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4주일설교 시편72:1-20
본문: 시편72:1-20
제목: 왕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며
오늘은 시편72편1:20의 말씀을 가지고
“왕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왕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며”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많은 헌신과 사랑을 베풉니다.
태어나서부터 시집 장가가서 까지도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 중 믿는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녀를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아마도 자녀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일지라도
나름 자녀를 위한 기도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물론 건강하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지혜롭게 성장하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세상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과 출세와 부자가 되는 것
이런 것을 기도합니까?
그런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복을 받았다고 하고 그것을 잘했다고 할까요?
오늘 시편은 다윗이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을 위한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이제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노년의 다윗이 그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이 했던 기도의 상당수는
어떤 부분은 응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아니 아버지 다윗이 원했던 그런 왕이 아니라
최악의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돕는 자가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하여 자기의 치적을 높였고
많은 나라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많은 나라로부터 착취를 통해 자신의 배만 불리어서
많은 나라를 고통과 억압을 당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서 무엇을 원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저 나 잘 먹고 나 살고
우리 집 우리나라만 좋아지는 것일까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우리만, 우리만 잘 되는 것을 원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시편 72편은 제왕의 시로 분류됩니다.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기원하는 이 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는
말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 표현을 보면 늙은 다윗 왕이 아들이자 계승자인 솔로몬을 위해 드리는 기도로 이 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1.왕의 통치의 사회적 차원(1-4절)
-공동적 차원
우선 시인은 “사회적”이나 “공공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왕의 통치가 구현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먼저 구해야 하듯이 다윗은 그것을 먼저 구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만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왕이 되기만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정의나 공공적 이익을 말하면
말리는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네가 중요하지 사회가 무엇이 중요하고
공공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사회에 이 공공에
이루어져야 하기에 우리의 기도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부여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자기만 생각하지
사회적으로나 공공적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부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가 그러해야 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백성을 가리켜
“왕” 백성이 아닌 “주” 백성이라고 칭합니다.
이는 백성이 “왕”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임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자녀도 내가 다스리는 사람도 내 힘 아래 있는 사람도
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믿는 자입니다.
그래서 왕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베풀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지녔습니다.
제대로 된 왕이라면 가난한 자들의
법적 변호인의 역할을 자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 힘이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약자와 가난한 자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지도자들이 강자의 편에서
세금을 깍아주고 그들의 편에서 정책을 펴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지도자가 약자와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그런 지도자가 이 땅에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왕은 사회의 빈곤층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힘을 준 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보호와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왕의 통치의 우주적 차원(5-7절)-
시간적 차원
5-7절에서 시인은 “우주적” 곧 “시간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왕의 통치가 이루어짐으로써
평화가 지속되기를 간구합니다.
5절의 해와 달은 창조 질서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왕의 통치가 이토록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웁니다.
좋은 지도자가 나오면 태평성대를 이루고
세상에서 우러르는 그런 나라가 된다는 것을 압니다.
6절의 “비”와 “소낙비”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경작을 할 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비가 내려야만 곡식이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은 백성에게 이런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때에 맞는 비가 와서 땅에 곡식이 잘 익어가듯이
지도자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정책과 방향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나라는 의로운 사람과
그 땅에 평강이 넘쳐나게 됩니다.
3) 왕의 통치의 세계적 차원(8-11절)-공간적 차원
8-11절에서 시인은 “세계적” 곧 “공간적” 차원에서의
이상적인 통치를 묘사함으로써 왕이 이방 나라에서도
인정을 얻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합니다.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다”는 8절의 표현은
왕이 전 세계를 향해 주권을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 사는 자들”뿐만 아니라 “원수들”도
이상적인 통치를 펴는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복종합니다.
당시 세계의 끝으로 여겨지던 서쪽의 다시스(스페인)를
비롯해 지중해 섬들과 해안 지역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고, 아라비아 남쪽의 스바와 에티오피아
또는 아라비아의 한 지역인 시바의 왕들 역시
예물을 보내올 것입니다.
왕은 철장이나 전쟁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정의와 공의로 행동함에 집중함으로써
이상적인 통치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본 열방의 모든 민족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평화의 왕국에 통합되고자 할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내 나라만이 아니라 바른 통치를 통해서
어렵고 힘든 나라를 도와 함께 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입니다.
4)왕의 통치의 사회적 차원(12-14절)-
복지적 차원
12-14절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왕의 모범적인 돌봄을 묘사함으로써 “사회적”
곧 “복지적”차원의 이상적인 통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12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함으로써
열방이 왜 이 왕에게 매료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여기서는 2절과 4절에 나온 주제를 새롭게 언급합니다.
불쌍한 이들의 “법적 변호인”이었던 왕은
이제 이들의 직접적인 “구원자”가 되어
궁핍하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즉시 해결해 줍니다.(12절)
왕은 진심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해 냅니다(13절).
그들은 “압박과 강포”로 인한
사회적 불의의 희생자들입니다(14절).
이상적인 왕이라면 모름지기 희생자들의 목숨을
“구원하는” “구속자”가 되어 주목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의
피 곧 생명을 귀하게 여기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지도자들이
전혀 가지지 못한 그런 모습입니다.
약자는 압박하고 불의의 희생자들은 모른 척하는
이 땅의 지도자들은 봅니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가 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5)왕의 통치와 우주적 차원(15-17절)-
다국적 차원
15절의 “그들이 생존하여”는
“그가 오래 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환호와 같습니다.
시인은 왕이 장수하면서 조공을 받고 사람들의
기도의 대상이 됨으로써 많은 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왕의 통치를 받는 땅은 풍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16절).
그의 영예 곧 그의 이름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17절 후반절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연결됩니다.
이상적인 왕은 하나님의 복을 온 땅에 전달하는
복의 통로이자 운반자가 됩니다.
바로 왕은 복의 통로와 운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바른 모습입니다.
6)송영과 종결(19-20절)-신앙적 차원
18-20절은 송영으로서 전체 다섯 권의 시편 중
제 2권(시42-72)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송영은 72편의 결론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홀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로 집중시킵니다(18절).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이 온 땅에서 유일하신 최고의 신으로 인정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19절에서는 아멘이 이중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재확인과 동의를 동시에 강조하는 표현법이다.
20절을 보면 시편72편이
다윗의 마지막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는 특정한 왕을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왕의 직위와 사명에 관한 기도입니다.
그 어떤 이스라엘 왕도
이런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지 못해지만,
이상적인 왕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에 따르면 왕은 군사력 증강이나
경제 성장에 마음을 두지 말고
사회적인 약자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권력으로 많은 여인들을 두었으며
그는 그의 권력으로 많은 은금을 모았으며
그는 그의 권력으로 건물과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은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고
더 나가 주변의 많은 국가가 솔로몬 때문에 많은 착취와 어려움을 겼어야 했습니다.
이상적인 왕은 “압박하는 자들”을 꺾음으로써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왕의 정의는 불쌍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보살핌으로써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하며,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평화 및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회의 주변인들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자 책무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탄식을 방치하는 것은 풍족한 세상을
창조하신 관대한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시편을 통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이 땅에 이런 지도자가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완벽한 이런 지도자 올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릇된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고 해도
흠이 없거나 문제가 없었던 왕은 없었습니다.
그저 감추고 미화했기 때문이지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시인 다윗도 정말 아들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도했을까요?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며 기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셨지만
그리고 그곳에 아담을 왕으로 세워주었지만
그들이 한 일은 망치는 일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와야 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판단력과 공의가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땅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고
기도하여 그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도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행하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