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을지로3가 지하철역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수제화의 명문’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70년 역사의 ‘송림제화(松林製靴)’다. 15평 매장에 들어서니, 이덕해(54) 사장이 중년의 손님에게 등산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송림제화 현황
■설립연도 : 1936년(서울 중구 을지로3가)
■대표 : 이덕해 사장(2대째)
■연간 생산 신발 수 : 3000~4000켤레
■매출 : 5억원(2005년)
■제품 종류 : 등산화, 신사화, 숙녀화, 장애인용 특수신발, 골프화 등
등산화, 신사화, 장애인용 특수화 등을 만드는 송림제화는 발 치수를 재는 것부터 밑창을 부착하는 것까지 10가지 공정을 100%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상담에만 1시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 김동완(49) 실장은“정확하게 치수를 재고 발 모양을 측정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신발을 만든다”고 말했다.
▲ 송림제화 이덕해 대표가 서울 을지로3가 매장 진열대 앞에 서 있다. 송림제화는 70년째 이 자리에서 수제 구두·등산화의 외길을 걷고 있다. /허영한기자 younghan@chosu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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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부터 한 자리에서 운영
송림제화는 1936년 지금 자리에 이덕해 사장의 부친인 고(故) 이귀석(李貴石) 옹이 문을 열었다. 선친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는 양화점에서 구두 기술을 익힌 뒤‘송림화점(靴店)’을 세웠다. 80년대부터 아버지를 도왔던 이 사장은 1996년 선친이 세상을 떠난 뒤 가업을 이어받았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무역업 등을 하다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던 것. 이 사장은“송림이란 말에는‘늘 푸른 소나무처럼 평생 가는 신발을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송림제화는 원래 신사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러다 60년대 초 등산화를 만들면서 등산화 업체로 더 유명해졌다. 탐험가 허영호씨가 이곳 신발을 신고 세계의 고봉(高峰)을 정복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0년대 서울 상도동 자택 감금 시절, 집마당을 하도 많이 거닐어 등산화가 닳자 비서를 보내 밑창을 갈았다고 한다. “오른발과 왼발의 크기가 다를 수도 있고, 같은 치수라도 사람마다 볼 너비가 제각각이죠. 기성화를 신으면 신발에 발을 맞추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송림은 고객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듭니다.” 송림은 여성 정장화는 만들지만 하이힐은 취급하지 않는다. 하이힐은‘편한 신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7명의 직원과 함께 연간 3000~4000켤레를 만든다. 1층 매장 위 3·4층이 작업장이다. 대형 제화업체가 연간 100만켤레 이상을 생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보통 한켤레를 만드는 데 4~7일 정도가 걸린다. 이래서 올린 지난해 매출은 5억원 정도.
◆“한 명이라도 손님 있으면 신발 만들 것”
한때는 남대문·동대문시장에 송림 등산화를본뜬 제품이 깔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수제화 업체는 몇 곳 남지 않았다. ‘송림’의 이름을 앞세워 제화공장을 차리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주위 제안도 있었지만 창업주는 수제 구두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장은“백화점 요청으로 구두를 진열했다가 우리 구두에 먼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버님이 수거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수작업으로 신발을 제작하다 보니 많이 만들지도 못하고 인건비 비중이 커 크게 남지는 않습니다. IMF때는 매출이 확 줄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됐죠. 하지만 한 명이라도 찾는 손님이 있다면 신발을 만들 겁니다.” 이 사장은 선친이 남긴 100여통의 편지를 보여줬다. ‘편한 신발을 만들어줘 고맙다’는 고객들의 편지다. 이곳을 찾는 손님 대부분은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다. 등산화의 방수 처리 기술, 코르크 소재를 이용해 충격흡수가 잘되는 중창(구두의 창을 튼튼하게 하려고 겉창 속에 한 겹을 덧붙여 댄 가죽) 등은 송림제화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이 같은 품질은 20~30년 이상 경력의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아들(이동주·26)이 처지가 되면 구두일을 맡을 것이라고 하는데, 말릴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