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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법(1602~1645).史可法 恙未愈帖
출처:서령인사 소스:이페어케이
도록 번호: 978
평가 RMB: 80,000-120,000
호가 RMB: 2,415,000(수수료 포함))
978
스코법(1602~1645)은 병이 덜 나았다.
종이책 렌즈(편지 4쪽, 발 2쪽)
식문:천외한은 아직 낫지 않았는데,어쨌든 설사가 그치지 않고,두 발이 나른하다..이 병은 잠시 된 것이 아니므로잠시라도 낫지 않겠습니다.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어제 태재께서 건남도의 궁내특을 말씀하셨다.형출자가 수일 내정에 공고를 올렸는데, 며칠 전에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낭군을 선발하는 데는 오랜 지식이 있지만,천성적으로 옹졸하여, 지금까지 한 글자로 전조에 든 적이 없어, 서적으로 이를 수가 없었다.오빠는 영랑의 괴로움을 멀리서나마 생각하며 해를 넘기고형님이 아는지 안 아는지, 형님이 아시는 분에게 한번 부탁해서 예지하는 것은 어떨까.역질이 불일치하다.돌진하다.
도장을 찍다: 스코파인(백) 가법(백)
발문: 1. 사가법, 자헌지, 일자도비, 대흥사람. 어미 윤은 임신, 꿈 문천상서롭게 집에 들어가니, 살아 있는 것이 법하다.사친은 효문으로 듣고, 숭정 원년에 진사하여 서경을 받았다.안추관. 부사(副使)로 자리를 옮겨 안경(安慶)·지주(池州)·감북(監江) 여러 군(軍)을 순시하고도적을 토벌하는 공로로, 우첨도 어사를 승진하고, 안경 등 사부와 하남의 광주·고시를 순무하였다.…호광지광제(湖廣之廣濟), 황매(江西之德化)호구 등 10개 현 제독의 군무.그러나 법은 짧고 힘이 있어, 얼굴이 빛나고, 몸이 청렴하며, 사신을 받아 들인 후, 사졸들과 함께 고생하며, 그러므로 사력을 다하여 연속하여 극적을 격하하였다.이정은 외난을 겪고, 기호부 우시랑 겸 우첨도어사(右佥都御史), 총독 조운(漕運), 남병부 상서(尙書)에 배향되어 기무에 참사관하였다.17년 4월 삭, 지적이 궁궐을 범하여, 군사를 맹세한 근왕이 포구에 이르러 북도 함락되었는데, 남경의 모든 신하들이 노왕을 의립하여 법을 집행할 수 있게 하였는데, 봉양 총독 마사영은 이미 군대를 보내어 복왕을 봉송하였다.참. 가법이란 제 대신들과 구계봉영하고, 오월 초에 영접하는 것이다.삼복왕감국. 정추각신, 거가법 및 고홍도, 성의백유공소욕, 마사영 추후, 그리고 폐의, 유종주 서석린 등, 공소특수는 응우옌 다윗을 들고 2일 가법 이부상서 겸 동각 대학사, 사영, 홍도와 병명하였으나, 법은 여전히 병부의 일을 주관하고 있다.시사는 아침저녁에 입상하기를 기대하여 명하에 크게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순례에 들어가 절하고 성소를 방문하였다.그러나 임금은 병사의 영입으로 양립할 수 없으니 회양을 감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15일 왕이 즉위하고 내일, 가법폐사, 가태자 태보, 개병부 상서, 무영전 대학사.사영은 곧 일입직으로, 그러나 법수는 부양주를 열었다.6월에 리는 대병사가 되어 패하여, 경사를 버리고 서쪽으로 갔고, 7월에 예친왕이 법을 어기며 귀명을 권하여 번으로 불렀다.법대로 보고하고 말이 많으면 굽히지 않는다.8월에 구소 청급은 진취적인 자금으로 사영이는 아까워도 보내지 않고 하남으로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10월에 청강포로 법령으로 가서, 관리들의 둔전을 풀어 개봉하는 것은 중원계를 경유하는 것이다.11월에 병사가 숙소에 들어가 유조기를 지원하라고 총병에게 명하였는데, 병사가 인계할 때에는 성둔관중에서도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그러나 법은 조서를 내려 도적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구소천유언은 오늘날 군사의 교만과 교만함과 문무의 즐거움, 절조석간지연강간, 그만 둔 수고비 등의 말을 통절하게 하여야 하며, 조야에서 그 뜻을 읽었으나 보고는 듣지 못하였다.병사가 비숙을 하달할 때에 비장을 비장하여 보고할 수 있었는데, 사영은 하를 방어하려는 군인의 공을 법도라고 하여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순치 2년 2월, 대병은 산동 하남회의 좌량옥을 취하여 궐을 범할 것이다.왕의 친필 서소는 가법을 부르니, 마침내 그날에 군대를 보내어 강을 건너 제비가 있는 이 곳에 도착하였는데, 양옥은 이미 황의 공로에 패하여 속히 방어하게 하였다.4월에 큰 병사가 남하하여 쉬이이(眙 。)에 들어가니, 법경(法 扬)은 양주(揚州)로 달려갔고, 18일에는 양주 성 아래를 압박하여 가법(可法)과 각 관원 등을 불시하고 러시아 총병 이서봉, 감군 고기봉(高岐鳳)이 발진하여 강하하자 여러 문무(文武)들이 분분하여 수비를 거부하더니, 사흘 만에 대병들이 거포로 성 남서쪽을 격파하였다.가법은 스스로 목을 자르고 죽지 아니하는 것을 집대성하여 이르기를, 우리 사독이 나를 속살해도 되고 권하면 따르지 않으니,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법사에는 명망이 있다.그런데 법초에 공로로 태사에 이르렀는데, 당왕은 충정, 국조는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옛 제비꽃 학동들이 오래오래 글을 올렸다.도장을 찍다:증구지인(백)환백(주)
2. 사산전씨 왈, 각부가 칼을 빼들고 자결할 때, 제장들이 껴안았다.아, 작은 동문으로 몰려가 붙잡혔습니다.화석예친왕이선생으로불러서권하고각부가막말을해서죽었다각부 유언, 내가 죽으면 매화재 위에 묻겠다.가장 뛰어난 부장인 Stew는 공적인 일을 추구한다.뼈는 얻을 수 없으니, 의복으로 관장하다.혹은 성 안의 파탄이라 할지라도, 각부의 청의오를 친견할 수 있다.모자는 백마를 타고 천녕문을 나와 강에 투신하여 죽은 적이 없다.성에서 운구하다. 자, 장강 남북에서 마침내 각부가 죽기 전에 그 이름을 도용하여 일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각부의 유해는 역시 물을 수 없다.소미록. 도장을 찍다: 순방(주)
감장인 : 순방 컬렉션(주)
기록: 1.<배매산방몇상서>,청황정란집청도광 6년(182년)6) 각본.
2.명대명인의 편지 선택지 P703-704. 국립도서관 출판사2008년.
설명:동규존구장병제발.어린애가 오래 전에 발문을 연 적이 있다.
SHI KEFA LETTER
Ink on paper , mounted ( four pages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
Literature ( part ) : 1 . Books on the Stand in the Baimeishan Studio , block-printed in 1826
Note : Inscribed by Tong Cengjiu and Tong Kuizun .
Provenance : Previously collected by Tong Kuizun .
화심: 23×9.5cm×4 제발: 35×20.5cm×2
RMB : 80 , 000-120 , 000
저자소개: 사가법(1602~1645), 글자헌지는 일자도린, 하북성에 있다.대흥인. 숭정 원년 진사.서안부에서 관직을 제의받아, 농민을 탄압하였다.민의는 우첨도 어사로 승격되었고, 후에 남경 병부 상서로 승진하였다.숭정 17 년, 이자 성농민군이 북경을 공격하자, 그는 근왕을 맹세하여 부하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포구로 갔다.북경의 성파 소식을 듣고, 남경에 복왕을 옹립하였다.(홍광제) 즉위하여 남명소정(南明小朝亭)을 세우고 가무영전(加武英殿) 대학사를 세워 사각부(史閣部)라 불렀다.독감 양주. 순치 2년 양주성파. 사가법은 아직 죽지 않았다. 청군에 포로로 잡혀 의연하게 죽었다.양주 사람들은 성밖의 매화령에 의관총을 쌓았다.생산 현장의 기세가 엄정하다.후세 사람들은 사각부라 하여 충정, 청조 건륭황제 때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세상에 《사충정공집》이 있다.
소장자소개: 동규존(1831~1908 이전)) 본명은 회, 자는 순선인성초무교(지금의 닝보하이수구) 사람.동괴오자(童绪五子)를 위하여 광서원년(1875) 거인(擧人)하여 중헌대부(中憲大夫)에게 4품목을 수여하였다.호부 복건사 주사.가재는 수집하고 서화는 골동품을 정감한다.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풍도생초서축이라, 오랜 시일을 모사하다가, 결국 초서에 일하게 되고, 또 다시 초서화하게 된다.선전, 해서. 광서 16년(1890)에 『鄮山書院碑記』를 쓴 책이다.
발자소개: 동증구[청], 호환백, 인현 사람.중우(1867~?)사촌 동생 읍에서 증식하다.광서 20년(1894년) 향시천권. 광서 21을미(乙未)의 《숭실서원(崇實書院)과예(科藝)》에 수록된 작품중
史可法(1602~1645) 恙未愈帖
图录号: 978
估价RMB: 80,000-120,000
成交价RMB: 2,415,000(含佣金)
978
史可法(1602~1645) 恙未愈帖
纸本 镜片(信四页,跋二页)
识文:贱恙尚未得愈,总之泄泻不止,两足软痛。此病非暂时所成,故非暂时可愈。承屡顾,谢谢。昨太宰谓建南道缺乃特为兄出者,数日之内定登启事,顷有消息否。选郎于不侫亦有旧知,但鄙性硁硁,从来未以一字入铨曹,故难以书往达。兄远念令郎之苦情,以日为岁,未审选郎知否,兄再托相知者一从曳之如何。力疾不一一。名正具。冲。
钤印:史可法印(白) 可法(白)
题跋:1. 史可法,字宪之,一字道比,大兴人。母尹有娠,梦文天祥入室,生可法。事亲以孝闻,崇祯元年进士,授西安推官。累迁至副使,分巡安庆、池州,监江北诸军,以剿贼功,擢右佥都御史,巡抚安庆等四府及河南之光州、固始、湖广之广济、黄梅、江西之德化、湖口等十县提督军务。可法短小精悍,面目烁烁有光,持身廉,接士信,雑处行伍间,与士卒同劳苦,以故得士死力,连次击降剧贼。以丁外艰去,起户部右侍郎兼右佥都御史,总督漕运,拜南兵部尚书,参赞机务。十七年四月朔,知贼犯宫阙,誓师勤王,抵浦口,闻北都陷,南京诸大臣议立潞王,移牒可法,而凤阳总督马士英已发兵送福王至仪真。可法乃与诸大臣具启奉迎,五月初三福王监国。廷推阁臣,举可法及高宏图,诚意伯刘孔昭欲并推马士英,又议起废,共推刘宗周、徐石麟等,孔昭特举阮大铖,越二日拜可法吏部尚书兼东阁大学士,与士英,宏图并命,可法仍掌兵部事,士英仍督师凤阳。是时士英旦夕冀入相,及命下大怒,拥兵入觐,拜疏即行。可法以士英入,势不两立,请督师淮阳。十五日,王即位,明日,可法陛辞,加太子太保、改兵部尚书、武英殿大学士。士英即以是日入直,可法遂开府扬州。六月李自成为大兵所败,弃京师西走,七月睿亲王致书可法,劝归命称藩。可法报书,语多不屈。八月,具疏请饷,为进取资,士英靳不发,请进兵河南,不许。十月可法赴清江浦,遣官屯田开封,为经略中原计。十一月大兵入宿迁,命总兵刘肇基往援,大兵引还时,自成遁关中,犹未灭。可法请颁诏讨贼,具疏千有余言,有今日兵骄饷绌、文恬武嬉,请绝朝夕之燕衎、罢可已之繁费等语,淋漓痛切,朝野传诵旨,但报闻而。及大兵下邳宿,可法飞章以报,而士英谓可法徒欲叙防河将士功,卒不省。顺治二年二月,大兵取山东河南会左良玉,将犯阙。王手书召可法入援,遂即日发兵渡江,抵燕子矶,良玉已为黄得功所败,乃令速还防。四月大兵南下入盱眙,可法轻骑奔还扬州,十八日,大兵逼扬州城下,招谕可法及各官等不从,俄总兵李栖凤、监军高岐凤拔营出降,城中势益孤,诸文武分陴拒守,越三日,大兵用巨炮击坏城西南隅,城遂破。可法自刎不死,被执大呼曰,我史督师也,可速杀我,劝之降,不从,遂被杀。可法死而有明亡矣。可法初以功累加至太师,唐王谥忠靖,国朝定谥忠正。古堇后学童曾久谨书。钤印:曾久之印(白) 奂伯(朱)
2. 谢山全氏曰,阁部拔刀自裁时,诸将抱持之,拥至小东门被执。和硕豫亲王以先生呼之,劝之降,阁部大骂而死,初阁部遗言,我死当葬梅花岭上。至是副将史德威求公之骨不可得,乃以衣冠葬之。或曰,城之破也,有亲见阁部青衣乌帽乘白马出天宁门投江死者,未尝陨于城中也。自是,大江南北遂谓阁部未死,多有冒其名以兴事者,而阁部之遗骸亦竟不可问矣。少眉录。钤印:莼舫(朱)
鉴藏印: 莼舫收藏(朱)
著录: 1.《拜梅山房几上书》,清黄定兰辑,清道光六年(1826)刻本。
2.《明代名人尺牍选粹》一卷P703-704,国家图书馆出版社,2008年。
说明:童揆尊旧藏并题跋。童曾久题跋。
SHI KEFA LETTER
Ink on paper, mounted (four pages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Literature (part): 1. Books on the Stand in the Baimeishan Studio, block-printed in 1826
Note: Inscribed by Tong Cengjiu and Tong Kuizun.
Provenance: Previously collected by Tong Kuizun.
画心:23×9.5cm×4 题跋:35×20.5cm×2
RMB: 80,000-120,000
作者简介:史可法(1602~1645),字宪之,一字道邻,河北大兴人。崇祯元年进士。初任西安府推官,因镇压农民起义升为右佥都御史,后升任南京兵部尚书。崇祯十七年,李自成农民军进攻北京,他誓师勤王,率部渡江至浦口,得知北京城破,即在南京拥立福王(弘光帝)即位,成立南明小朝廷,加武英殿大学士,称史阁部。督师扬州。顺治二年扬州城破,史可法自刎未死,被清军俘获,从容就义。扬州人民在城外梅花岭筑衣冠冢。工行书,气势严正。后人称为史阁部,谥忠靖,清乾隆时追谥忠正。传世有《史忠正公集》。
鉴藏者简介: 童揆尊(1831~1908前),原名会,字莼舫,号少眉。鄞城醋务桥(今宁波海曙区)人。为童槐五子。光绪元年(1875)举人,诰授中宪大夫四品衔户部福建司主事。家富收藏,精鉴别书画古玩。得明人丰道生草书轴,追摹日久,遂工于草书,又善篆、楷。光绪十六年(1890)曾书《鄮山书院碑记》。
跋者简介: 童曾久[清],号奂伯,鄞县人。重佑(1867~?)从堂弟。邑增生。光绪二十年(1894年)乡试荐卷。作品曾收录于光绪二十一乙未的《崇实书院课艺》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