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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빛바랜 기억 따라 군산(群山) 봄 마중 여행
아직 날씨는 쌀쌀하지만 어느덧 마음 깊은 곳에는 봄꽃이 활짝 피었다. 군산 구시가지를 걷다보면 아련한 추억 속 빛바랜 사진처럼 옛 기억이 밀려오고, 고즈넉한 풍경에 여행의 즐거움은 깊어간다. 아름다운 풍경은 바쁜 일상에 지친 심신을 휴식하게 하는 보양식과 같다. 군산으로 봄 마중 여행을 떠나보자! 군산시 장미동.. 장미동이란 예쁜 이름입니다. 장미꽃이 활짝 펴서 장미동이 아니라 수탈한 쌀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해서 장미(藏米)동이라는 것입니다. ◈100년 전 군산의 모습이 그대로 근대역사 문화거리 군산(群山)은 금강이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자 호남의 곡창지대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이곳을 수탈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아직까지 도시 곳곳에는 그런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근대문화유산답사의 길목에는 항상 군산(群山)이 함께 한다. ○군산항(群山港)의 개항과 변화 조선시대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稅穀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되어 경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해안 일대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개항장을 관리하는 옥구감리서를 두었다. 대한제국은 군산 조계지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조계지로 정했으나, 개항 이후 군산(群山)은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종속되어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군산(群山)의 성장과 함께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충청, 전라, 경상도 농민과 지식인, 자산가들이 새로운 삶터를 찾아 군산(群山)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차별받는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호남의 쌀과 물류가 모여들었던 전북 군산(群山)은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에게 수탈을 당해야 했던 민족의 역사와 아픔이 깃든 곳이다. 그 당시 지어진 건물들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저항의 흔적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군산에서도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바로 근대역사문화거리 일대이다.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100여 년 전에 지어진 목조가옥과 관청건물, 사찰 등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 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든다. 구 군산세관 건물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에 지어져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다. 내부 는 목조로,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고풍스러 운 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현재는 내부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어, 옛 군산세관의 관련 서류와 도장, 제복 등을 살펴볼 수 있고 군산(群山)의 100년 전 모습을 담은 빛 바랜 흑백사진들도 관람할 수 있다. 근대역사문화거리 골목 안쪽에서는 띄엄띄엄 일본식 가옥들을 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히로쓰 가옥으로, 이곳은 영화 <타짜>와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정원과 대나무 창살을 댄 창문, 다다미방 등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옛 히로쓰 가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는 동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군산(群山) 출신인 고은 시인이 불가에 입문한 곳으로도 유명한 동국사는 국내에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로, 경내를 둘러보면 다른 사찰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의 흔적은 일본인 거주지역 밖인 구암교회, 이영춘 가옥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암교회는 28번이나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의 중심지, 이영춘 가옥은 소작인들의 건강을 살피고 민간의료보험, 학교급식, 양호교사 등 다양한 의료복지를 실행했던 이영춘 박사의 공간이다. 구암교회는 현재 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기념관 내부에는 당시 선조들의 항서와 독립운동 연표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독립운동을 하며 사용되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독립운동가가 사용했던 권총과 소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영춘 가옥은 서양식과 한국 전통 양식, 일본식의 세 가지 건축양식이 합쳐져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드라마 <모래시계>가 촬영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역사는 책장 속이 아닌 현장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법. 군산의 곳곳에 남겨진 건물과 거리에서 100여 년 전 군산의 모습과 그때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자랑스런 문화유산 일제강점기 수탈과 억압의 세월을 견디어 낸 군산의 사람들은 강한 의지로 오늘의 군산을 만들어 냈다. 당시 군산 지역의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억압과 질타를 받았다. 군산 노동자들은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보다 나은 처우개선을 위해 조직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군산항을 비롯한 개항장에는 개항초기부터 부두노동자들의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일제 강점기 군산에는 수많은 조합들이 만들어져서 민족운동의 중추지대로서 기대를 받았다. 많은 역사의 기억들이 드나들었던 군산의 앞바다. 숱한 역사의 이야기를 간직한 문화재들이 오늘의 군산을 만든 것은 아닐까? 군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유산들은 그 옛날의 빛나는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에는 두 개의 보물이 위치해 있다. 바로 보물 276호인 발산리 5층석탑과 보물 234호인 발산리 석등이 그것이다. 두 보물 모두 완주군 삼기리 봉림사지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반출해 옮겨 놓았다. 발산리 5층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신라탑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발산리 석등 역시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발산리 석등 하대석에는 8장의 연꽃잎이, 간주석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용의 모습도 새겨져 있는데, 이처럼 기둥 돌에 용이 새겨진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발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1900년대 일본인 농장주 시마타니의 집과 농장이 있던 곳으로, 당시 일본인 농장주가 수집했던 문화유적이 다수 보존되어 있어 군산(群山)에서 문화유적 답사를 할 때 들러야 할 필수코스이다. 나포면 장상리에 있는 불주사에는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불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불상은 임진왜란 직후의 조선시대 관음보살좌상을 대표할 수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꼽히고 있다.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된 절로 전해지는 불주사 건물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귀중한 유적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군산(群山)의 유일한 2층 누각정자인 옥구향교의 자천대는 조선후기 누각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된 이곳은 동국여지승람에 ‘서해안에 위치하여 지형은 넓고 평평하며 샘과 돌이 가히 즐길 만하다. 세상에 전하기는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바위산 옆 연못의 빛깔이 항상 붉어 붉은 연못가의 바위산 이라는 뜻에서 자천대라고 불렸던 이곳은 1934년에 비행장 확장공사로 석공들이 부쉈는데, 그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천대의 2층 누정을 옥구향교로 이전했다고 한다.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전해져 온 군산의 유적들. 이곳들을 한 곳 한 곳 돌아보며 오래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푸른 자연이 가득한 그곳 낭만적인 바다와 섬
◈선유도 본래 군산도라 불렸으나 섬의 북단 해발 100여미터의 봉 정상의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유도라 불리게 되었다. 2.13km의 면적에 500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는 선유도는 신시도, 무녀도, 방축도, 말도 등과 더불어 고군산군도를 이루며 군도의 중심섬이다. 고군산열도의 중심지로서 서해의 중요한 요충지를 맡고 있는 선유도. 그래서 과거에는 조선시대 수군의 본부로서 기지역할을 하기도 했다. 군산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을 타면 1~2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선유도는 그 비경이 훌륭하고 오밀조밀 주변의 섬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군산을 찾은 사람들이 필수코스로 다녀가는 여행지이다. 섬 여행이라고 하면 어쩐지 ‘여름’이라든지 ‘휴가’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물론 선유도에서 보내는 여름과 휴가도 여느 곳 못지않게 환상적이지만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휴가철이 아닌 때에 찾아도 좋은 섬이 바로 선유도이다. 선유도 섬여행을 알차게 즐기는 방법은 총 네 가지. 첫 번째는 걸어서 이웃 섬들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네 개의 섬은 다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섬 이곳 저곳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섬을 두 발로 옮겨 다니며 이곳 저곳 산책 겸 구경해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자전거여행이다. 자전거로 선유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장자도와 대장도를 거쳐 오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리고, 무녀도까지 다녀오는 데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간간히 맞이하는 절경들 속에서 틈틈이 산책을 즐긴다고 해도 3~4시간이면 여유 있게 네 개의 연결된 섬을 모두 들러볼 수 있다. 선유도는 고군산열도의 중심지로서 서해의 중요한 요충지이다. 조선시대 수군의 본부로서 기지역할을 다했던 선유도는 수군절제사가 통제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여/송 무역로의 기항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 승리 후 선유도에서 열하루동안 머물며 전열을 재정비하는 등 임진왜란 때는 함선의 정박기지로 해상요지였다. 고군산열도에서 8경이라는 명소가 있는데 고군산 8경의 중심부를 이루는 곳이 선유도의 진말이다. 선유도에는 이씨, 김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박씨, 임씨, 고씨 등도 고루 살고 있다. 민간신앙으로서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부락제 등이 있었으나 전통이 단절된 상태이며, 유물 유적으로는 패총과 수군절제사 선정비의 비석군이 있다. 남서쪽에 있는 장자도와는 장자교로 연결되 있어 쉽게 왕래할 수 있으며 군산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여행객이 선유도에서 신선처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먼저 이웃 섬들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는 섬끼리 다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서 다녀올 수 있다. 배를 타고 들어온 섬에서 또 다른 섬들을 걸어서 다녀오는 일이 조금은 색다르다. 자전거로 선유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장자도를 거쳐 대장도까지 다녀오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고, 무녀도를 다녀오는 데도 1시간이면 넉넉하다. 이런저런 구경을 한다 해도 3시간이면 여유 있게 네 개의 섬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선유도는 옛날엔 3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파도에 쓸려온 모래가 오랜 세월 쌓여 언덕을 만들면서 지금처럼 하나로 연결됐다. 바로 '선유 8경'의 하나인 명사십리 해안이다. 십리라 하지만 실제 길이는 1.5km쯤 된다. 그러나 백사장의 폭이 200m이고 수심은 어지간히 멀리 나가도 2m 정도에 불과하니 가족 피서지로는 더 없이 좋다. 이 명사십리 산책이 선유도에서 두 번째 즐길 거리다. 세 번째는 갯벌 체험. 썰물 때 갯벌에서 소금으로 맛조개를 잡을 수 있다. 갯벌의 구멍에 소금을 조금씩 뿌려놓으면 맛조개가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반쯤 올라왔을 때 잽싸게 잡아채면 된다. 또 바지락, 모시조개 등을 캐고 소라를 줍거나 농게, 달랑게를 잡을 수 있다. 그러니 취사 도구와 양념을 준비할 일이다. 해수욕장 양쪽 끄트머리 근처의 갯벌이 이런 갖가지 갯것을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선유도 충무공과의 인연은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치닫던 선조 30년 (1597) 9월 21일 충무공은 명량해협의 울돌목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후 지친 몸을 선유도에 닻을 내렸던 것을 말한다. 왜적이 명량해협으로 돌진해 왔는데 적 함대 133척 중 31척을 침몰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된 충무공은 12척 이라는 숫적 열세 때문에 적의 추적을 피해 북상하여 위도 를 거쳐 선유도에 도착한 것은 해전 6일 후인 9월 21일 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이 선유도에 도착한 후 몸살로 몹시 앓았으며 가을 태풍으로 선박의 이동이 용이치 않았다. 선유도에서 12일간의 휴식을 취한 장군은 선유도를 떠난지 14개월 후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라 할 수 있는 노량해전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선유도 갯벌은? 일반적으로 조류(潮流)로 운반되는 모래나 점토의 미세입자가 파도가 잔잔한 해역에 오랫동안 쌓여 생기는 평탄한 지형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은 만조 때에는 물 속에 잠기나 간조 때에는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며 퇴적물질이 운반되어 점점 쌓이게 된다. 한국 서해안의 조차는 해안선의 출입이 심하고 긴 만(灣)이라는 지형적 특성에 의해 조차가 매우 크다. 국내 총 개펄 면적의 83%가 서해안 지역에 분포하며 캐나다 동부 해안, 미국 동부 해안과 북해 연안, 아마존 강 유역과 더불어 세계의 5대 갯벌로 한반도와 중국의 요동.산둥반도로 둘러싸인 서해 바다 연안에 포함되는 갯벌중의 한 곳 입니다. 개벌은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져 1980년대 후반부터 '서해안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간척·매립사업의 대상이 되었으나, 최근 하천과 해수의 정화, 홍수 조절, 생태적 가치 등이 밝혀지면서 보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새만금간척 사업으로 갯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에 힘입어 관광객이 늘고 있는 여행 포인트이다. 바지락, 생합, 가무락, 맛조개등의 조개잡이 갯벌 동물체험의 장소로 선유도와 무녀도에서 갯벌체험 관광의 재미를 맛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즉석해서 잡아올린 해산물로 요리를 즐겨 보는것도 선유도 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한 부분이다 ○최치원 전설 고군산 군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으로 신라초기에 본 신시도 주변에 풍성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여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신시도는 신라시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떨친 최치원선생이 일시나마 살았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선생이 신시도를 찾게 된 연유는 옥구군 옥구면에서 한동안 서원을 차렸을 때 해변가인 하제에서 서해를 바라보다 신시도의 우뚝 솟아있는 월영봉을 쳐다보고 곧바로 명산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뗏목같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에 도착 월영봉에 올랐다는 것이다. 최치원선생의 자는 고운 또는 해운이라고 부른다. 월영봉에 오른 고운은 그곳을 월영대라 칭하고 돌담을 쳐 거처를 만들어 놓고 때로는 생식을 하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해발 199m 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로 가을이면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단풍은 장관을 이룬다. 주민들은 너나없이 한폭의 동양화를 대표한다고 한다. 신시도 주민들이 이월영대를 찾아 글을 읽은 최치원선생의 자가 고운이었음에도 해운이라는 자하나를 지어 부르게하여 신시도를 영원히 연상케 했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의 글 읽는 소리가 중국 남경까지 들렸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올 만큼 큰 소리로 글을 읽기도 하였지만 주변의 공기가 맑고 깨끗한 자연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였음을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는 신시도 마을 청년들이 고운의 뜻을 기리고 지키기 위하여 고운이 글 읽었던 곳에 흔적이 남아 있는 돌담을 손질 보존하고 있을 정도로 고운이 이섬에 살았던 것을 마을사람들은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선유도가 주소를 두고 있는 서해의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섬의 무리'. 원래 이름은 섬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해서 그냥 군산(群山)이었다. 그러다 조선 세종 때 이곳에 있던 수군 진영인 군산진(群山鎭)을 육지로 옮겨가면서 현재의 군산시가 됐고, 이곳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이라 했다. 선유도에는 망주봉이 있다. 거대한 바위 봉우리 2개가 마치 등대처럼 서있다. 옛날 유배되어 온 충신이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한양 땅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하였다는 망주봉은 선유도의 상징이 됐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망주봉에서 7개의 물줄기를 가진 폭포가 생긴다고 한다. 최근 망주봉 등산로가 바뀌었다. 예전엔 명사십리쪽에 로프가 매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반대편으로 길을 냈다. 고군산군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서 '두 신선이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이다. 무녀도로 이어지는 선유대교는 86년12월31일 개통(길이 268m, 폭 3m) 장자대교 역시 86년12월31일(길이 268m, 폭 3m) 함께 개통됐다. 두 대교는 비슷해 보이지만 선유대교는 수평을 이루는 반면 장자대교는 좌우측이 아래로 기울어져 있는 특징이 있다. 선유도는 앞으로 연륙교로 뭍과 연결될 것 같다. 선유도 바로 앞 신시도까지 새만금 방조제가 이어진 뒤 다시 신시도와 무녀도가 다리로 이어지면 신시도~무녀도~선유도~ 장자도가 모두 이어지게 된다. 군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서남쪽으로 2시간 30분쯤 달리다보면 선유도의 명물인 망주봉을 만나게 된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연이 있음직한 우뚝한 두 개의 바위산, 막연한 옛날 간신들의 모함으로 귀양 온 한 신하가 있어 다시 불러 주겠다고 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임금을 그리워하며 매일 바위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 해서 그 이름을 망주봉(望主蜂)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망주봉 아래로는 초승달 모양의 완만한 모래 고운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만조가 되어 물이 가득 차면 가득 찬대로 썰물이 져 물이 빠져나가 갯벌이 드러나면 또 그대로 보는 이들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해준다. 이 해변을 따라 예전에는 모래 언덕이 높았었고 그 모래언덕을 따라 해당화가 무리 지어 심어졌었다고 한다. 해당화가 만발할 때면 그 향기로 선유도 일대가 흠뻑 취하곤 했다고 하는데 한 경찰지서장이 당뇨병에 특효라고 캐가기 시작한 이후, 당뇨병 환자들이 너도나도 뽑아 가는 바람에 지금은 해당화 한 그루 볼 수 없는 민둥 모래 둔덕만 남아있다. 햇볕 좋은 여름날 오후, 말도(末島) 쪽으로 지는 해는 장엄하여 선유낙조(仙遊落照)라고 말한다.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가 청회색으로 사위어가며 하루를 닫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그 솜씨가 놀랍다. 소나기와 함께 생겨나는 망주폭포, 비구름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을 배경 삼아 유리알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감동으로 떨려 온다. 이름난 고장이면 그러하듯이 고군산군도에도 8경이 있다. 선유낙조, 삼도귀범, 평사낙안, 망주봉, 명사십리, 그리고 장자도 앞 칠산어장에 어찌나 많은 배가 몰려와 고기잡이를 했던지 밤에는 이 고기잡이하는 뱃불로 찬란했었다는 장자어화(壯子漁火), 신시도의 월영대(月影臺), 주변 풍경이 그로 하여금 어울리게 하는데서 이름한 무산 12봉이 8경에 속한다. 이 8경 중 5경이 바로 선유도에 있다. 또 아득한 옛날, 주변 풍경이 좋아 신선들이 놀다가곤 했었다는 선유도의 최고봉인 선유봉(해발 150m)에 올라보면 인근 경치를 한 눈에 조망할 수가 있다. 선유도의 북쪽으로는 횡경도가 천혜의 방파제로 막아서고 동으로는 신시도가, 서쪽으로는 관리도와 장자도가 마주 서있어 선유도는 섬들에 에워싸여 있는 형상이다. 선유봉 정상에 서면 방축도, 명도, 말도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모습이 마치 어깨동무라도 한 것 같다. 선유도 주민들의 주소득은 바다에서 얻어진다. 약간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전답을 합해 봐야 섬 전체 면적의 10%를 겨우 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가정은 평균 4.5톤의 소형어선을 이용하여 연안어업에 종사하거나 해태(김)양식을 하고 있는데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봄, 가을엔 소라, 새우, 멸치잡이를 하고 겨울엔 해태양식, 여름에는 휴어기로서 선유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대선(貸船)을 해서 수입을 보태기도 한다. 한때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설치돼 수군절제사가 임피, 군창, 만경, 김제, 부안, 무장, 고창, 영광 등 8개군을 다스렸을 만큼 번성을 구가했던 선유도, 곡창 호남의 관문으로 군창이 군산으로 바뀌면서 당시 고군산도에 옛고(古)자가 붙어 잃어버린 군도의 중심지 선유도는, 21세기 서해안 시대를 맞아 다시 한 번 일어서려 하고 있다. ◈무녀도 고려말 이씨가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마치 무당이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녀도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장구모양의 섬과 그 옆에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붙어 있어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모양이라고 하여 무녀도라 불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섬의 형태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무녀도라 불리워졌음. 무녀도에는 논밭이 많다. 섬에는 18만평에 달하는 염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에서만 소금을 만들고 있다. 예전의 염전은 이제 습지로 변해가고 있다. 또한 고려 말,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오면서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무녀도는 장구모양의 섬과 그 옆에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붙어 있어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섬이다. 선유도와 대장도, 장자도와 모두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무녀도는 높은 산 없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하기 좋은 섬이다. 북쪽 해안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제염업을 하고 있으며, 무녀1구의 산 구릉에는 패총무더기가 있어 선사유적을 탐사하는 쏠쏠한 재미도 찾을 수 있다. 어촌의 삶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는 무녀도. 어딜 둘러봐도 아름다운 어촌 풍경이지만 이 섬에 가면 꼭 보고 와야만 하는 장소가 있다. 바로 모감주나무 군락지와 완양염전, 그리고 무녀도해수욕장과 갯벌체험장 네 곳이 그곳이다. 무녀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모감주나무는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나무로, 해안과 인접한 곳에서 주로 자라며 무녀도에는 4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열매는 비누대용이나 염주의 주재료가 되어 금강자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자연적으로 자라고 있는 나무이므로 무녀도에서 모감주나무를 발견하게 된다면 자세히 관찰해볼 만하다. 완양염전은 무녀도가 한 때 최고의 번성기를 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장소이다. 섬에는 18만 평에 달하는 염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 염전에서만 소금을 만들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활발하게 제염업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염전의 모습과 한적한 어촌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 펼쳐져 있는 갈대밭도 꼭 들러봐야 할 코스이다. 해안절벽을 따라 나 있는 자그마한 무녀도해수욕장에서 한적한 산책을 즐기고 나면, 갯벌에서 다양한 생물을 관찰하고 어패류를 직접 캐내는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다. 선유도와 대장도, 장자도, 무녀도는 모두 다리로 연결되었고, 주변에 장구도가 위치해 있다. 입도 시기는 고려 말 이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전해진다. 섬 이름은 원래 '서들이'라고 하였고, 바쁜 일손을 놀려 서두르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렵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기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섬이라 하여 '서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1950년대 초에 조성된 16만평의 간척지는 이 섬사람들의 부지런함을 알 수 있게 한다. 이후에 섬의 생김새가 무당이 춤을 추는 모습과 같다 하여 무녀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서남쪽의 무녀봉(131m) 외에는 높은 산이 없으며 해안선은 드나듦이 심하다. 북쪽 해안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제염업을 한다. 김과 멸치가 많이 생산되며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진다. 무녀1구의 산 구릉에는 패총이 있다. ○무녀도 염전 무녀도가 한때 최고의 번성기를 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완양염전은 작고한 군산 출신의 최현칠 옹이 1951년에 300여명의 인부들과 함께 1년간 방조제를 쌓아 총 16만평의 간척지를 만들어 그 틀을 만들고 1961년 12월 염전매법이 폐지되고1962년 1월1일부터 염전사업이 완전 민영화되자 염전사업을 시작한 곳으로 당시 군산에는 8개소의 염전이 있었는데 섬 중에서는 이곳 완양염전의 규모가 큰 편이었다고 한다. 모감주나무 군락지 열매가 비누대용이나 염주의 주재료가 되어 금강자라고도 불리우는 모감주나무는 세계적으로 희귀종이며 해안과 인접한 곳에서 주로 자라며 무녀도에 40여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갯벌체험 부드러운 감촉의 갯벌에서 조개와 게 등을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장자도 장자도는 인위적인 대피항이 아니 천연적인 대피항으로 유명하며 60여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풍요로운 섬으로서 고군산열도를 대표하는 섬이였다. 장자도는 말의 형국을 하고 있으며 바다 건너 선유도의 맥을 이룬 큰 산이 감싸주고 있어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전해진다. ※장자할머니 설화가 전해지며, 거무타령, 어름마타령 등의 민요가 전해진다.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 하여 장자섬이라 불리워지게 되었으며, 『장자할머니바위』와 『횡경도할아버지바위』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면적으로 보면 신시도(1등), 방축도(2등), 선유도(3등)에서 제일 작은 장자도 순이다. 고군산군도의 유인도 중 가장 작은 장자도는 몽돌해안과 기암이 어우러진 해안 산책로가 마치 수석 전시관을 보는 듯하다. 장자도 쪽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장자대교는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만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장자도는 예전엔 멸치포구로 유명했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포구에 젓갈통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지금은 예전같은 멸치어장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장자도의 장자할머니 전설 옛날 장자도에 선비 한사람이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살았느데 어느해 서울로 과거를 보러 선비가 떠나자 그 부인이 매일 산에 올라가 금의환향 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남편이 장원급제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은 등에 업은채 산마르로 달려 올라가 남편이 타고오는 배가 빨리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터에 드디어 남편이 나타났지만 그 남편은 등과도 하지 못하고 그 사이 새부인까지 맞아 아들까지 낳아서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크게 상심하여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고 있던 아기가 힘을 쓰는 바람에 선채로 돌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장자할머니 바위에 새끼줄이나 흰천이 둘러져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큰 인물 많이 나는 섬 장자도 장자도는 원래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하여 장자도라 불렀다고 한다. 장자도를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보면 뛰는 말 앞의 커다란 먹이그릇처럼 장자봉이 우둑 솟아있는 형국으로 눈앞의 선유도가 그 맥을 감싸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 조그만 섬에서 국회의원과 시장을 지낸 분이 나왔다. 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섬의 서쪽 바닷가에는 우둑 솟은 사자모양 바위가 있어 일명 사자바위라고 불리는데 이 사자바위는 서해를 바라보는 형태를 하고 있어 먼바다로부터 오는 액운에게서 장자도를 지켜준다고 믿고들 있다. 장자도는 고군산군도를 대표하는 섬 중 하나로,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벗삼아 다양한 어촌체험을 즐길 수 있는 마을이다. 군산여객선터미널에서 배로 1시간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자연경관이 매우 뛰어나며 어장이 잘 발달되어 있다. 섬 전체가 붉은 암석 구릉과 산맥으로 어우러져 있어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이곳. 전원적인 풍경에서 포근함마저 느껴지는 장자도에서 다양한 어촌체험과 섬 여행을 구석구석 즐겨보자. 장자도에서는 낚시체험, 갯벌체험, 홍합채취체험, 후릿그물 어장체험, 스노쿨링체험 등 다양한 어촌체험을 즐길 수 있다. 한적한 바다에서 느끼는 ‘손맛’을 제대로 본다면 장자도 바다낚시를 다시 찾게 될 정도라고. 섬 전체에는 자연홍합뿐 아니라 다양한 해산물이 서식하고 있어 해안선을 따라다니며 갯바위에서 홍합과 해산물을 캐낼 수 있다. 계절별 시기별로 다양한 체험이 준비되어 있으니 여행 전, 어떤 체험이 가능한지 미리 알아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이곳에서 즐길 만한 것이 어촌체험뿐만은 아니다. 장자도에서 바라보는 서해안의 해넘이 풍경은 일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몰 시간이 되면 산과 바다가 온통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광경을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장자도에도 꼭 둘러봐야 할 코스가 있으니 바로 장자할매바위와 사자바위이다. 장자할매바위는 장자도 옆의 대장도에 있는 전설의 바위로, 아기를 업고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으로 과거를 보러 간 남편을 기다리다 등에 업은 아기와 함께 망부석이 되어버렸다는 슬픈 전설의 바위이다. 전설 이야기와 함께 바위의 모양을 관찰해보는 것도 장자도에서 즐길 수 있는 숨은 재미다. 사자바위는 장자도의 서쪽 해변가에 있는 우뚝 솟은 바위로, 서해바다를 지켜보듯 자리하고 있어 먼 바다에서 오는 액운과 피해를 막아주고 풍어를 기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옥색 빛 바닷물이 사방에 가득한 장자도로 떠나보자. 이곳에서 경험한 섬 여행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고군산군도 섬 중 가장 섬 신시도 신시도는 신라시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떨친 최치원 선생이 일시나마 살았던 곳으로 더욱 유명한 섬이다. 고운 최치원은 명필로도 유명하여 그의 난랑비서문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해설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신시도에는 한국유학의 대학자 전간제(1841-1922년) 선생이 한동안 머룰면서 흥학계를 조직 한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신시도에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임씨할머니 전설이 있다. 신시도의 최고상봉인 월영봉 옆에는 해발 187m의 대각산이 있다. 이 대각산 줄기가 용의 형국을 하고 있는데 용머리 옆을 약간 빗긴 중간에 임씨할머니 묘터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 고군산군도의 섬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섬이다. 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신치단에 단을 쌓고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새만금 방조제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어 고군산군도 국제해양관광지 조성사업 추진의 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선유8경 등 서해의 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각산 전망대가 위치하고 있다. ○고군산(古群山)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전 고려초의 이야기로 부안땅의 하서면 장신포라는 어촌에 곽씨(郭氏)노인이 혼자된 과부며느리와 손자 하나를 데리고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 부근에는 자그마한 고을이 셋이 있었다. 어느날 한 도사가 찾아와 그 노인에게 일러주는 말이 뒷산에 있는 장군석으로 깍아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돌사람 코에서 피가 흐르는 날에는 부근 일대가 망망한 바다가 될 것이니 주의하여 살펴보았다가 피가 흐르면 지체없이 멀리 타관으로 피난을 가야 안전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도사는 사라져 버렸다. 그 노인이 손자를 등에 없고 매일같이 장군석 코에서 피가 흐르는지를 살피고만 있어서 며느리는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되어 어느날 시아버지 하는 모습을 구경해 보려고 남몰래 장군석의 코에 빨간 물감을 칠하였다. 이것을 본 노인은 “바로 그때가 왔다”면서 피난가기를 재촉하였으나 며느리는 자기가 한일이라고 태연히 웃기만하고 떠나기를 거부하였다. 이러자 노인은 손자만 데리고 한없이 떠나갔는데 부근 3개의 고을은 말할 것도 없이 노인이 거주하던 마을도 순식간에 망망대해로 변했으며 때를 같이하여 고군산 바다로부터 솟아올라와 생긴 것이 고군산 군도라는 것이다. 그 노인이 그 땅에 영주하면서 지금의 곽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시도 임씨(林氏) 할머니 전설 신시도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임씨가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손가락을 펴지 못하고 양손 모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처녀가 될 때까지 손바닥을 한 번도 펴보지 못하 고 주먹을 쥔채 스무살을 넘기게 되었다. 부모들은 이 딸을 시집을 보내기로 하고 정혼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있던 어느날 뜻밖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집안에서 지관을 대어 바로 신시도에 있는 대각산 줄거리 용머리 옆에 묘자리를 결정했다. 지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부들이 묘쓸곳을 파기 시작하여 얼마쯤 파들어 가고 있는데 갑자기 뿌연 연기 같기도 하고 휜구름같은 것이 돌더니 흰학 한 마리가 깃을 펄럭이며 날다가 그만 떨어지더니 죽어버리더라는 것이다. 너무도 이상히 여긴 집안식구와 동네사람들은 웬일인가 하고 모두들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딸이 갑자기 끄러지며 숨졌다. 아버지 묘자리를 파다가 학이 나오더니 날다가 죽었는데 이를 지켜본 딸이 또 죽었으니 동네가 온통 난리가 난 것이다. 딸은 그때까지 펴짖 않던 주먹이 펴졌는데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친척과 주민들이 죽은 딸의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손바닥에는 임금 王자가 그려져 있었다. 더욱 큰 소동아 벌어진 것은 당연했다.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렇게도 펴보려해도 펴지지 않았던 손가락이 죽자마자 펴진데다 묘자리에서 학이 나와서 죽고 펴진 손바닥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온 마을 사람들은 죽은 딸이 여왕이 되던지 아니면 최소한 왕비가 되려던 인물이 죽었다고 하여 동네가 온통 통곡의 소리로 꽉 메워졌다. 그러자 시집갈 때 쓰려고 기르던 큰 돼지 8마리가 다음날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또 발생했다. 그리하여 임씨 처녀를 학이 나온 그 자리에 묻어주고 아버지 임씨는 그 옆에 묻어주었으며 돼지들은 부락 뒷산 마루에 묻어 주었다. 지금은 이 무덤들의 훈적이 없지만은 그때 죽은 딸은 비록 처녀였지만 수백년을 내려오는 동안 임씨 할머니라 불리어지고 있다 ○신시도 월영봉 신시도의 월영봉은 선유팔경 중 월영단풍으로 유명하다. 월영단풍이란 가을철 신시도에 있는 월영봉 앞을 지난 때면 단풍에 물든 월영봉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신시도의 월영봉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읽으면 중국까지 그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신시도 대각산 전망대 신시도는 면적 4.25㎢로 고군산군도 섬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섬이다. 신라 초기에 섬 주변의 풍성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신라 시대에는 문창현 심리, 또는 신치로 불리어 오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신시도로 개칭하였다. 최고점은 대각산(187m)으로 북서쪽에 솟아 있고, 남동쪽에 신치산(142m)이 솟아 있다. 대각산 정상의 전망대는 고군산군도와 새만금방조제 일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등산코스로 유명하다.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연근해에서는 새우·멸치·갈치·고등어 등이 잡히며, 김 양식이 활발하다. 고군산군도 섬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신시도는 신라시대 대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고운 최치원이 잠시 살았던 곳으로 유명한 섬이다. 이곳에서 최치원이 신치단에 단을 쌓고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새만금방조제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어 고군산군도 국제해양관광지 조성사업 추진의 거점이 되고 있는 신시도. 이곳에는 선유8경 등 서해바다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각산전망대가 위치하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는 포인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군산군도의 어떤 섬이 안 그렇겠냐만은 신시도 역시 볼거리와 다양한 어촌체험으로 가득한 섬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신시도에 오면 찾는 곳은 바로 월영산과 대각산. 오르기 부담스럽지 않은 산일뿐만 아니라 정상에서 보는 고군산군도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조망이 그만인 곳이다. 특히나 월영봉은 고군산군도의 주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납작하게 갈라져 송곳처럼 솟아오른 바위들이 있어 볼만하다. 정상에서 신시도를 내려다 보면 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섬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 건너편에는 우뚝 선 대각산전망대가 보이고 발 아래로는 아기자기한 몽돌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각산으로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가팔라서 약간 힘들지만 조금씩 조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힘든 것도 잊은 채 상쾌한 등반을 즐길 수 있다. 중간중간 암릉이 놓여 있어 바위를 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바위를 타야 할 때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으니 큰 걱정이나 위험 없이 산행할 수 있다. 그 밖에 섬 주변에서 즐기는 선상낚시도 신시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고, 신시도해수욕장도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휴양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이 있는 신시도는 지금도 다가올 관광객들을 기다리며 환상적인 섬 풍경을 준비하고 있다. ◈ 선유8경 고군산군도는 유인도 16개와 무인도 47, 총 63개의 도서로 구성된 천혜의 관광지이다. 거리는 군산에서 45km 지점에 위치하며 선유도를 중심으로 선유8경, 해수욕장 등 천혜의 비경과 갯벌을 간직하고 있다. 환상적인 선유도의 일몰, '선유낙조'와 유리알처럼 고운 모래가 펼쳐진 '명사십리', 7~8개의 물줄기가 쏟아져 장관을 이루는 '망주폭포', 바다 위에 모래톱이 기러기처럼 내려앉은 '평사낙안', 세 개의 섬이 줄지어 있어 바다새의 천국인 '삼도귀범', 수백척의 고깃배들이 밤에 불을 켜면 바다에 불빛이 일렁이는 '장자어화', 신시도 월영봉의 꽃 같은 단풍 '월영단풍', 마지막으로 고군산의 12개 섬의 산봉우리가 투구를 쓴 병사들 같다고 하여 불린 '무산십이봉'까지. 이 여덟 곳의 풍경만 눈에 담아도 선유도 여행을 알차게 했다고 소문 낼 수 있을 것이다. 1.선유낙조 서해바다 한가운데 점점이 떠 있는 조그만 섬과 섬 사이의 수평선으로 해가질 때 선유도의 하늘과 바다는 온통 불바다를 이루어 황홀한 광경을 연출하는데,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가슴에 파고들어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선유도의 일몰, 섬과 섬 사이의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낙조가 장관이다. 서쪽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의 감동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고한다. 2.명사십리 선유도 해수욕장의 백사장 언덕에는 해당화가 만발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투명하고 유리알처럼 고운 모래가 십리에 걸쳐 깔려 이는 모습을 달이 밝은 밤에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3km 길게 백사장이 펼쳐진 명사십리 해수욕장 선유도해수욕장의 둑에는 해당화가 만발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졌다. 고운 모래밭이 십리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모래밭에 달빛이 비치면 세상 시름을 잊을 만하다. 3.망주폭포 망주봉은 바위로만 이루어진2개의 산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북쪽을 향해 서 있다. 젊은 부부가 임금님을기다리다 그만 굳어져 바위산이 되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해발 152m 의 이 봉우리에 여름철에 큰 비가 내리면 큰 망주봉에서 7~8 개의 불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장관을 이룬다. 4.평사낙안 선유도 마을 뒷산에서 망주봉을 바라보면 은빛의 모래사장인 모래톱의 모양이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려 앉은 기러기 형상과 같다 하여 평사낙안이라 불려졌고 선유 8경 중의 하나가 되었다. 5.삼도귀범 섬주민들에게 항상 만선의 꿈과 기대를 안겨주는 것은 물론 세 섬이 줄지어 있어 모습마저 아름답다. 세 섬은 무인도로 무녀도에 속해 있으나 선유도 앞마을을 돌아서는 어귀에 서 있고 갈매기와 물오리 등 바닷새의 천국이다. 6.장자어화 장자어화는 고군산도민의 자랑이었고 이 곳이 황금어장이었다는 표징이다. 과거에는 선유도 본 마을 뒤에 있는 장자도를 중심으로 이 곳에서 많이 나던 조기를 잡기 위해 수백척의 고깃배들이 밤에 불을 켜고 작업을 하면 주변의 바다는 온통 불빛에 일렁거려 장관을 이룬다해서 장자어화 라 불리웠다. 7.월영단풍 신시도에는 해발 199m 의 월영봉이 있어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가을철에 신시도 앞바다를 지날 때면 월영봉의 단풍이 한국 병풍을 보는 듯 하다. 특히 월영봉은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 선생이 절경에 반하여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 머물며 글을 읽으며 잠시 살았다는 곳이다. 8.무산십이봉 고군산의 방벽 역할을 하는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의 산봉우리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여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무산십이봉이라 했으며 선유봉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면 하나의 병풍 또는 쩍을 막기 위해 배치된 무사들로 보인다. 마지막 방법은 갯벌체험. 선유도 갯벌에서는 썰물 때 소금을 이용해서 맛조개를 잡을 수 있다. 갯벌 구멍에 소금을 조금씩 뿌리면 맛조개가 고개를 내미는데, 반쯤 조개가 올라왔을 때 잽싸게 잡아당기면 된다. 갯벌에서 맛조개뿐만 아니라 바지락, 모시조개, 소라, 농게, 달랑게 등의 어패류를 손쉽게 잡을 수 있으니 취사도구와 양념만 준비한다면 맛있고 신선한 조개구이도 맛볼 수 있다. ◈선유도 해수욕장 (명사십리 해수욕장) 우리나라 곳곳에 '명사십리'라는 이름을 가진 해수욕장이 여럿 있지만, 간만의 차가 심해서 좀처럼 깨끗한 물을 보기가 쉽지 않은 서해안의 해수욕장답지 않게(?) 워낙 깨끗해서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 물이 차는 만조 때를 제외하고는 50여 미터에 이르는 너른 폭의 모래벌판이 펼쳐져 마치 거대한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데, 유리알 같은 흰 규사와 더불어 경치가 일품인데다 백여 미터를 나아가도 물이 허리 까지밖에 차지 않아 여름철엔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 오붓하게 해수욕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더구나 맑다 못해 차라리 코발트빛인 앞 바다를 붉은 낙조가 물들이며 떨어지는 저녁하늘은 명사십리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새삼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라게 된다. 물이 빠졌을 때(썰물)를 이용하여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래톱 끝까지 걸어갈 수도 있다. 둑방 건너편의 해수욕장 못지않게 긴 자갈밭이 펼쳐져 있어 마치 영화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유난히 맑고 깨끗한 바닷물에다 발을 담글수도 있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망주봉과 팽나무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해수욕장 주변에 적당한 장소에 야영지를 설치하면 좋을 듯하며 주위 풍경으로는 고군산도로 둘려 쌓여있으며 장자도와 무녀도로 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니 함께 즐길 수 있다. 선유 8경 중의 하나인 옥도면 선유도리에 있는 해수욕장, 천연 해안사구 해수욕장으로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곱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불린다. 100여미터를 들어가도 수심이 허리까지 밖에 차지 않고 높은 파도가 없어서 안전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다. 바다낚시, 갯벌체험,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 다양한 체험관광도 즐길 수 있으며 편의시설로는 샤워장, 화장실(5개), 방갈로(2동), 이동파출소, 보건소,우체국, 간이상수도, 상가, 여관과 민박시설 등이 있다. ○선착장에서의 거리 1) 선유도해수욕장 : 도보 15분 2) 옥돌해수욕장 : 도보 20분 3) 몽돌해수욕장 : 도보 30분 민박집 예약시 배 도착시간에 맞춰 마중 나와줌. ○몽돌 해수욕장 선유도 해수욕장을 가로질러 전월리 갈대밭을 지나 남악리 마을 뒷편으로 넘어가면 둥글둥글하고 자그마한 몽돌해수욕장이 있다. 몽돌해수욕장에서는 물가로 내려서면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들이 부딪치며 내는 청아한 소리가 듣기에도 경쾌하다. 몽돌해수욕장 정면에 위치한 방축도를 볼 수 있다. ○옥돌 해수욕장 선유도 선착장에서 통계 마을로 접어들면 아담한 옥돌해수욕장으로 통한다. 해변이 모래사장이 아니라 부드로운 옥돌이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그 풍광이 일품이다. 한적하고 조용한 경관들이 주변에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더욱 좋다. 마을 포구 방파제에 앉아서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 ◈금강철새조망대 전국 최초이자 국내 최고의 매머드급 360도 회전식 조망센터로 금강일대의 철새를 쉽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조망시설 외에도 조류공원과 철새신체탐험관, 부화체험장 등이 설치되어 있어 가족 단위 생태교육장소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조망대 (조망탑 11층) 철새 및 금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망원경 및 대형 PDP 가 설치되어 있다. ○상설전시관 (조망탑 1층) 조류의 진화과정과 철새들의 장거리 비행원리 등을 학습할 수 있는 패널과 생태 디오라마, 정보검색대 및 3D 철새 컨텐츠 키오스크 등이 설치되어 있다. ○3D 입체영상관 (조망탑 1층) 초대형 120석 규모로 철새들의 생태를 관람할 수 있고, 학회 및 심포지엄의 개최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다. ○수족관 (조망탑 2층) 금강에 서식하는 민물고기 및 희귀어류, 수서생물들의 살아 있는 모습을 직접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년중 각종 특별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동물표본실 (조망탑 2층) 희귀동물 및 금강에 서식하는 조류를 중심으로 된 박제표본 전시관으로 서식 특징에 따라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다. ○곤충 디오라마관 (조망탑 9층) 곤충들의 서식형태를 인조목 및 국내외 곤충표본을 이용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한 곤충표본 체험관이다. ○조류공원 물새장, 산새장, 맹금사, 소조장(앵무새 등)과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 등 전국적인 규모의 생태체험학습 시설이다. ○부화체험관 부화의 상징성을 반영한 전국 최초의 알모양 건물로 1층에 60여종의 새들이 알에서 깨어나서 자라는 전 과정을 볼 수 있고, 2층은 조류 생태학습 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식물생태관 식충식물, 자생식물, 아열대식물, 선인장 등 170여종의 식물들과 인조동굴을 설치하여 디지털 아트, 폭포와 안개효과 연출 및 연못을 조성하였고 앵무새장과 소조류를 방사하여 새와 함게 관람하는 사파리형 관람시설로 조성되어 있다. ○철새신체탐험관 가창오리의 외형 및 기낭, 모래주머니 등 내부구조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체험학습장이다. ○인공폭포 철새조망대 입구에위치한 인공폭포는 낮시간에는 시원한 물줄기로 여름철 관광객의 땀을 식혀주고 밤에는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하여 철새조망대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생태연못 생태연못은 갈대밭이 조성되어 있고 비단잉어 및 각종 어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갈대 등의 물풀을 이용한 자연정화시설로 항상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철새탐조회랑 탐조객들에게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추운 겨울 따뜻하게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탐조시설이다. ○회전레스토랑 10층 회전 레스토랑은 내부 자체가 360도 회전하여 전망이 좋을 뿐 아니라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맛의 고장인 군산의 깔끔한 음식 맛을 만끽하면서 금강 주변 전경과 철새들의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금강호 시민공원 백제의 관문이었던 금강하구에 1990년 하구둑이 완성되면서 주변의 갈대숲을 찾아 날아가는 겨울철새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데, 특히 가창오리의 군무를 보기 위해 많은 철새탐조객이 찾고 있다. ○금강호 시민공원 평소에는 금강변을 찾는 많은 시민들을 위하여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금강호 시민공원 군산 시민들의 운동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금강과 철새들의 모습까지 바라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진포시비공원 진포시비공원 내흥동 금강하구 연안도로 옆에 윤동주의 '서시'와 고은의 '노래섬', 이육사의 '청포도' 등 국내의 명시 14편과 타고르, 릴케의 작품 등 외국 시 6편을 높이 2~2.5m 화강석 20기에 새겨 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진포대첩기념탑 진포대첩기념탑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함포로 왜구 500여척을 무찌른 최무선의 진포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금강호 시민공원의 중앙 광장 옆에 높이 17.9m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진포대첩비가 서있다. 진포대첩이란 고려말 우리고장 군산에서 있었던 전투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로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우왕 6년 8월 왜선 500여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최소 25,000여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의 장군들로 하여금 최무선이 설계한 80여척의 병선과 역시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적을 소탕하였다. ○최초의 함포해전 진포대첩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8월에 일어난 해상전투로 왜구는 500여 척의 군선을 이끌고 쌀을 약탈하기 위해 전라도 금강 하류인 진포(鎭浦-현재 군산)를 거점으로 내륙으로 침입하였다. 당시 고려군은 군선이 100여 척에 불과했지만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火砲)를 주무기로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왜군은 군선과 군선을 연결하여 거대한 해상기지를 형성하여 위협전인 전세를 펼쳤지만 고려군은 화포로 집중 공격하여 적선 500척을 모두 불살랐다. 진포해전의 의미는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세계 최초로 군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최초의 함포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였기에 해상전투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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