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8일 금요일 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른이답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밤 11시 휴대폰이 울렸다. 엉겁결에 받고 보니 전화가 아니라 페북 메신저였다.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화면에 웬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히죽이 웃고 있었다. 딴지일보 김창규 편집장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지금 어디 계세요? 호주에 계신 것 아니세요?”
“한국에 있어. 왜?”
“아! 네. 이종섭 때문에 기자를 호주에 보내려고 하는데 의논을 드릴까 해서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일단 통화를 끝내고 간다면 호주까지 가는 김에 3월 13일 켄버라 대사관 항의 집회에 맞추어 교민들은 골고루 만나서 취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사건의 중심지인 캔버라 전한인회장인 계명주에게 염장을 지르려고 “대사 환영준비 잘되어 가나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임기가 끝나서 다행이지만 황당하네요.”라고 답이 왔다.
보통의 경우 호주 한인동포들은 켄버라에 있는 대사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대사가 오는지 가는지도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렇게 된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3월 10일 일요일 작가와 만나기로 했는데 소식이 없어서 편집장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준비되면 연락 드릴거예요. 저희도 지금 어떻게 될지 몰라서!!”라고 답이 왔다. 이어서 다시 좀 있다가
“죄송합니다. 작가님이 지금 취재 구성안 짜고 있는데 아직 작업이 다 안됐나봐요. 굳이 기다리진 마시고 연락 오면 받아 주시길”
13일 20명의 시드니 동포들이 이종섭 환영식이 아니라 치열하게 축출 촉구 시위를 하기 위해서 생계를 뒤로 미루고 왕복 8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달려갔다. 마침 지난 2월에 캔버라로 임지를 옮긴 박웅걸 목사님에게도 참여를 권했더니 대사관 앞에 가서 호주 경찰들과 함께 예정 보다 늦은 시드니 동포들을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여러모로 애를 썼을 시드니의 지인들의 수고와 헌신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특별히 버스 대여 경비를 혼자서 담당한 동년배인 이회정 회계사의 헌신에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참으로 남의 나라에서 한국 사람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다.
사실 아무리 민주주의 나라라고 해도 남의 나라에서 외국인들 틈에서 한국말로 쓴 피켓을 들고 한국말로 구호를 외치는 일은 몹시 어색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중국인들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일신의 안녕을 잊고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도 그랬을 것이다.
제발 한국에 별 일이 없어서 외국에서 더 이상 쪽 팔리는 집회를 할 필요가 없으면 좋겠다. 약간의 희생은 참을 수 있지만 쪽 팔림은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에게 대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어 주었다. 이명박 시절에 호주의 장애인 제도 견학을 온 장애인 대학생들을 안내한 적이 있었다. 일정 중에 캔버라 한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순서가 잡혀 있어서 장애인 문제와 대사관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방문은 피차에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에서 대사관을 통하여 섭외를 했고 대사관에서도 방문을 원한다고 해서 시간을 잡았다. 아마 대사관 사람들이 업무 보고 거리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단순히 교섭만 해준 것 보다는 장애인 대학생들의 공관방문 그림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는가?
대사관에서 총영사를 비롯한 직원들이 나와서 일행을 맞아 주었고 중간에 대사는 와서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떴다. 사실은 예산에 쪼들리는 학생들 측에서 혹시 점심시간이니 점심을 해결해 줄 수 없겠느냐는 뜻을 조심스럽게 표현했었다. 대사관은 그들이 어떤 경과를 통해서 호주에 오게 되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큰 일(4대강을 암시하는) 때문에 예산은 삭감되고 환율이 높아져서 대사관의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
아마도 대사관에서는 자기들 수준으로 생각해서 10명을 대접하자면 돈이 많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지만 사실은 그 동안 10명의 식사 중에 제일 많은 액수가 180불이었다. 일생에 한 번, 수 많은 경쟁을 뚫고 호주까지 온 장애인 대학생들에게 200불을 썼다면 그 돈은 고국에서 오는 어느 고위 인사를 접대하는 것 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나올 때 나는 일부로 "얘들아! 이 생수도 세금으로 산 것이니까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챙겨라."라고 했다. 결국 대사관 앞에서 직원들과 '김치~'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켄터키 치킨에 가서 80불을 내고 점심을 해결했다.
아들 딸 같은 장애인 대학생들이 점심시간이 임박해서 찾아왔는데 '예산이 없다'고 했던 그 대사는 직업 외교관이 아닌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에 들어갔다가 호주대사로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참으로 명박스럽게 느껴졌다.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 가서 물만 먹고 왔지만 우리는 캔버라 한국 대사관에 가서 물만 먹고 왔었다.
18일 죽돌에게서 “이종섭이 계속 사퇴한다는 소리가 나와서 여기도 지금 복잡해졌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종섭이 낙마 수순을 밟을 거라 호주 일정은 취소될 것 같습니다. 목사님 한국에 계시니 또 일 있을 때 SOS 치겠음다…! 추이보고 작가님께 연락드리라고 전했습니다.“라고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20일 수요일 아침 갑자기 김창규 편집장이 저녁 비행기로 주진우 기자와 같이 호주로 간다고 연락이 왔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었지만.
“이종섭이 쫓아갔다가 허탕치는 이야기도 재미 있겠네...ㅎㅎ. 항공료만 되면 현지 경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웬만하면 내가 숙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빨리 갔다가 돌아올 것 같습니다. 일단 작가님이 여러 가지로 동선 짜는 중입니다…!”
“현지에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네. 어떻게 구했습니다 목사님! 일단 저희는 호주로 갑니다. 이종섭 관련 내부 정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꼭 잡고 인터뷰 하고 싶어서….”
“알았어요.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요.”
그러나 그날 결과적으로 기습적으로 날라가 취재를 하려던 일행은 이종섭의 기습 귀국의 공격을 받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마당에” 일행은 탑승을 해서 목요일 아침 시드니에 도착했다.
“목사님! 주호주대사관 직원 중 아는 분 있나요. 저희랑 전화 인터뷰가 가능하다거나”
“대사관 직원은 규칙상 언론과 접촉 못해요.”
“일단 왔으니 뭐라도 해서 가겠습니다. 저희는 좀 있다 켄버라로 이동합니다.”
“직전 한인회장 만나봐요.”
“아! 여기서도 추천 받았습니다…!”
“일정이 계속 바뀌는데 계속 목사님께 연락 드리겠습니다…!”
일행은 3시간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캔버라로 갔다. 대사관 규칙상 불가능한 것을 모를 리가 없으면서 “혹시 대사관에 인터뷰 할 사람이 없겠느냐?”고 전화가 온 것을 보고 얼마나 막막 했으면 그러랴 싶었다.
나로서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취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근본이 천방지축 신출귀몰한 사람들이니만큼 믿고 기다려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연결을 해주는 일이다. 통역을 위해서 박웅걸 목사를 연결했다.
호주인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만 해서 한국인들과 접촉이 많이 없었을 박웅걸 목사에게는 한국인들 중에도 특이체질에 속하는 주진우기자와 김창규 편집장 같은 별종들을 안내해서 캔버라 정당 사무실을 이곳 저곳을 예고도 없이 무작정 방문해 보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22일 금요일 저녁 죽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목사님! 박웅걸 목사님이 너무 잘 도와주셨습니다! 안부도 꼭 전해달라 그러더군여. 지성수 목사님 청은 거절할 수 없다고 ㅋㅋㅋ 넘 감사합니다…!!!
내가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고 아내가 “호주방송에 연결을 좀 해보지”라고 해서 “다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SBS에 한국 PD가 있으니까 연락 할 수는 있지만 창피해서 그럴 수는 없지”라고 하니까
“왜 그렇게 좁게 생각해?”라고 해서 서로 웃었다.
평생 동안 "도대체 당신은 경계가 어디냐?" 고 묻던 아내에게 처음으로 ‘좁게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
3월 22일 금요일 밤 시드니에서 만날 사람을 수배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런데 시간이 토요일 하루 밖에 없고 현지 사정이 가변적이어서 적절하게 인터뷰 대상을 찾아서 진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밤새 이 궁리 저 궁리 하느라고 잠을 설쳤다. 전 한호일보 사장 고직순, 한정태 시의원과 인터뷰 약속을 했다.
23일 토요일 이번에는 캔버라 국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가 열렸다. 1 시간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서 멜번에서 왕복 16시간 운전을 해야 했던 멜번 촛불대표가 열변을 토했다. 동포들의 요구 사항은 ‘이종섭 반품’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이종섭이 자진사퇴함으로 결과적으로 호주 한인동포들의 요구데로 '반품'이 되어 사람도 반품이 될 수 있다는 소비자보호운동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호주 한인 동포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일조를 한 것이 분명하기에 최소한 본전은 건졌다는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일요일 밤 10시에 김창규 편집장에게서 도착해서 월요일 녹화할 편집회의를 끝냈다고 전화가 왔다. 내 이름을 엔딩 크래딧에 넣는다고…..
방송을 보면서 워낙 상황이 긴박해서 그것까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궁금했던 것은 돈 문제였다. 가난한 유튜브 방송에서 비행기 값만 해도 1,000만원 정도 되었을 터인데 4명 취재단의 경비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하는 것을 시종일관 걱정했는데 방송을 통해서 실상을 알게 되었다. 3일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소고기 값이 싼 나라에서 계란을 먹었다니……좀 더 일찍 충분히 의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밥 한끼라도 제대로 먹도록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아팠다.
주진우 기자가 드디어 그 동안 검찰이 꼭꼭 숨겨온 이재명 암살미수 범인의 변명문을 기상천외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입수해서 공개했다. 공개 전에 죽돌 편집장에게서 자료와 함께 메시지가 왔다.
“보낸 자료 아직 어디에도 공개가 되지 않은 자료라 각별히 보안 부탁드립니다. 자료에서 전광훈 목사나 극우 우파 기독교 세력의 핵심 키워드를 찾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니 왜 검찰이 그토록 철저히 숨길 수 밖에 없었는지 그 한 많은 사연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아 거슬러 줄만 했다. 검찰은 범인 보다 범인의 배후 세력을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배후 세력이라기 보다는 범행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생각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즉 검찰은 널리 알려서 예방해야 할 치명적 독성이 있는 병균을 총력을 기울여 보호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광화문에서 울려 퍼지는 극우 태극기 부대의 논리와 광훈 복음의 잠뽕인 것이다. 범인은 바로 태극기와 광훈복음의 결합이 만들어내 제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범인은 똘아이가 아니고 그들의 논리에 의하여 철저하게 학습되고 완벽하게 조련된 전위조였던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자칭 순복음이라고 하는 잡복음을 유치한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보니 '광훈 복음'은 완전 테러 신앙이다. 즉 자객 양성소인 셈이다.
하기는 예수 당시에도 유다가 속했던 '열심당'이라고 하는 단도를 품고 다니는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하고 십자가를 졌다.
역사에는 광훈 복음처럼 종교의 이름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세력이 항상 있어왔다. 전광훈이 한참 자랄 때 사랑실천당을 창당하고 발기인대회를 갖고 용맹스럽게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사회 일각에서 친북반미 사상을 가진 좌파들이 들고 일어나 난동을 부리며 사회를 혼란시키고
국가를 존폐의 위기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학법도 법이라고, 동성연애법도 법이라고 만들었냐. 국회의원 개새끼들, 왜 잠자는 목사들의 코털을 건드나.
(중략)
국회를 100프로 점령하고 299명 다 채워서 예수 안 믿는 놈은 감방에서 5년, 얼마나 좋아.
내가 군사독재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생각이 보통 독재가 아니다.
(중략)
끝까지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섬을 하나 정해놓고 중들을 집어넣어 헬리콥터로 컵라면만 떨어뜨리자.
예수도 안 믿는 인간들이 왜 살아.”
이런 교시에 감명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 암살자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