년 간도협약 전까지 20여 년 넘게 조선은 여전히 간도 영유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이중하는 협상 내용을 상세히 일기로 남겨 지금도 간도 영유권에 관해 소중한 자료로 남아 있고 현재 규장각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당시 조선은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쟁탈전이 전개되자 이중하는 한 치의 땅도 이들에게 넘길 수 없었고. 또한 북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 백성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이중하는 자신의 목을 걸고 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이중하가 죽고 그를 기리는 송덕비만 남북에 13개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중하는 지하에서 송기호를 어떻게 평가할까??
최근 중국의 한 학자는 정계비를 세울 당시 청나라 대표로 참가한 목극동이 무인 출신이라 지형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결국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가 맞다는 것을 실토한 논문이다.
송기호는 최근 조선족 학자의 논문에서도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는 언급에도 한마디 보탠다..
학자는 연구를 통해 자신의 논문으로 답을 내야 한다. 남의 글을 앵무새처럼 울어대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조선족이 누구더냐?? 1992년 한중 수교 정상화 이후 우리는 그들을 만났지만 조선의 선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뒤였고 남은 2~3세들은
한족에 동화되고 지금 이들의 정신세계는 중국이다.
한, 중 축구 경기가 열리면 조선족 사회에서는 중국을 응원한다는 사실. 송기호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다리 초입 좌측에 세워진 표지석은 2012년까지 볼 수 없었다.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토문강(土門江)과 도문강(圖们江)은 한자 자체가 다르다.
중국공산당은 동북공정의 완결 편을 그리고 싶지만 스스로 모순을 저지러며 다급함을 보여주고 있다. 급하면 꼬리를 남기는 법이다.
중국은 5.000년 역사 내내 분열의 역사를 갖고 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사대주의에 절은 학자들을 청소하지 않고는 다음 역사 또한 우리는 반도에 머문다
3 국경 동해 방천
시원하게 뚫린 두만강 방천둑길을 따라간다., 중국 노동절의 연휴기간이지만 중국 여행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천둑을 경상도 지역에서 방천이라 한다. 이곳 방천둑 좌측에 방천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실지 이곳에 있다. 경상도 방천이라는 단어도
이곳에서부터 유래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압록강에는 하천둑이 거의 없다. 주변 산들이 협곡처럼 방천 역할을 대신하지만 두만강 하류에는
인공적 방천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동해가 가까이 오고 강폭이 넓어지고 삼각주들이 많이 나온다. 두만강 방천은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관리되는
세계 생태공원이다 이곳도 사막화돼 가는 풍경들이 나온다.
두만강하류
방천 매표소다. 얼마 전까지 입장료가 없었다
강변에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 시비가 서 있었고 조선족 동포들이 나룻배 위에서 주막을 대신했고
이들과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함께 노래했던 곳인데 베이징올림픽 이후 시비는 사라지고 주차장을 닦고 문을 달고
문값 내놓으라고 한다.
장사에는 일가견이 있는 왕서방들이다 작은 돈이 아니다. 1인에 100원으로 우리 돈 2만 원 정도다.
이곳이 눈물 젖은 두만강 시비 자리다 지금 나룻배 위에 한국형 작은 팔 짝 지붕 하나 올려놓고 두만강 1 부두라며
한국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두가 아닐까? 참 재미있는 부두다.
두만강 1 부두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1~2분이면 우측에 방천 전망대가 나온다.. 좌측 편 중. 러 국경라인에 접한 구 전망대도 아직 그대로 있다.
근래 완공된 방천 전망대는 10층 건물로 내부는 미로처럼 얽혀있어 입구를 찾아 나오는 것도 쉽지 않다.
전망대를 빠져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2~`3분이면 중국 대륙 동쪽 끝지점을 표기한 국경비 표지석 앞에 도착한다 서쪽 히말라야 산맥에서
거침없이 달려온 중국 대륙은 동해 바다를 약 7km 남겨두고 이곳에서 멈춘다, 북한과 러시아 국경인 압록강 철교가 중국 대륙의
동해 태평양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 닭 쫏든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국경비
두만강 철교 중앙이 북. 러 국경으로 현재 한반도의 북쪽 끝이다.
유라시아로 연결되는 철교로 두만강 마지막 철교다. 철교 뒤편 좌측에 아른거리는 땅이 녹둔도다.
녹둔도는 이순신 장군의 첫 부임지로 여진족들에게 첫 패배를 당한 곳으로 긴 세월 상류 퇴적암이
밀려와 현재 연해주에 붙어 있는 것을 조선과 청나라의 혼란기를 틈타 러시아 측이 연해주와 합계 슬쩍해 간 것이다,
90년대 노태우 정권 당시 돌려달라고 외교 서신을 보냈지만 거부당한다 김정일도 한 번 재기한 적 있으나 이후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다. 현재 남쪽의 한 독지가가 녹둔도 일부를 러시아 정부로부터 50년간 임대받아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참여정부 당시 연해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스 등 천연자원과 유라시아 철도 등 한 러 양국 간의 활발한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 진전된 소식이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두만강철교
두만강 철교 우측 편이 한반도 북쪽 땅끝 마을이며 행정구역상 나진 선봉군에 속한다 전남 해남군의 남쪽 땅끝 마을과 이곳까지 직선거리가
3.000리(1200km)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도 여기까지 유래된 것이다.
애국가는 사대주의에 절은 학자들이 활보하던 시절 작사된 노래며 연해주의 끝 불라디보스토크까지는
4.000리(1.600km)다. 저곳 두만강 철교 좌측이 하산 시로 지금 러시아 영토다 도시. 뒤편으로 시베리아 벌판으로 이어지는 연해주의 광활한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하
두만강 뱃사공이다
에야디야 노를 저어라
내 님은 어디에 갔나 에야디야 노를 저어라
내 님 찾아 4천 리다. 에야디야
어느덧 노을이 깔리며 두만강을 적신다.
주막이 없다..
두만강 뱃사공
두만강 노을
두만강 방천 일정을 모두 마치고 30여 분이면 3 국경 도시 훈춘시에 도착한다
훈춘시는 중국의 동쪽 끄트머리 도시로 인구 약 10만의 작은 국경도시다 훈춘은 한반도와 인연이 깊다. 8세기경 발해가
동경 용원부를 설치하고 동해를 거쳐 일본으로 가던 해로의 중심지며 발해의 임시 수도다.
훈춘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3국을 접한 특수한 지형적 위치로 북한과 러시아 간 수출입을 담당하는 통상구가 있고
3 국경을 접한 방천 생태계 같은 명소들이 개발돼 있다. 최근에는 장춘 훈춘 간 고속철이 개통되고
관광객과 상인들이 많이 찾고 북한과 러시아를 연계하는 순환 관광이 시작되었다 북한 나진 선봉까지는
100리(48km)가 조금 넘는 길로 30여 분 소요되고.. 러시아 자루비노 국제항구까지는 68km로 한 시간여 거리다.
훈춘 국제버스터미널에서 북한 동해 나진 선봉까지 버스가 하루 2회 운행하고 있으나 우리 한국인은 탑승할 수 없다.
국가 보안법이 발목을 잡는다.
훈춘 시가지 한가운데 러시아 거리가 있다,
건물 대부분 유럽풍으로. 오색 네온 불빛이 한층 더 거리를 아름답게 하고 있다. 오색 빛 네온 사이.. 쟁반 같은 보름달이 떴다.
북간도 밤이 깊어간다.
러시아 거리
,,,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 우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가 필요하신 단체 개인등 연락 주세요
현지정보 및 교통 숙박 숙식등 상세한 정보 나누겠습니다
함께 걸으면 길이 됩니다.
E_mail : kdjj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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