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을 거두는 사내의 얼굴에 왜 수심이?
<타작>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럿이다. 중앙에는 긴 나무둥치(‘개상’이라고 한다)에 볏단을 쳐서 알곡을 떨어내는 사람이 넷이 있다. 그중 둘은 볏단을 묶고 있고, 둘은 볏단을 털고 있다. 떨어진 알곡을 비로 쓸어 한곳에 모으는가 하면, 왼쪽 위에는 볏단을 지게에 지고 오기도 한다. 이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오른쪽의 고깔을 쓰고 볏단을 묶는 사내와 그 위쪽의 맨 상투 바람의 사내는 표정이 밝다. 지게에 볏가리를 잔뜩 지고 오는 사내도 그렇다. 봄부터 가을까지 고생해서 이렇게 곡식을 거둘 수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왼쪽의 볏단을 치켜들고 있는 납작코 사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왜 그만 찡그리고 있는 것인가. 한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 다산 정약용의 <보리타작(打麥行)>(송재소 역주, 『茶山詩選』, 창작과비평사, 1981)이다.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앞소리를 매기고 뒷소리로 받는다. 노동은 고되지만,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풍성한 수확이 있는 곳이 낙원이고 천국이다. 어찌 고향을 떠나 굳이 벼슬길에 오를 것인가.
타작은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가에 낼 세금과 지주에게 바칠 소작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괴로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걸쳐 동일하였다. 선조 때의 관료이자 문인이었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전가잡영(田家雜詠)>(『鵝溪遺稿』 권3)이란 시를 보자. 이 시는 모두 3수인데, 첫째 수에서는 갓 빚은 막걸리로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흰 떡을 쪄서 먹으며 즐긴다. 정승판서 부럽지 않다. 두 번째 수는 타작이 끝난 뒤 등불을 켜고 술과 닭고기를 먹으며 한 해의 회포를 푼다. 문제는 세 번째 수다.
나라에 낼 세금을 바치지 못하자, 집안의 할멈을 잡아가고 아들 셋을 징발하여 군인으로 끌고 갔다. 솥 안에 있던 것까지 털고 소까지 팔아도 세금을 다 내지 못한다. 해서 관청에 끌려가 매를 맞는다. 그러면서 유리걸식하다가 구렁에서 죽는 거지를 부러워한다.
조선 후기, 지주와 소작인의 대조적인 추수 풍경 다시 김홍도의 <타작>으로 돌아가 보자. 그림 왼쪽 상단의 모서리에서 오른쪽 하단의 모서리로 직선을 그으면 그림이 반으로 나뉘는데, 빗금 아래는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빗금 위에는 한 사내가 볏가리 위에 돗자리를 깔고 장죽을 빨며 빈들거리는 자세로 자빠져 있다. 갓까지 젖혀 쓴 꼴이 영 게으른 꼬락서니다. 자리 앞에는 담배쌈지와 신발이 놓여 있고, 벌써 한잔했는지 술잔으로 입을 덮은 작은 술 단지도 놓여 있다. 이 사내의 빈들거리는 자세는 시무룩한 납작코 사내의 표정과 아주 대조된다. 단원은 한 폭의 그림에 기쁨과 수심, 빈들거림 셋을 동시에 섞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자리에 자빠져 있는 사내는 지주이거나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료를 받아 지주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마름일 것이다. 납작코 사내가 찡그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추수의 결과물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온 것일 터이다. 아마도 사내의 머릿속에는 <전가잡영>의 내용이 가득했을 것이다. 참고로 소작료를 바치는 그림 한 점을 보자. <소작료 내기>는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이다. 마당 안에는 쌀섬을 등에 실은 소를 앞세운 소작인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바깥에는 등에 쌀가마니를 진소작인이 대문을 들어서고 있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지주가 대청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마도 김홍도의 <타작>의 다음 장면을 그려야 한다면, 바로 <소작료 내기>와 같은 그림이 될것이다. 김홍도가 <타작>을 그렸던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문제는 토지 소유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광대한 토지를 보유하는 지주, 이른바 겸병가(兼倂家)가 나타났다. 반대로 수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머슴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소작인이 된 농민은 수확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쳤다. 지방에 따라 지주가 나라에 바치는 10%의 전세(田稅)까지 소작 농민이 떠맡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동미(공물로 바친 쌀)와 군포(軍布)까지 모두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농민은 추수 때가 되면 수확의 기쁨에 잠시 젖을 수 있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농민의 복잡한 감정, 지주와 소작인의 경제적 관계를 김홍도는 <타작>이란 그림 한 점에 나타낸 것이었다. 그가 탁월한 화가라면 바로 이 점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글‧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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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타작이라는 글 오랜만에 보네요 타작 사람을 때린다고 할 때 타작한번 해볼가 이런 애기를 소시적때 들은 기억이 아물아물 합니다.가을 추수 퐁요로은 가을 우리 지역사모임도 타작을 할 때가 도래한것 같습니다.
그림은 추수 벼 타작인데 시의 내용은 보리 타작이네요. 시를 읽으며 혼돈이 생기는 군요. 화가가 아니라 모르지만, 그 옛날 보리 타작은 몰라도 벼 타작은 정말로 어려운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보리는 벼 보다 탈곡이 훨신 쉽게 되기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