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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묘화(點描畵)
이종원
집 안으로 들어서던 남자는 현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실내용 가죽슬리퍼를 멍하니 바라본다. 슬리퍼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 벗어둔 그대로 신발 한 짝이 천정을 향해 엎어져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안의 인기척을 살펴본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구두를 벗는 것도 잊은 채 남자는 한참을 우두커니 벽에 기대어 있다.
오늘도 아내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출입등이 꺼진 뒤에야 남자는 비척비척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루 종일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아파트 안은 모래사막처럼 발밑이 푹푹 꺼지는 것 같다. 무리에서 낙오된 늙은 낙타처럼 느릿느릿 거실을 가로질러 간 남자는 온 몸의 힘이 빠진 듯 소파 위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낮 동안 후덥지근하게 달궈져 있던 공기가 들러붙어 신경을 건드리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 눈을 감은 채 시체처럼 널브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의 겨드랑이가 땀으로 젖어간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냉면을 먹으면서도 땀을 흘리게 된 남자의 몸에 저녁 내 불콰하게 마신 술기운이 열기를 부채질 한다.
와이셔츠 깃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은 뒤에야 남자는 간신히 정신을 추슬러 몸을 일으킨다. 에어콘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거실 천정의 공조기가 제 할 일을 찾았다는 듯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로 냉기를 쏟아놓는다. 등받이에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남자는 거실 한쪽에 걸린 벽시계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새벽 한 시, 아내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방황하던 남자의 시선이 시계 겉유리에 쓰인 글귀에 잠시 멈춘다. ‘축 결혼 1997년 3월 둔덕베이커리 직원 일동.’ 시계는 이십 년 전 남자의 제과점 동료들이 신혼부부의 집들이 선물로 사 온 것이다. 결혼할 때 장만한 시계가 있었으므로 남자는 선물 받은 벽시계를 신혼집 신발장 위에 걸어 두었다. 젊은 시절 남자는 시계바늘이 새벽 5시를 지나기 전에 직장으로 출근했고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저녁 10시가 넘기 전에 집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이웃들에게 성실하다는 평판을 들을 만한 사람이었다. 방 두 칸짜리 다세대주택의 신발장 위에 걸렸던 시계는 24평 주공아파트와 48평 브랜드아파트를 거쳐 지금 살고 있는 65평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로 옮겨 왔다. 집이 넓어질 때마다 대부분의 가전제품들도 새것으로 바뀌었지만 웬일인지 아내는 그 시계만은 버리려 하지 않았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남자가 탁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길게 드러눕는다. 남자의 발에서 시큰한 땀 냄새가 풍겨 나온다. 어쩌면 냄새의 진원지는 남자의 발치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컵라면 용기일 지도 모른다. 아내가 없는 동안 남자는 매일 아침 컵라면으로 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먹고 남은 용기는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탁자 위에 방치해 두었던 컵라면에서는 며칠 지나지 않아 허연 곰팡이가 폈다. 빈 컵라면 용기를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 남자는 알지 못했다. 급한 대로 라면국물은 화장실 변기 안에 쏟아 버렸지만 사발 크기나 되는 스티로폼 용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에 대해서는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주방 어딘가에 아내가 사다 놓은 쓰레기봉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느 서랍에 처박혀 있는지 남자가 알 리 없다. 내일은 퇴근할 때 꼭 쓰레기봉투를 사와야지. 어제도 그 전날에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자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당장 처치 곤란한 쓰레기뿐만 아니라 아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게 된 뒤로 남자는 하루아침에 엄마젖을 떼인 어린아이처럼 매사에 허둥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아침마다 드레스룸에서 구김 하나 없는 와이셔츠를 골라 입고 나가도, 하루 한 번씩 반짝반짝 윤이 나게 구두를 닦아 신어도 남자의 일상은 건전지가 닳은 시계처럼 조금씩 엇박자를 낸다. 아내가 집을 나가버린 후 남자는 사업상 중요한 손님과 만난 자리에서도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곤 한다. 허허,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시는 걸 보니 요즘 늦게 들어온다고 사모님한테 한 소리 들으신 모양이죠? 하긴 뭐 우리 최 사장님이야 여수 사람들이 다 아는 애처가시니까요. 별 것 아닌 우스갯소리에도 남자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떤 사내도 아내의 부재를 완벽하게 감출 순 없다. 설마 상대가 아내의 부재를 알 리 없건만, 안다 해도 뒷말을 하고 다닐 만큼 경박한 사람도 아니건만 남자는 그때마다 황급히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더 호기롭게 술잔을 치켜든다.
술에 취할수록 남자는 아내의 부재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내는 대체 내게 무슨 불만이 있는 걸까.
‘며칠만 내게 주는 휴가라고 생각해줬음 좋겠어요. 생각이 정리되면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내가 남겨 놓은 쪽지의 의미를, 남자는 종내 짐작할 수가 없다. 아내는 일주일 전 아무 예고도 없이 쪽지 한 장만 남겨 놓고 집을 나가버렸다. 아내는 그 동안 전화 한 통 걸어오지 않았다. 남자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그럴수록 남자는 애가 단다. 남자의 일상은 모든 것이 아내와 연결돼 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남자를 위해 밥을 짓고 옷을 세탁하고 집을 청소하고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심지어 다 먹고 난 컵라면 용기를 버리는 일들은 오롯이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마치 집안일에 맞춰 프로그래밍 된 가사 로봇처럼 무엇 하나 빈틈없이 남자를 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고, 그 덕분에 남자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내의 부재는 그토록 단단해 보였던 남자의 일상을 아주 간단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내는 왜 그런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간 걸까. 남자는 납득할 수가 없다.
마뜩찮은 얼굴로 시계를 노려보던 남자는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목록을 들여다본다. 어제 하루 통화를 했던 수십 개의 전화번호들이 남자의 액정화면에 좌르륵 펼쳐진다.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중견 사업가답게 남자는 하루 종일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또 그만큼의 전화를 받는다. 도시의 유력인사들 가운데 남자의 전화번호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얼굴은 모른다 해도 남자의 이름 석 자를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라면 필시 그 자신이 변변찮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남자가 여수를 대표할 만한 지역유지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공한 사내들 사이에서는 그들끼리만 통하는 룰이라는 게 있다. 명문화돼 있지 않을 뿐이지 지역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엄연히 그 보이지 않는 룰이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지역 유지들과 이따금 소소한 안부 전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사업에 힘이 된다는 걸 남자는 알고 있다. 특별히 모나지 않게 행동하는 한 남자와 남자의 사업 역시 그 룰에 의해 보호되고 성장해 나갈 것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룰을 컨트롤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남자의 일상은 그 꿈에 맞춰져 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일삼아 유력인사들의 안부를 챙기고 이런 저런 술자리에 불려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과정일 뿐이다.
에어콘 바람이 잠깐 사이에 남자의 몸을 차갑게 식힌다. 하지만 헐떡거리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가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남자의 입에서 술 비린내가 섞여 나온다. 남자의 뱃구레는 잔뜩 바람을 불어넣은 고무풍선 같다. 이십 년 사이에 남자의 몸무게는 삼십 킬로나 늘었다. 남자는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처럼 눈을 어지럽히는 통화목록들 사이에서 한참만에야 아내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남자의 목울대로 침이 꿀꺽 넘어 간다. 총 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살 수가 있다는 게 이상해. 아내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컬러링 노래를 남자는 묵묵히 듣고 있다. 하지만 짙은 허스키 보이스의 여가수는 오늘도 끝내 아내를 불러내 주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탁자에 던져버리고 남자는 다시 소파에 드러눕는다. 무심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의 시선이 이번엔 거실 벽에 걸린 그림 위에서 머뭇거린다. 선을 그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점들을 찍어 형체를 표현한 그 그림은 몇 달 전 아내가 완성한 점묘화(點描畵)이다. 미술에는 전혀 문외한인 남자는 쌀알만 한 작은 점(點)들로 여수의 명물인 돌산대교의 형체를 그려낸 아내의 그림을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멋지긴 한데 어느 세월에 저 많은 점들을 일일이 찍고 앉았어? 그림 하나 마치려면 한 몇 달은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어야겠더만.” 그때만 해도 아내는 얼핏 웃음을 보였던 것 같다. “점묘화는 선과 면이 아니라 수많은 점으로 색과 형태를 표현하는 게 매력이래요.” “근데 어느 세월에 그걸 다 찍고 앉았냐구.” “빨리 그려 뭐하게요. 그런 게 점묘화를 그리는 묘미인 걸요. 물감들이 섞이면 빛을 흡수하기 때문에 밝기가 낮아지고 탁해져요. 반대로 빛은 섞을수록 밝아지구요.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색이 반사하는 빛 때문에 보는 사람은 여러 색이 섞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대요.” “아무튼 신기하긴 하네. 미술학원 다니더니 이제 제법 화가가 다 됐어. 응?”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아내가 결혼 전에도 그림을 그렸던가, 남자는 알지 못한다. 일 년 전 아내가 그림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부부 사이엔 어떤 균열의 조짐도 없어 보였다. 딱히 가정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남자는 평균 이상으로 성실한 가장이었고, 결혼 이후 여태껏 여자 문제 따위로 속을 썩인 일도 없었다. 남자의 사업은 해가 다르게 번창했고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늘 쓰고 남을 만큼 넉넉한 생활비를 갖다 주었다. 그런 남자들이 다른 여자한테 한번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린대요. 최 장로님 정도 되는 남자면 여자들이 먼저 달려들 만하잖아요. 간수 잘하셔야 해요 사모님. 집에 놀러왔던 교회 여자들이 어쩌다 악의 없는 농담이라도 건네면 아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빙긋이 웃기만 했다. 부부는 이 아파트 단지, 아니 도시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들만큼 완벽해 보이는 한 쌍이었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믿었다.
이십여 년 저쪽의 어느 봄날, 진열대 앞에서 빵을 고르던 여대생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 후로 남자는 한 번도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다. 결혼 전에는 그녀와의 결혼이 목표였고, 제과점 동료들의 표현대로 ‘기적처럼’ 그녀의 마음을 얻은 뒤에는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었다. 아내가 자신이 일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사실에 남자는 단 한 번도 회의를 갖지 않았다. ‘시다’로 근무하던 대학교 앞 제과점에서 코스모스처럼 가녀린 몸매를 가진 여자를 본 순간부터 남자는 아내만을 사랑했다.
아내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남자가 근무하는 대학교 앞 제과점에서 빵을 사가던 단골손님이었다. 남자는 아내가 대학 신입생일 때 운명의 상대를 처음 만났다. 여자가 2학년이 됐을 때 남자는 반죽을 담당하는 ‘주단빠’로 승진했고 졸업반이 되었을 때는 빵을 성형하는 ‘주마리’로 승진해 있었다. 직급이 오를 때마다 40만 원씩 월급이 올랐지만 고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남자에게 여자는 여전히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다. 남자는 매장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채 식지도 않은 빵 쟁반을 들고 나가 하릴없이 주위를 서성거렸다. 여자도 자신을 바라보는 제과점 남자의 애틋한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빵을 사러갈 때마다 주인 몰래 덤 하나라도 얹어주던 남자의 호의에 여자는 언제부턴가 엷은 미소로 답해 주었다. 어렵사리 데이트를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남자는 거짓말처럼 여자의 구혼 허락을 받았다.
남자가 다니던 둔덕베이커리 사장은 지금껏 수많은 직원들이 우리 가게를 거쳐 갔지만 여대생을 낚은 건 자네가 처음이라며,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남자에게 선뜻 제과장 자리를 맡겼다. 직원 네 명의 작은 빵집이라 해도 그 동안 보여준 남자의 성실성과 제빵 기술아 아니었다면 생각하기 힘든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제과장이 된 후에도 남자는 직원들 누구보다도 일찍 나와 공장 문을 열었고 퇴근 후에도 제과서적을 들여다보며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렸다. 제 아무리 목이 좋은 대학가 빵집이라 해도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만한 매출을 올리기 힘들 거라던 사장의 격려가 꼭 빈 말만은 아니었다. 세상에 기댈 곳 없던 남자는 자신의 노력만이 성공으로 향하는 길임을 누구보다 일찍 알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곱절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매섭게 다그치며 살았다.
결혼 후에도 대학교 앞 빵집에 근무하던 남자는 몇 년 뒤 그 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개발 붐이 한창이던 여수 외곽의 아파트 단지 앞에 자영 제과점을 차렸다. 빵 만드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지만 남들보다 장사에 소질이 있다는 건 남자 역시 가게를 오픈한 뒤에야 알았다. 남자네 제과점에 한 번 왔던 손님은 단골이 됐고 다음번에 올 때는 꼭 다른 손님을 데리고 왔다. 상냥하고 부지런한 신혼부부가 운영하는 동네 빵집을 마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입주민이 늘어나면서 장사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됐다. 가게를 연지 삼 년 만에 근처에 분점 하나를 더 냈고, 또 사 년이 지나는 사이 분점은 세 개로 늘었다. 남자는 매일 새벽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제과점으로 출근했고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남자는 행여 늦잠이라도 자게 될까봐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가는 것조차 삼갔다.
그랬던 남자는, 공장에 들어온 재료 하나까지도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던 남자는 이제 조그만 움직임에도 숨을 헐떡거리며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거린다. 남자의 허리둘레는 진즉에 사십 인치를 넘었고, 드레스룸을 채운 어떤 명품 양복을 입어도 앞섶이 벌어질 만큼 비대해졌다. 결혼할 때에 비해 삼십 킬로 가까이 살이 찐 남자의 목덜미는 이제 사시사철 땀에 젖어 번들거린다. 눈에 띌 만큼 수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손님들에게 인상 좋다는 말을 들을 만큼은 됐던 남자의 얼굴은 살에 파묻혀 젊은 날의 윤곽을 잃었다.
오래 전 여수엑스포를 홍보하는 특집프로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남자는 제법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국으로 방영된 그 프로에서 남자의 제과점은 ‘튀김소보로’가 맛있는 빵집으로 소개되었다. 방송이 나간 뒤 미식가로 이름난 유명 블로거들이 남자의 가게를 다녀갔고, 서글서글한 주인남자의 환대에 감동한 그들은 남자의 빵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엑스포가 개막하기 전부터 여행객들에게 남자의 제과점은 ‘여수에서 꼭 한번은 가봐야 할 맛집’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남자가 지역 언론에 의해 전도유망한 향토기업가 소리를 듣게 된 건 가맹사업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였다. 방송 이후로도 크고 작은 여행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게 남자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가맹점을 내기 원하는 이들이 돈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남자는 흔치 않은 기회를 앞에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 고민은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었다. 남자는 작은 제과점 몇 개에 만족할 만큼 배포가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곧 본점 근처의 허름한 건물을 빌려 양산설비를 갖추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불과 일 년 사이에 남자의 제과점 이름을 단 빵집들이 시내 요지에 여섯 개가 생겼고, 제품만이라도 공급받기를 원하는 여수 근교의 제과점들이 열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았다. 가맹점들도 남자의 행운을 나눠 가졌다. 집들이 때 시계를 사들고 왔던 남자의 선후배들도 남자의 제과 공장에 직원으로 입사했다.
남자는 이제 공장에서 빵을 굽는 대신 시내 요지에 문을 연 가맹점 관리에 힘을 쏟았다. 더 이상 비좁은 공장 안에서 반죽을 치댈 필요가 없어진 남자는 말끔한 양복차림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점포들을 돌며 매출을 살피고 신제품 개발을 독려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히는 술 약속 때문에 허리둘레가 눈에 띄게 굵어지기 시작했지만 새로 시작한 가맹사업 때문에 정신이 없던 남자는 살을 빼는 대신 해마다 양복을 새로 맞추는 쪽을 택했다.
여수엑스포가 본격적으로 개막하면서 남자의 사업은 더욱 탄탄대로를 달렸다. 해마다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남자의 제과공장은 매출이 몇 배로 뛰었다. 그 즈음 여수를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엑스포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관광객들이 저마다 남자네 상호가 찍힌 빵 보따리를 들고 기차역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자고 나면 돈이 들어왔고, 돌아서면 다시 돈을 셌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남자는 한 지역에서 제과사업으로 벌 수 있는 한계치의 돈을 벌었다. 남자는 그 돈으로 다시 시내 여러 곳에 건물을 샀다. 남자와 안부전화를 나누게 된 지역의 유지들이 넌지시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또 몇 해가 지나는 사이에 남자는 부동산 관리 직원을 따로 두어야 할 정도로 남부럽지 않은 부를 축적했고 지역사회가 인정할 만한 중견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남자의 곁에는 꼭 그만한 성공담을 자랑하는 이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줄곧 남자의 아내로 살았다. 남자가 처음 시 외곽에 열 평짜리 제과점을 차렸을 때는 군말 없이 매장의 카운터 일을 보았고, 분점이 생겨난 뒤로는 각 매장의 매입과 매출을 직접 관리했다. 빵을 굽기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남자를 위해 여자는 언제나 한 시간쯤 먼저 일어나 밥을 새로 짓고 국을 데워 놓았다. 제과기술자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후로 여자는 남자의 시간에 맞춰 자신의 욕망을 졸라매기로 작정했다.
남자는 몰랐지만, 만약 미리 알았더라면 남자의 프러포즈가 몇 달쯤 앞당겨졌을 수도 있겠지만 여자 역시 남자의 변함없는 성실함에 끌려 보잘 것 없는 고졸 출신의 제과기술자에게 마음을 열었다. 성공을 위해 한 눈 팔지 않고 달려가는 남자의 강인한 생활력이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언젠가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남자가 여자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내 삶의 목표는 성공해서 당신을 원 없이 호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하마터면 여자는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남자가 약속한 호강이 어떤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자신을 얼마쯤은 대견하게 여겼고, 남자가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보내준 천생의 연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자에게는 친정이 없다. 여자의 양친은 그녀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친지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교통사고로 한 날 한 시에 숨을 거뒀다. 부모의 귀가를 기다리던 여자는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됐다. 장례를 치른 뒤 미성년 여자 조카를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이모가 여자를 따로 불렀다. “암만 해도 가이내 혼자 으뜨케 살라냐. 암말 말고 이모 따라 여수로 내려가자잉?” 여자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상 여자도 서울에 혼자 남기가 무서운 건 매일반이었다. 서울내기 여고생은 그렇게 해서 여수시 근처에 있는 소읍으로 전학을 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이모집에서 멀지 않은 둔덕동의 한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너 대학 갈라냐?”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모가 물었다. “뭘 하든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라믄 가이내야, 너 옛날부터 그림 그리는 학교 가고 싶다고 안했냐?” “미대 들어가면 돈이 많이 들어요.” “얼마나?” “서울 전셋집 뺀 거 다 써도 모자랄 만큼요” “아이고매, 먼 놈의 학교가 돈 잡아먹는 귀신이다냐. 난 몰르겄다. 니가 알아서 혀.” 아직 홀로 설 준비가 안 돼 있던 조카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사려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이모는 오갈 데 없는 조카를 대학 시절 내내 품에 거둬준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자는 사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모자라는 학비는 부모님이 남기고 간 전셋돈을 조금씩 헐어 썼다. 순수미술 대신 산업디자인을 택한 여자는 졸업과 함께 독립할 수 있는 돈을 모으는 것이 시급한 목표였다. 그 시절 여자는 학교 앞 작은 빵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날이 많았다. 빵으로 점심 한 끼를 해결한다고 해서 큰돈이 모아질 리도 없겠지만, 밥 보다 빵을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렇게 절약한 시간으로 간신히 저녁 타임에 아르바이트 하나를 더 맡을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자는 학교 앞 빵집에 들릴 때마다 자신을 훔쳐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꼈다. 배꽃처럼 눈이 맑은 남자였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공장 안으로 몸을 감췄다가는 멀어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곤 했다. 일 년쯤 지난 뒤 용기를 낸 남자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붙여왔다. “우리 가게서 이번에 새로 만든 신제품인데 맛이 어떤지 시식 평이나 한마디 해주세요.” 빵을 베어 먹어 본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맛이 괜찮으니 틀림없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남자는 꼭 신제품이 아니더라도 빵집에 갈 때마다 눈치껏 무엇 한 가지를 들고 나와 봉투 안에 넣어 주고는 수줍게 뒤돌아섰다.
배꽃을 닮은 남자는 어느 날 여자의 손에 빵 대신 연분홍 편지봉투 하나를 쥐어주었다. 썩 훌륭한 문장력은 아니었지만 한 남자의 진심이 담긴 연서였다. 남자는 자신을 고아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연등동에 있는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남자는 또 편지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치고 선생님 소개로 제과점에 일자리를 얻게 된 경위와 자신이 현재 제과기술자라는 직업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었다. 편지를 읽어내려던 여자는 여섯 살이 되던 해 남자가 엄마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들어서던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말았다. 남자의 외로움이 외로운 여자를 울렸다.
남자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자는 답장을 대신했다. 고아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나면 남자는 누가 보아도 꽤 반듯한 성품을 가진 사내였다. 남자는 어떤 일을 만나도 괜스레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고, 누구를 만나도 구김살 없이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공에 대한 의지가 남다른 것도 사내라면 마땅히 갖춰야할 덕목이었다. 남자를 만날 때마다 여자의 마음에는 남자에게로 향하는 새로운 길이 났다.
일 년 여의 달달한 연애 끝에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후 여자는 기꺼이 남자의 그림자가 되었다. 남자의 바람대로 여자는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았다. 대신 여자는 새벽 일찍 출근하는 남자를 위해 따뜻한 아침을 먹이고, 매일 새벽 큰 길까지 따라 나가 남자를 배웅했다. 남자가 없는 낮 시간 동안에도 간단한 부업거리를 찾아 하루 종일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그리고도 남자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늦지 않게 버스정류장으로 남자를 마중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을 헛디디거나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저만큼 우두커니 서 있는 아내를 발견하고 배꽃처럼 활짝 웃는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아 그랬던 것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눈물이 날만큼 행복했다. 적어도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둘 사이에 연년생으로 아이가 생겼다. 둘 모두 남자를 닮아 배꽃처럼 환한 미소를 가진 사내아이였다. 여자는 아이들이 아무리 아파도 남자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불덩이처럼 열이 오른 아이를 등에 업고 팔에 안고 뛸망정,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결혼 사년 만에 남자가 직접 제과점을 차린 뒤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두 아이를 이웃에 맡기고 제과점으로 출근하는 남자를 따라 나섰다. 직원이라야 남자의 고아원 후배 둘이 견습생으로 있는 작은 빵집이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남자는 거의 매일 혼자서 수십 가지나 되는 빵과 과자를 빚어 오븐에 구워냈다. 하루 온종일 좁은 공장 안을 떠날 새 없는 남자가 안쓰러워 여자는 빵이 알맞게 식으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빵을 나르고 손님을 맞았다. 여자는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한 자신의 남자가 믿음직스러웠다. 저렇듯 고생하는 남자가 안쓰러워서라도 하루 빨리 그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성공의 그날을 바랐다.
다행히도 제과점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단골손님들이 늘어나면서 제과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점도 새로 냈다. 몇 년 사이에 남자네와 같은 상호로 가맹점을 내기 원하는 이들도 여럿 생겨났다. 매입매출을 관리해야 할 가맹점들이 계속 늘어나자 여자는 주저 없이 가정으로 돌아왔다. 남자의 사업에 그녀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전문적인 회계 지식이 필요해진 까닭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아이들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여자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게 자란 아이들은 공부에 한이 맺힌 남편의 고집대로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기숙형 사립학교가 있는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방학을 맞아 돌아오는 아이들의 보금자리는 여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부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온 세상의 여자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만 했다.
지난해는 결혼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있었지만 사업 때문에 남자는 자리를 오래 비울 형편이 못 되었다. 아니, 꼭 사업이 아니더라도 남자에게는 항상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남자는 집에서 사십 분쯤 걸리는 돌산도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 기념 이벤트를 대신했다. 여자는 그만 해도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줄 사람이었다. 펜션으로 가기 전에 남자는 맛집으로 유명한 국동의 한 식당에 들러 여자에게 갯장어정식을 사주었다. 이게 남자들 정력에 그렇게 좋다면서요? 남자의 수저 위에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갯장어를 올려주며 수줍게 웃던 여자는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워 남자를 흐뭇하게 했다. 그날 밤 남자는 오랜만에 여자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베란다에 서서 바다 위에 그림처럼 떠 있는 돌산대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A자 모양을 닮은 돌산대교의 붉은색 주탑 아래로 몇 척의 배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3월 초순의 바닷바람이 아직은 꽤 서늘해 보여 남자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흰색 스웨터를 가져다 아내에게 걸쳐주었다. 남자는 모처럼 느긋한 기분이 되어 돌산 앞바다의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문득 여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남자에게 어깨를 기대왔다. “나야 말로 당신에게 고맙지. 늘 얘기하지만 내 일생의 목표는 남부럽지 않게 당신을 호강시키는 거야. 그걸 위해 지금껏 죽기 살기로 달려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야.” 자신의 외로움을 보듬어준 여자, 자신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 온 아내를 향한 남자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그저 나만 믿으면 돼. 이 최의석이, 꼭 보란 듯이 성공할 테니까.” “이만해도 성공한 걸요.” “아직은 아니지. 이제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여기까지 올라와서 멈출 순 없어.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지켜보기나 해.” “지금도 난 더 이상 부러운 게 없어요.” “아직 나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많아. 세상 여자들 모두가 당신을 부러워하고, 세상 남자들이 모두 당신을 우러러 보게 만들어 줄 테야. 당신은 그저 나만 믿고 지켜봐주면 돼.” 어깨에 기대 있던 아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남자는 끝내 알지 못했다.
남자의 말처럼 그의 일상은 점점 더 바쁘게 돌아갔다. 여수 이외 지역에 가맹점을 개설하기 위해 전에 없이 이곳저곳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일이 잦아졌고, 밤늦도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과 술자리를 갖는 일도 많아졌다. 남자의 양복주머니에서 지역 정가의 브로커로 알려진 이들의 명함이 나온 것도 어려 번이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남자는 매일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침대 위에 널브러지는 남자의 몸에서 옷을 벗겨낼 때마다 여자는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농도는 날이 갈수록 짙어졌지만 여자는 끝내 남자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내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싶은 남자 역시 집에 들어오면 바깥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그러기에는 매일 밤 너무 술에 취해 돌아왔지만, 설령 덜 취했다 해도 당분간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려던 마음을 바꿔 먹었을 리도 없지만.
남자가 벌써부터 다음번 공천을 받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를 여자는 교회 여자에게서 들었다. 우리 애아빠 하는 말이 최 장로님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대요. 여수에서야 공천만 받으면 의원 자리는 따 논 당상인데,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교회 여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베갯머리에서 남편으로부터 남자의 공천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들은 온 세상의 여자들이 벌써부터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여자는 그때마다 서늘한 웃음으로 공허한 마음을 가렸다.
그 즈음 여자는 의사에게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병원에 다녀온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저렇듯 성실한 남편을 두고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말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 몰래 우울증 약을 먹는 대신 여자는 기분전환을 위해 취미활동을 해보라는 의사의 권유대로 미술학원에 다니며 오래 전에 손에서 놓았던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여자는 하루하루 커다란 화면에 깨알 같은 점을 찍으며 남자 아닌 다른 세상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총 맞은 것처럼’ 뻥 뚫린 여자의 가슴은 끝내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다.
아내는 대체 무엇이 불만인 걸까. 남자의 머릿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생각들이 맴돌다 간다. 하지만 남자의 기억은 항상 가시덤불 속을 헤매던 집토끼처럼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를 지났다. 남자는 안압 때문에 지끈거리는 눈동자를 손등으로 쿡쿡 눌러본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남자의 피로를 짐작케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남자는 늦잠을 자본 적이 없다. 전날 밤 아무리 늦게 잠이 들어도 자명종이 울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긴긴 하루를 시작했다. 덕분에 남자는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벌였고, 누구보다 많은 것들을 손에 쥐었다. 남자의 오늘은 그의 과거가 쟁취한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세상의 많은 것을 가진 남자는 또 하릴없이 점묘화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진 게 그림 때문이었나, 남자는 생각해 본다. 그럴 리는 없다. 아내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건 끝내 몰랐지만, 그림이 아내의 삶을 무언가 달라지게 했다는 걸 남자는 직감으로 알았다. 그림을 시작한 후 아내는 더 이상 남자의 귀가를 재촉하지도 않았고, 남자의 일정을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내는 하루 온종일 이젤을 펼치고 그림에만 매달렸다. 지겹지도 않은 지 아내는 몇 달째 화폭 위에 수천 개의 점을 찍어 조금씩 조금씩 그림 한 점을 완성해 나갔다. 아내에게 화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나보다고, 남자는 가벼이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팔레트와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는 그림을 볼 때마다 남자는 외려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는 그것이 지난 이십 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고, 아내의 꿈을 되살려낸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도 얼마쯤은 우쭐한 마음을 가졌다.
남자의 시선은 압정을 눌러놓은 듯 아까부터 그림 위에 고정돼 있다.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가늠해 보지만 남자는 끝내 알 길이 없다. 아내는 정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그림을 그렸다. 원래 있던 액자를 치우고 그림을 걸어놓은 것도 아내였다. 행여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남자의 시선은 못내 그림 위를 떠나지 못한다. 아내는 하필 왜 저 그림을 거실에 걸어둔 것일까, 남자는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러다 남자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가 본다. 졸린 눈을 한껏 치켜뜨고 남자는 다시 한 번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마치 원래 거기 없던 무엇을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아내의 그림을 이렇게 진지하게 바라본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이.
그림 속에는 부부인 듯한 두 남녀가 테라스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한적한 전원마을의 테라스 앞에는 몇 동의 비닐하우스가 서 있고, 그 너머로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돌산대교가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다. 파란 하늘 아래 어깨를 맞댄 두 남녀의 모습이 왠지 낯이 익다.
남자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서 다시 그림을 들여다본다. 어깨 위에 흰 스웨터를 걸친 여자의 머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듯 남자를 향해 완연히 기울어 있다. 남자의 시선이 난간 위에 팔꿈치를 괸 채여자의 몸을 받치고 있는 남자에게로 옮겨간다. 남자의 자세는 볼수록 뭔가 어정쩡해 보인다. 남자의 발끝이 여자와 다른 방향으로 엇갈려 있는 탓이다. 두툼한 몸피의 남자는 여자의 곁에서 여자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두 남녀의 미묘한 엇갈림이 수없이 많은 점들로 형상화된 그림 속의 남녀를 한 없이 쓸쓸해 보이게 한다.
자신의 기억을 닮은 그림 속에서 남자는 필사적으로 희미한 기억 하나를 건져 올린다. 그날 돌산도의 펜션 테라스에는 양친을 여의고 이모집으로 살러 내려온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 해엔 유난히 여수에도 눈이 많이 내렸어요. 눈 때문에 축사 지붕이 주저앉을까봐 이모네 식구들이 모두 제설작업에 나가는 바람에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남자는 눈을 감고 소녀의 얘기를 떠올린다. 외딴집 마당에도 하루 종일 눈이 쌓였어요. 겨우내 감기를 달고 살아선지 이모는 한사코 나를 집에 남겨 뒀어요.
소녀는 하루 종일 방문을 열고 돌아오지 않는 이모가 기다렸다. 마당 앞 감나무 가지에 소담스런 눈꽃이 열렸다. 투두둑, 나뭇가지에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소녀는 문득 자기 혼자 세상에 남겨졌다는 생각에 참았던 눈물이 났다.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소녀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방 안에 굴러다니던 화구를 들고 눈밭으로 나갔다. 눈발은 그쳤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붓을 쥔 손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꽁꽁 얼어붙은 물감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그림을 완성한 뒤에야 소녀는 방에 들어가 혼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얼른 벽에 기대둔 스케치북을 펼쳐 보았더니 물감들이 죄 녹아버려 그림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얼룩져 있었어요. 그런데 말예요”
여자는 물기 어린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감으로 얼룩진 그 그림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난 앞으로 더 이상 울지 않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이상 세상에 응석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 그래봐야 아무도 날 지켜줄 수 없다는 걸.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물감 생각이 났어요. 당신은 절대로 내 인생을 얼룩지게 할 만큼 녹지 않을 사람이라고….”
그때도 테라스의 남자는 내가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 아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던가. 남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그날 무슨 말을 했던 지를 떠올리기 위해 남자는 그림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온 세상의 소음이 멎은 듯 텅 빈 거실 안에 남자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 차 있다.
“당신 그거 알아요? 점묘화는 그렇게 가까이에서는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요. 몇 미터쯤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아야 그림의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요. 당신도 좀 더 뒤로 와 봐요. 자, 이만큼.”
남자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조금 더 멀찍이 물러서서 그림 속 남자를 바라다본다. 그림 밖의 남자가 그림 속 남자를 물끄러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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