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④ 불무동 공소(폐쇄)
-1889년 불무동 공소 설립 (베레모렐 신부)
(전북 부안군 변산면 불무동길)
■ 천주교 성인공파 가계도
김해 김씨 안경공파는 2000년 판 경진세보를 발행하며 천주교 성인공파를 분파하였다. 즉 김해 김씨 안경공파 아산공문중 천주교 성인공파이다. 천주교의 순교자 김진후(譜名, 運祚.) 비오를 파조로하여 그의 네 아드님 종현(부안), 택현(대전/논산), 한현(종한,안드레아), 희현(익산)과 동생인 김귀조(정읍)와 그 후손을 천주교 성인공파로 분파한바, 파조 김운조(震厚)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11대의 후손에 이르고 있으며, 2002년 9월 15일(추석 전주일) 솔뫼 성지에서 창립 총회를 거쳐 천주교 성인공파 종회를 설립하였다. 후손들은 4개의 (부안, 대전/논산, 익산, 정읍)집안으로 분포되어 있다.
1, 김종현(宗連, 자 희안 1764~1824) [부안 집안]
파조 김진후(運祚, 비오)의 큰아들로 1764년 충청도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진후<運祚>비오와 모친 유씨(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법망을 피해 경상도와 전라도 산골로 피신을 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고 여러 지방으로 숨어 다니며 주문모 신부를 도와서 박해 중에서도 열심히 포교 활동을 했으므로 훌륭한 신앙의 증거자였으며 나중에 큰아들 제광(1780-1863) 가정과 함께 고향 솔뫼에 있다가 1824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 후손들은 전북 부안에 터를 잡고 살았기에 지금도 종현의 후손들을 부안 집안이라 부르고 있다.
2, 김택현(자는 春奉, 혹은 종원 1766~1830) [대전/논산집안]
파조 김진후(자 億金, 譜名 運祚) 비오와 모친 유씨(兪氏)사이에 둘째 아들로 1766년 4월 7일에 충청도 면천고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본인도 순교하였고 아들 제준, 손자 지식(대건)등도 순교하였다, 후손들이 대전과 논산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택현의 후손들을 대전/논산집안 이라 부른다
(순교자 : 김택현, 아들 제린(제준), 손자 지식(대건), 손자 근식, 손자 진식, 손자 선식)
3, 김종한(譜名 漢鉉) 안드레아 [절손됨]
충남 면천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에서 파조 김운조(진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98년경에 처자와 자녀 김 데레사를 데리고 경상도 일월 산중인 안동 고을 우련밭(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우련전)으로 가서 17년 동안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거기서 그는 오직 애긍에 힘쓰고, 기도와 성서 읽기와 그 밖의 모든 신자 본분을 지키는 일에만 부지런하였으며 1816년 11월 1일(음)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을 당했다.
(순교자 : 김한현(宗漢), 딸 김제신 데레사, 사위 손연욱 요셉)
4, 김희현(자 秀元 1785~1839) [익산집안]
그는 1785년에 부친 김진후(운조)와 모친 유씨(兪氏) 사이에 넷째 막내아들로 충청도 면천고을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5년 을해박해가 있은 후 1827년 정해박해 때 혹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를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명집(濟恒) 루도비꼬도 병인 박해 때 순교를 했다. 후손들은 제항의 아들 경식의 부인이 순교한 후 천등산의 옥배 마을로 찾아들어 거기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숯을 굽고 옹기를 구우면서 살다가 고산 구제리등을 거쳐 익산으로 나와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지금도 희현의 후손들을 익산집안이라 부른다.
(순교자 : 김희현, 아들 제항(明集) 루도비꼬, 손자 며느리, 무명인 손자, 경식의 처)
▼ ⑤ 등룡 성당
-김대건 신부 집안 후손이 형성한 교우촌-
(전북 부안군 하서면 등룡길 13)
부안 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로 충청도에서 거룻배를 이용하여 건너와 해안과 인접한 부안에 숨어 살며 교우촌을 이루면서이다. 등용리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김양배(요한) 초대 공소회장에 의해서이다. 그는 성 김대건 신부의 방계 후손이며 또한 김대건 신부의 당질로서,성인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동정부부 생활을 하였던 김현채(토마스)의 양자였다. 그의 가족은 충남 아산에 살다가 병인박해 때 피란을 와 해안 가까운 불무동 산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어 담배농사를 지어 어렵게 모은 돈으로 등용리 일대의 갈밭을 매입하여 친척과 교우들을 불러들여 김씨,김 회장 댁의 진외가인 서씨, 고종지간인 안씨, 동서지간인 방씨 등 친족이 모여 1903년 교우촌을 이루었다. 김 회장은 신덕과 인애로 어려운 교우들을 구제하였고,김 회장의 큰아들 종락(마태오)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저수지를 파거나 밭을 개간하게 하여 품삯을 주어 연명토록 하였다.
김양배 회장은 1918년 8월 2일 평소의 꿈이었던 성당 20평과 사제관 8평을 준공하여 신부님 모시기를 갈망하자, 그해 12월 8일 드망즈 주교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칠고’를 주보로 정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등용 공소는 1926년 대구교구 이기수(야고보)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본당을 설립하고 김양배(요한)를 초대 사목회장으로 임명하여 나날이 번창해 갔다. 이기수 신부는 문맹을 퇴치하고 아이들의 교리교육과 나아가서 계몽활동을 펼 목적으로 1932년 4년재 학술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김양배 회장의 둘째 아들 김종기(요셉)가 맡아 운영하였다. 김종기의 사위인 박노춘과 김문배, 김경태가 교사였는데 한 학년에 20여 명씩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35년 이기수 신부는 1개 군에 1개 본당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본당을 부안읍으로 옮겨 부안 성당이 되고 이곳은 공소가 되었다. 2010년 1월에 본 성당으로 다시 승격되었다. 전북에서 가장 일찍 세워졌던 성당이 다시 본 성당이 된 아주 작은 성당이다.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의식율 질식시키기 위한 일본의 탄압정책으로 등용리 학술강습소가 폐교되었다. 하지만 청년들의 봉사로 문맹퇴치를 위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1950년 한국동란 시에도 천주교 신자 마을이라서 많은 재산피해와 인명피해가 있었다.
공소와 담 사이에 2002년 ‘천주교 성인공파’ 라는 독립된 분파를 만든 신앙의 명가 김대건 신부님의 종가가 있는데 4대 공소회장인 김병태(야고보)의 큰아들이며 9대손인 김겸준(요한) 현 공소회장이 살고 있다. 그 종가에 얽힌 이야기는 마율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80가구 중 40가구가 불에 탔다. 그 종가도 주변의 초가집 3채, 사랑채, 창고, 잠실, 헛간 등 4채를 다 태우고 몸채로 불이 옮겨 붙었는데. 마루 바로 앞 문 지방에서 기적적으로 꺼졌다고 한다. 당시 그곳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물인 족보 38권, 구 서적 5권, 성작 2개, 제의 10벌, 라틴어 경본을 보관하고 있었다. 현재 그 유물들은 솔뫼 성지에 기증하여 보관하고 있다.
▼ ⑥ 돈지 공소
(전북 부안군 계화면 돈지1길 65)
돈지 공소는 1977년부터 정읍 산내, 신태인 동막, 함열 등지에서 교우들이 이주하면서 생겼으며,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 위치하고 있다. 1978년 4월 본당(부안)에서 공소 부지 300평을 매입하였다. 교우 가정에서 공소 예절을 하다가 1986년 이만호 회장 때 대지 130평 건평 18평 건물을 60만원에 매입(이 막달레나 30만원 봉헌) ‘돈지 천주교회’ 간판을 달았다. 1996년 부안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3월 10일 새 경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비 7,780만원을 들여 그해 7월 23일 47평 건물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공소 신자들은 김과 젓갈류를 판매하고 외지 신자들이 보내온 성금과 본당 지원금, 농협 융자금을 모아 건축 비용을 마련하였다.
첫댓글 부안은 나의 고향인데...
저도 한번 순례해야겠습니다
그중에서 불무동 공소가 폐쇄되어 가슴이 아픕니다만,
그래도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에서 그 역사를 이어가도록 가꾸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집입도로도 확장하고 있으니
더욱 가기도 쉬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