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지(鄭麟趾, 1397~1478)는 하동정씨 시조인 고려 평장사 정도정(鄭道正)의 10세손이다. 어릴적부터 천재소리를 들었고 용비어천가를 박팽년등과 공동으로 제작하는 등 훈민정음보급에 공이 컸다. 남원 광한루(廣寒樓)도 공이 작명한 것이고 수학과 과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우고 옛날 동료라도 반대세력이면 가혹하게 대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고리대로 재산을 수만석 모았고(당시 4대 부자중 한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여 세조에 무례하게 구는 등 취중실수가 잦았다.
* 한양조씨와 사이에 1남1녀, 계처 경주이씨와 사이에 4남을 두었다. 영의정을 지냈고 선조의 생모가 공(公)의 증손녀이니 가문이 번성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연산군때 갑자사화(1504년)로 부관참시당하였고 경주이씨 석물까지 제거당하였는데 중종이 장례를 다시 치루어 주었다. 사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 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원로들을 숙청한 사건인데 정인지로서는 억울한 점이 있다.
* 공은 풍수에 일가견이 있어서 세종때 풍수강의의 총책을 맡았고 경복궁이 흉지라고 주장한 최양선을 물리쳤다.
2. 말이 많은 묘(충북 괴산 외령리321-1)
이 묘역은 풍수적으로 괴이하게 생겨서 여러 견해가 있고 심지어 정인지 묘는 헛뫼이고 유골은 전순에 암장되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부관참시후 복원할 때 원래 장소에 묻었는지 모르겠고, 동산 크기만한 전순은 고양이에 해당하는 안산의 바위를 보이지 않게 보토를 하였다는데 원형을 몰라서 도대체 모르겠다.
① 부부 묘가 전부 혈처이다. 맥이 옆에서 들어온다는 견해
② 위에 있는 경주이씨 부인 묘가 혈처이고 정인지 묘는 혈이 아니라는 견해
③ 이곳에 혈이 없다는 견해
④ 이씨 묘옆으로 내려와 혈이 맺힌다는 견해.
3 답사
* 부관참시 후 복원할 때 원래 장소에 묻었는지 모르겠고 크다란 전순은 고양이에 해당하는 안산의 바위를 보이지 않게 보토를 하였다는데 도대체 원형을모르겠다.
* 현상태를 기초로 간산해보니, 주산에서 기복하면서 내려오다가 혈처 뒤에서거의 평지수준으로 내려왔고 급히 솟구쳐 구불거리는 장유(長乳)를 만들고 끝머리에 큰 왕릉만한 동산을 만들었다. 장유중 이씨 묘는 맨위에 쓰고 정인지 묘는 중간에 있는데 전순이 동그랗게 솟아 자기안이 되었다. 이씨 묘는 기운이 멈추지 않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고 정인지 묘는 양옆이 좁아 백호쪽 봉분은 보존하는데 신경을 써야된다. 전순은 보토하였다는데 등고선을 보면 3~5미터 높이지는 않았을가? 이런 지형에서는 보통 동산위에 혈이 생기지만 이곳은 바람을 맞기 때문에 불가하다. 전체형세를 보면 혈이 생길 것 같다.
정인지가 제천 관찰사로 있을 때 신후지로 잡았다고 한다. 공이 당대의 풍수 고수라고 하나 이곳엔 어디에도 혈이 없다. (20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