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집
곽 흥 렬
무덤은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경전이다. 그것은 상형문자보다도 단순하면서 백유경百喩經보다도 복잡하다. 초등학교 국어책보다도 쉬우면서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보다도 난해하다. 그래서 누구든 눈으로 읽기는 만만해 보이겠지만, 누구도 가슴으로 풀이해 내기는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아니, 어쩌면 아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노를 저어가다 보노라면 공연히 세상살이가 시틋해지는 날이 있다. 심사가 산란하여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도 있다. 이런 날들이면 그 불가사의한 경전을 해독해내 보려는 가당찮은 욕구가 고개를 든다.
버릇처럼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벌써부터 마음 가운데 점찍어 놓았다. 그러니 오늘은 또 어느 갈래로……, 갈등하며 망설일 필요 없어 그만이다. 그 목적지란 다름 아닌, 산자락에 고이 잠든 채 영원 세월을 꿈결로 흐르고 있는 무덤이다. 지난날 한 이름난 산꾼은 왜 산을 찾느냐는 후원자의 질문에 “거기 산이 있어서”라는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남겼다지만, 똑같은 질문을 누가 내게도 던져온다면 내 입에선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기 무덤이 있어서’라는 답변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어느 종교의 고상한 교리보다, 그 어떤 철학자의 고명한 명제보다 가슴을 적셔 오는 절실한 가르침을 무덤에서 만난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선 언어 이전의 세계다. 이따금 무덤 앞에 서게 될 때면 어쩐지 뒤죽박죽으로 엉클어진 감정의 실타래가 어렴풋이나마 풀리는 것도 같고, 삶이라는 막연한 숙제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화두에 대한 답이 병아리 눈물만큼은 구해지는 성도 싶다.
이럴 때 내가 항시 찾는 곳은 묘지가 아닌 무덤이다. 누군가 시시비비 가리길 좋아하는 사람이 나서서 묘지가 곧 무덤 아니냐며 정색을 하고 따지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딱히 마땅한 대답의 말이 궁해지겠지만, 내게는 억지스레 두 대상을 구분하고픈 되지도 않은 고집 같은 것이 있다. 굳이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한자어와 고유어에서 풍겨 나오는 어감상의 차이라고 해 둘까.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 속담이 혹여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생겨난 말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맛깔스러운 관용구 하나가, 어쩌면 언어의 유희처럼 들릴 법도 한 내 논리에 든든한 응원군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비록 외연적 의미는 엇비슷할지라도 내포적 의미는 사뭇 다를 수 있는 것이 우리말의 묘미 아닌가. 심지어 똑같은 표현일지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혹은 받아들이는 이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전달되는 느낌은 완전히 딴판일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대놓고 딴죽을 걸어 오지는 못하리라.
묘지와 무덤이 바로 그런 사이일 터이다. 묘지가 항시 육중하게 닫혀 있는 대갓집 솟을대문 같다면, 무덤은 늘 빼쭈룩이 열려 있는 여염집 사립문 같다. 검붉은 대리석 빗돌이 황금빛 석양에 번들거리고 가지가지 석물들이 호위무사처럼 떡하니 버티고 선 묘지에서는 호화스럽게 꾸며 놓은 으리으리한 저택을 치어다볼 때 같은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키 낮은 무덤은 동그스름한 봉분이 지난날 우리 고향의 초가집을 닮아 너무도 소박하고 인간적이다. 길 솟은 풀숲을 헤치며 가만히 그 곁에 가까이 가노라면 살가운 미소로 맞아주는 듯 친근감마저 든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사코 묘지는 외면하고 무덤만을 찾게 만드는 이유이다.
무덤 가운데도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내려앉은 무덤은 더더욱 다감하게 다가온다. 그 집의 주인과 세월을 뛰어넘어 영혼의 대화를 나눠 보고픈 마음이 충동질을 한다. 어쩐지 이야기가 통하고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들이 내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어떤 사연을 전해주고 싶은 것일까. 내가 그들에게 던지는 어설픈 수작酬酌을 기꺼이 받아줄까. 가슴 깊이 품은, 죽살이의 수수께끼에 대한 내 고뇌를 그들이 헤아릴 수 있으려나. 이런저런 엉뚱스러운 상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어렸을 적에는 무덤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었다. 달걀귀신 이야기가 밤중의 뒷간 분위기를 으스스하게 만들던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누구 없이 얼마큼씩은 그랬을 터이지만, 유달리 무덤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숫제 병적일 정도였다. 제법 나이 들어서까지 한갓진 곳으로의 산행을 꺼려한 것 역시, 도중에 혹여 무덤이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 조바심이 항시 그림자처럼 머릿속을 지배했던 까닭이다.
이따금 땔나무 구하러 가는 아버지 따라 산을 찾게 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당신께서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하필 꼭 집단무덤 자리 쪽으로 방향을 잡곤 하셨다. 나는 나무하는 내내 나무는 뒷전이고 줄남생이처럼 아버지 꽁무니에만 졸졸 붙어 다녔다. 갑자기 무덤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귀신이 사정없이 뒷덜미를 후려칠 것 같은 공포감으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해 두 해 감기어 가는 나이테 덕분인가 보다. 한때는 그리도 무섭게 여겨졌던 무덤이, 이제는 외려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든다. 무덤을 만나는 날은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없다. 꼭 이웃집에, 건넛마을에 놀러 온 기분이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무덤 앞에 설 때면,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던지는 이 통절한 메시지가 가슴을 친다.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를 지녔다 한들 세상 그 어떤 존재가 여기 무덤의 주인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야말로 죽살이의 엄숙한 철리哲理이거늘, 내일의 내 집에 와서 무섬증을 갖는다면 도리어 별스러운 일이 되리라.
옹기종기 어깨를 나란히 한 무덤들에 눈길이 간다. 앞가슴에 단 이름표처럼, 봉분 하나하나마다 키 작은 빗돌 하나씩이 올망졸망 세워져 있다. 산 사람에게 주민등록이 주어지듯 여기 이 빗돌들은 죽은 이에게 부여된 그들의 주민등록이다.
발치에 선 빗돌의 글귀를 찬찬히 훑어본다. 언제 세상에 왔다가 언제 이리로 이사를 하여 이 마을의 주민이 된 것일까. 무슨 고고학자라도 되는 양 한 자 한 자 손끝으로 짚으며 훑어 내려간다. 그러고 있노라면, 마치 마음 맞는 이들끼리 동호인 주택을 지어 살아가는 것 같은 현현한 분위기에 젖어 든다. 오래 이웃하고 지내도 고함 한 번 나지 않아 참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이다. 낮이나 밤이나 도란도란 주고받는 소리 없는 목소리가 산새들의 합창에 섞이어 가없는 시간을 흐르고 있으리라.
어쩌다간 멀찍이 외따로 떨어진 무덤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 무덤의 주인일수록 대다수 망주望柱는커녕 흔하디흔한 상석조차 얻어걸리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잡풀들만 우북하게 키우기 일쑤다. 그 모습이 꼭 외딴집에서 홀로, 저무는 세월과 씨름하고 있는 호호할머니같이 쓸쓸하고 고단해 보인다. 그럴 땐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듯 조곤조곤 말보시라도 해드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얼마나 이웃이 그립고 대화가 고팠을까, 하는 어쭙잖은 연민으로 가슴이 짠해져서이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가르친다. 천년만년 영원할 줄 알고 그동안 얼마나 서로 날을 세워 다투고 미워하면서 업을 쌓아 왔던가. 화해해라, 그리고 용서를 배워라. 죽음의 예비군인 우리를 향해 던지는, 죽은 이의 육신으로 쓴 편지를 무덤에서 읽어낸다. 살아서는 아무리 칼을 품고 이를 갈았던 철천지원수 지간이었다 해도 죽음이 그 반목과 증오심을 죄 거두어 갈 수 있다. 아니 거두어 가야만 한다. 죽음으로써 화해 못 할 갈등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죽음으로써 용서되지 못할 사연이 또 뭐가 있을 것인가. 우리네 삶에서 죽음이라는 이 필연의 현상보다 더 절실하고 구극적究極的인 명제는 결코 존재할 것 같지 않아서이다.
백 년을 채 채우지 못한 채 꺼지고 마는 것이 생자들의 집이라면, 천 년을 길이 머물게 되는 것이 사자들의 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덤을 일러 ‘천년집’이라고 불러 온다. 천 년, 그저 관념 속에 머무는 참 아득한 시간이 아닌가. 아니, 꼭 천 년이라기보다는 가없는 세월을 에둘러 일컫는 이름일 터이다.
내일이면 주인공이 될 이 영원한 안식의 고향 앞에서, 나는 오늘 천 년의 삶을 설계한다.
<- 제9회 김규련수필문학상 대표수상작>
첫댓글
심오한 글에 머물면서,
여러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글에서 처럼,
무덤은 서민 동네 같습니다.
무덤은 높아 보이지도 않고,
편편하게 살다 간 이웃 같습니다.
꽃무덤, 돌무덤 등이 있기도 하지요.
묘지하면, 어느 유명인의 현관 문패 같아
고급 아파트의 빼곡함 같습니다.
후손들이 만드는 것이니...
죽은 자는 말이 없지요.
삶에 대한 자락으로,
무심히 지날 무덤 옆에서도
사유 하는 모습이 진지 하셔요.
글, 감사합니다.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 명언이 있지요. 우리말로 풀이하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삶을 보다 값지고 보람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죽음을 통해서 깨닫는 삶의 엄숙성'이라는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고자 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겠지요.
막바지 여름나기 잘 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무덤 이라는 주제로 글을 접 하기는 처음이지 싶습니다.
토지 관련 일을 하는 저에게도 무덤은 낯설지 만은 않습니다.
한 번은 잃어버린 무덤을 찾는 어떤 분의 무덤을 찾아 드린 적 있어요.
그 전엔 저 또한 일반인과 다르지 않게 조상 무덤 아닌 낯선 무덤은 무섭고 피해만 다녔는데
가끔 산행을 하다 만나는 백 년은 됐음 직한 봉분이 내려앉은 무덤을 보면 저 분은 어떤 세월을 사셨을까? 궁금해 하며,
혼자 말로 편안하십시요. 하고 말 보시를 하고 잠시 서서 보게 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젠 장묘법이 강화되어 매장 허가를 받기 힘들 다더군요.
깊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토지에 관련된 일을 하신다니 무덤을 접할 기회가 많으신가 봅니다.
저가 어느 글에서 우리 산 자들을 두고 '죽음의 예비군'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무덤이 그들의 머잖은 보금자리이겠지요.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지금 주어진 삶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내어야겠다는 다짐을 갖게 됩니다.
잘읽고 갑니다.
마치 죽은자와 산자의 화해를 주문하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는 문단에 그런 생각을 담았습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살이임에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는 데서 모든 불행은 싹트는 것이겠지요.
작가님 글은
역시 다릅니다
저도 열심으로 써보겠습니다
선생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나 보지요.
열심히 쓰시겠다니 마음속으로 박수 치며 응원을 보냅니다.
'메멘토 모리' 지금은 일상처럼 생활속에
파고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