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역사의 여백을 채운 민초들의 거친 숨결, 소설의 언어로 다시 피어나다 — 『소설로 읽는 한국민중운동사 1, 2』
- 박예진 인턴기자
- 승인 2026.03.03 15:44
역사는 오랫동안 승리한 자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그 기록의 여백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이들의 비명이 숨겨져 있다. 2025년 12월 30일 출간된 『소설로 읽는 한국민중운동사』(서연비람, 전 2권)는 그동안 교과서의 짧은 주석으로만 존재했던 민중들의 투쟁을 문학의 언어로 복원해낸 야심 찬 기획이다. (사)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회원 소설가 20인이 뜻을 모아 집필한 이 책은 단행본의 깊이와 문예지의 시의성을 동시에 갖춘 ‘무크 mook’의 형식을 빌려, 고대 전통 사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뒤흔든 저항의 파동을 20편의 중단편 소설로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이는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 박제된 사실 Fact에 소설적 진실 Truth을 불어넣어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증명하려는 치열한 기록의 산물이다. 1권 『전통시대편』은 봉건적 신분 질서의 가혹한 압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몸부림을 다룬다. 유시연의 중편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에서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오"라고 절규한다. 만적의 이 외침은 당시 신분제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천민들의 근원적 열망을 상징한다. 만적의 난은 비록 밀고자의 배신으로 좌절되었으나, 작가는 이를 단순한 실패가 아닌 신분제를 뒤엎으려 했던 최초의 집단적 각성으로 정의한다. 김민효의 「묘청 운명에 이끌리다」 역시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서경 천도를 통해 국가 개혁을 꿈꿨던 묘청의 이상주의적 운동이 문벌귀족의 기득권과 외세의 압박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은, 고려 중기의 복잡한 정치 지형 속에서 민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표출되고 좌절되는지를 보여준다.
“네 이노옴!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뒀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최충헌이 두 손이 묶인 만적을 걷어찼다. 만적이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뒤늦게 한충유댁 늙은 종과 순정이 헐레벌떡 달려와 별감댁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만적이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오.” “뭐라? 이놈이 아직도 헛소리를 지껄이느냐.” 사병의 손에 두들겨 맞고 발길질을 당한 만적은 흙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 『소설로 읽는 한국민중운동사 1』, 84쪽
조선 시대의 저항은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의적'들의 서사를 통해 더욱 강렬해진다. 김주성의 「과녁 없는 살 虄」은 임꺽정이 왜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냉정하고 균형 잡힌 답을 내놓는다. 작가는 임꺽정의 최후를 "과녁 없이 시위를 떠난 살"에 비유하며, 그를 움직인 원동력이 불의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분노였음을 묘사한다. 정수남의 「꺼지지 않는 횃불」 속 홍길동은 적서 차별이라는 제도적 폭력을 뚫고 자신만의 이상향인 율도국을 건설함으로써 자유로운 세상을 향한 민초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또한 백영의 「활빈도의 길」은 장길산의 활동이 단순한 약탈이 아닌 미륵 신앙이라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들은 민중운동이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에 맞선 필연적인 결과였음을 증명한다. 이어지는 2권 『근세·현대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 투쟁부터 현대사의 민주화 여정까지 더욱 조직화된 민중의 연대를 다룬다. 마린의 「민주의 씨앗」은 3·1운동의 자발적인 폭발력을 통해 민족 자주독립의 기개를 묘사하며, 김현주의 「암태도의 푸른 불꽃」은 일제강점기 소작쟁의에서 활약한 여성들의 존재를 부각한다. 특히 하아무의 중편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오」는 형평운동을 통해 백정 해방이라 는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탐구한다. 이는 우리 현대사가 단순히 국가의 성장이 아니라, 소외된 계층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치열한 과정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사북 읍내는 겨우내 북풍이 몰고 오는 탄가루와 운탄 트럭이 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흘려버리는 탄가루로 늘 거뭇했다. 사북 읍내를 거뭇하게 하는 것이 탄가루뿐만이 아니었다. 탄갱에서 막 빠져나온 광부들이 채탄 장비가 든 가방을 메고 읍내를 걸어가면, 탄가루가 묻은 땀방울로 차 있는 장화가 질벅거렸다. 그때마다 장화 밑창에서 뱉어내는 소리와 석탄을 가득 실은 유개화차가 탄가루를 흩뿌리며 지나갈 때 내뱉는 소리가 사북 읍내를 더욱 거뭇하게 했다. ― 『소설로 읽는 한국민중운동사 2』, 222쪽
현대사의 비극과 희망은 4·3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월 항쟁을 거치며 더욱 깊어진다. 은미희의 「붉은 섬」은 제주 4·3의 참혹한 학살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국가폭력의 비극을 고발하고, 이진의 「기나긴 터널」은 5·18의 명예 회복이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임을 역설한다. 특히 김종성의 중편 「검은 민들레: 검은 봄 3」은 1980년 사북항쟁의 현장을 광부와 부녀자들의 열악한 생존 환경과 인격 모독이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 녹여낸다. 지장산의 어둠과 탄가루 섞인 땀방울을 묘사한 문장들은, 지식인이 아닌 현장의 민초들이 직접 이끌어간 항쟁의 순수성을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결국 『소설로 읽는 한국민중운동사』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복고적 취향의 결과물이 아니다. 작가들은 역사의 굽이마다 맨몸으로 맞섰던 민초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그들이 남긴 투쟁의 흔적이 어떻게 오늘날 민주주의의 토양이 되었는지를 역설한다. 강윤화의 「가장 잘하는 일」이 6월 항쟁을 통해 보여주듯,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규칙이자 지향점이다. 이 책은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이름 없는 민중의 연대였음을 지적인 문장으로 증명한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다. 그것은 승자의 미화된 기록이 아니라, 패배하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이들의 꺾이지 않는 기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일이다. 20인의 소설가가 복원해낸 이 20편의 서사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터널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횃불이며, 오늘날 우리 삶의 뿌리를 지탱하는 가장 뜨거운 기록이다.
* 《쿨투라》 2026년 3월호(통권 141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