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 가브리엘이 겨울 휴가를 받았다.
"뭐 할까? 어디갈까?
이제 먼 거리 여행도 피곤해서 싫고....
일본이나 갈까?"
고민하기에 난 대뜸
"별 일 없으면 온 가족 여행이나 가자!
콘도를 따라 쭉 돌고 전남지방은 따뜻하니까 골프도 좀 치고..."
서울서 공부하는 둘째에게
"라파엘! 여행 함께 가자.
너 없으면 형이 너무 재미 없을거야.
그리고 공부는 다녀와서 보충을 좀 더 하면 안될까?"
했더니 망설이다가 고맙게도 동의했다.
아들만 낳았으니 장가가면 나와 시간을 보내줄 수 없을 게 뻔하다.
바라서도 안되겠고!
그러니 아직 품 안에 있을 때 아들들의 동의만 구하면 함께 하고 싶다.
집착일까?
그건 아니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가족을 이루어 독립하면
오늘날의 사회의 분위기나 추세로 볼 때
시어머니인 나를 며느리가 편안해할 리는 만무이고
게다가 한 세대 아래 젊은이의 눈으로 보면
내 마음은 청춘인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할머니였듯 늙은이 취급받기가 십상이 될 터
아직은 내자식이라 말할 수 있는 지금 보여주고픈 세상,
내가 줄 수 있는 여유를 함께 누리고 싶었다.
시집 올 때 어머님이 회갑이셨는데 당시 내눈엔 어머님이 노인같아 보였으니
어디 내 자식들이라고 다를 리 있겠나!
모처럼 누리는 황금같은 가족여행을 '맛기행, 콘도투어'로 정하고
아침 회진을 돌고 휴가가 시작된 큰애가 귀가하자마자 늦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트렁크엔 골프채가 네 개. 각자 옷 가방 한 가득!
"담엔 더 큰 차가 필요해. "
라는 둘째의 생각에 공감.
변산 가는 길에
군산에 들러 유명한 이성당 빵집 제빵사가 독립해서 차렸다는 영국빵집에서 맛있는 빵도 사고
일제시대때부터 있었다는 경암 철길마을에서 불량식품 쫀드기도 사먹고
옛 정취가 남아있는 철길을 따라걷다
애들이 먹고 싶다는 닭염통꼬치구이와 어묵을 시켜서 나눠 먹으며
들뜬 여행의 시동을 걸었다.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가니 벌써 해가 뉘엿해지고 있었다.
변산에 가면 회를 먹으리라던 각오는 다 버리고
사들고 있는 빵 생각에 가볍게 물회나 먹기로 했다.
물회맛은 글쎄다.
여하튼 낯선 음식점은 위험하다.
변산콘도에서 묵었다.
둘째날.
느긋하게 일어나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장흥을 향해 출발
우리나라에서 퍼블릭골프장으론 10위안에 든다고 자랑하는 정남진골프장에 도착!
날씨도 운동하기엔 딱 좋았고
자식 앞세우고 한 팀이 되니 마음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골프장은 물론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쌌다.
36홀 이틀 라운딩에 아침 식사 . 콘도보다 더 나은 리조트가 제공되었다.
첫 날 운동후 그 유명하다는 장흥 삼합을 먹으러 시내에 나섰다.
쇠고기, 관자 , 표고버섯을 상추에 양파장아찌 얹고
슴슴하게 간한 깻잎장아찌에 파절이 쬐끔 얹어 한 입 미어지게 먹는 맛이라니!
운동 후 배고픈 참에 관자를 세개나 추가하고
버섯도 추가해서 너끈하게 먹고 돌아오며
귤과 딸기를 후식으로 사왔다.
다이어트 따윈 물 건너 갔다.
조용하고 따뜻한 리조트엔 얼굴에 얹을 팩과 과자가 테이블에 놓여있다.
전라도 인심 제대로다.
셋째날.
아침에 눈뜨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하고
공짜로 준다는 해장국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안개 자욱한 채로 운동을 시작할 셈인가 보다 했더니
팅그라운드에 서자마자 안개 어디갔나 싶게 전방이 훤하다.
즐겁게 운동을 하고 점심쯤 끝났으니 먹거리여행답게
점심은 보성군청 앞의 대원정이라는 유명 식당에 가서 꼬막정식을 먹었다.
꼬막 회무침에 밥을 비벼먹고 꼬막전에 삶은 꼬막, 전라도 맛 가득한 한 상차림....
무척 오랫만에 먹는 참고막 맛은 여전히 일품이다.
전라도 제사상엔 꼬막을 놓는데
새며느리 와서 꼬막을 제대로 못 삶으면 흉이 잡히곤 했었다.
수저 앞머리로 꼬막 뒤통수를 확 제끼면 떡 벌어지는 물 가득한 참꼬막.
그걸 다시 맛보니 옛생각이 절로 났다.
아이들에게 참꼬막맛을 보여주니 그도 신나는 일이었다.
꼬막을 까서 양념 듬뿍 얹어먹는 서울 사람들은 도무지 알지못할 참꼬막의 맛이다.
식후 4시간 가량을 달려 거제에 도착했다.
점심을 푸짐하게 먹어서인지 저녁 생각도 안한다.
짐을 풀고 운동집착남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탁구를 하러 나섰다.
뒤따라 내려가 큰애와 나는 아침거리를 사고
아빠와 둘째는 탁구 한판...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아빠랑 한 판...
처참하게 졌다. 그러나 첫 시합이었으니... 재미있으면 그만.
과일을 먹고 과자를 먹으며 창문을 열고 불빛 가득한 바다구경을 했다.
아침에 먹을 간편식을 사서 들고 올라왔다.
일어나 식당 찾아 움직이기도 귀찮다.
넷째날.
거제도하면 보태니컬 가든으로 유명한 외도 아닌가!
멀기도 하려니와 다른 데 가볼 곳도 많아
늘상 뒤로 제쳐둔 외도에 이참에 들어가 보기로 햇다.
겨울이라 꽃이 없으니 관광객도 별로 없고
조선소들이 경영상태가 엉망이라더니 바닷가 가게들이 어디고 한산하다.
외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훔베르트 바서의 작품처럼 휘청거리는 모양의 등대.
구엘공원의 가우디 의자를 본뜬 의자와 잘 가꿔진 나무들.
처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섬을 사고 삼십여년을 가꾸어
이젠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곳을 만든 故이창호님 부부.
아내분은 대학 선배였다.
나는 무얼하고 살고 가나 싶었다.
거제도 경기가 형편없다는데 우리라도 먹고가자싶어
회도 시키고 멍개비빔밥과 성게비빔밥까지 넉넉히 시켜 먹었다.
우리 가족들은 성게비빔밥은 비린내가 난다했다.
몽돌해변과 바람의 언덕을 걷고나니 머리가 띵했다.
유명하다는 핫도그는 사먹을 일이다.
유난히 소세지가 부드럽고 맛있었다.
신선대까지 돌아보고 거제를 떠나 단양을 향했다.
갑자기 동해안지역에 폭설이 내린다더니 경부선지나 중부내륙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온 가족을 다 실었으니 서행하라고 남편을 몇번이고 주의시켰다.
아이들은 피곤에 지쳐 뒷좌석에서 곯아 떨어졌다.
큰애가 내내 운전을 해서 더 힘들었을 것이다.
눈구경을 못할까 했더니 단양은 눈밭이었다.
얼마전 단양에 간 적 있는 나는 마늘음식으로 유명한 단양구경시장으로 가족들을 데려갔는데
단양은 저녁 7시면 장을 다 접는다했다.
단고을 새우만두를 먹긴 다틀렸고 오성톨닭집도 컴컴하다.
이러다 식구들 밥을 굶기겠다 싶어 내눈에 든 순대국밥집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가족세트메뉴가 다있다. 맛도 좋았다.
순대국 세 그릇에 보쌈과 마늘순대가 포함된 가격이 32000원이다.
숙소에 가기전에 시장부터 들렀기에 망정이지
식구들 밥조차 못챙길 뻔 했다.
서둘러 숙소에 가는 길은 눈이 제법 쌓여 성탄분위기가 절로 난다.
마지막 날인데다 집 가까이 왔으니 늦게까지 푹 자기로 했다.
둘째는 고맙게도 여행 속에서도 홀로 공부를 했다.
다섯째날.
간밤에 은근히 걱정되던 길은 눈이 말짱하게 다 녹아 있었다.
지하 한식당에서 끓여주는 해장국이 맛있었던 기억이 나서 모두 내려가 아침으로 먹었다.
나홀로 북어해장국 먹은 둘째는 약간의 후회와 함께였지만 그도 맛있어 했다.
가족이라 입맛이 같아서인가?
충주호쪽으로 돌아 월악산 자락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제천으로 빠졌다.
장회나루에서 배를 탈까 했는데 두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포기.
제천 모노레일을 타러 갈랬더니 겨울이라 휴장.
명암마을 산채정식을 먹으려 했더니 주말에만 한다고 하고...
충북만 되어도 춥긴 추운가보다.
산길에 눈이 덜 녹아 미끌거렸으니까....
차라리 집으로 가자싶어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슈크림도 챙기고 컴백홈.
문득 살아있어 누리는 가족과의 동행을 허락한
장성한 두 아들에게 고맙고
이 여행을 주관한 하느님께 세삼 깊은 감사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