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 간 후, 3년간 소식이 없던 최경창이 1575년(선조 8)에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홍랑이 듣는다. 그녀는 즉시 행장을 차려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한양에 당도, 꿈에 그리던 님을 만나 극진히 병간호를 하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기쁨과 행복도 잠시.....
이들의 사랑을 질시하던 사람들이 양계의 금(禁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을 어겼다는 죄목과 인순왕후의 국상이 지났지만 사대부가 기생과 어울렸다고 들고 일어났다.
이 일로 최경창은 급기야 관직에서 파면되고 홍랑 또한 쓸쓸히 홍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별하던 날, 최경창이 홍랑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준다.
고의 (古意) 옛 뜻을 적음
린린척차륜(燐燐隻車輪) 덜컹덜컹 쌍수레의 바퀴들은
일일천만전(一日千萬轉) 하루에도 천만 번씩 구른다지요.
동심부동차(同心不同車) 마음은 하나인데 수레는 같이 못 타
별리시루변(別離時屢變) 이별한 후 세월은 많이도 변했구려.
차륜상유적(車輪尙有跡) 수레바퀸 그래도 자취를 남기지만
상사인불견(相思人不見) 아무리 그리워도 볼 수 없는 그대여
이별의 아픔을 안은 홍랑은 고죽에 대한 애정의 눈물을 뿌리며 천리길 홍원으로 돌아갔다.
그리워하면서도 못 만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만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홍랑과 고죽은 세 번 만났다. 그러나 세 번째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덜 마음 아팠을 것이다.
그 이별 이후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최경창은 파면 후, 복권돼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 때 그의 나이 45세....
최경창의 죽음이 알려지자 홍랑은 그의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그 곱디 고운 얼굴을 스스로 훼손한 뒤 세수도 않고 머리도 안 빗으며 9년 동안을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기껏 세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사랑을 나눴을 뿐인데도 무려 9년간이나 시묘를 살았다.
허벅지에 쑥뜸을 떠서 역병인 것처럼 속여 수절했던 기생은 있어도 여자의 생명인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은 홍랑 말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를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고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오늘날에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홍랑은 임종할 때에 ‘나를 님 곁에 묻어 주오’ 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도 그녀의 정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선산에는 조선 선조 때, 기생 홍랑이 묻혀있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한 조선시대, 기생은 노비나 다름없는 천민 신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생 홍랑은 어떻게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그것도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묻힐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진실하고 애절한 사랑의 힘이었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랑과 최경창은 영원을 함께 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최씨 문중과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당시 풍류를 읊조리는 자리에서는 시를 논하고 가무에 화창하여 어울리면서도 화류계 여자라고 배척하고 양반 적서의 차별이 심하고 겨우 첩실(妾室)로나 받아들이던 사회에서 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에 받아들여진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25. 9. 8 파주에 있는 최경창과 홍랑의 무덤을 찾아 갔으나 주변이 운정신도시로 변해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잘 모셨겠지 생각하면서 쓸쓸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첫댓글 상세하게 잘보고
갑니다.
묘지를 옮기지는 않았을 터인데 궁금
하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