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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게 하는 코로나19
누구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갖고 지내기 마련인데, 2020년엔 그 불안이 ‘코로나 19’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그렇게 평범했던 지난날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평화로웠는지를 실감케 한다. 지구상에 인간들만이 사는 것처럼 호기를 부리고 살다가 하루하루 보이지도 않는 대상-바이러스에게 쫓기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꺼림칙하다. 우울한 분위기지만 잠깐, 우방국 적대국 가리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상호 적대 관계를 끝내고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해 본다.
그러나 금방, 우리나라 현실로 돌아와 보면 대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배양 접시 역할을 한 사이비 종교 집단 ‘신천지’는 이 사태가 진정되더라도우리 사회에 앞으로 얼마나 종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지를 보여주고 있다. 신천지에는 한국 기독교의 모든 부정적인 면이 집약된 측면도 있으니 차제에 기성 기독교도 꼬리에 붙어 있던 이단을 떨쳐 내고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 왔던 사회생활을 반성한다. 그동안 영위한 모든 사회생활 속에서 긍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부정적인 영향을 서로 끼치는 일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맹목적인 소속감을 갖기 위해 어느 집단에 속하여 시간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코로나19로 그나마 몇 번 예정되었던 만남도 취소되어 익숙한 자가 격리의 시간을 마음껏 갖게 되었으니 이것도 좋은 기회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가던 교회도 안 가게 되었으니 겨울나무를 본받아 이 기간 고독을 잘 견디며 그 절정에 이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당분간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차제에 내 신앙심을 점검해야겠다. 왜냐하면 내가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확신도 부족하고 다소 맹목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교회 생활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 상식으로 판단해 보면 아무래도 너무나 많은 모순이 교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당시, 천주교 성직자들이 무지한 대중에게 범했던 잘못이 2020년 한국 종교계 내부에도 있긴 마련이 아닌가. 한국 기독교계는 성직자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평신도들의 부담이 따르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살진 양 한 마리를 먹이는 건 아흔아홉 마리 양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들꽃 할머니는 교회 다닌 다음부터 마음이 편해졌다는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교회를 다녀 늘 마음이 편치 않은가. 잘못 믿는 것일까.
어쨌든 국가적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교회도 동참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의 종교 활동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거대한 숙주가 될 수 있으니 교회가 모임에 힘쓸수록 사회 공동 이익에 역행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차제에 그동안 조금이라도 사회에 해가 되는 사고방식을 교회가 고집한 적은 없었나 반성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기독교도 종교 개혁을 해야 한다고 본다.
YouTube로 매주 온라인 예배를보는데 다른 신경 쓸 것이 없어 집중이 잘된다. 내 성격에도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예배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는 온라인이 더 적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원래 종교란 것이 ‘온라인on-line’적인 속성, 하나의 보이지 않는 ‘라인’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절대자와 나의 관계는 오프라인이 아니라 바로 온라인이었던 것이니 예배도 정도를 찾은 것은 아닐까.
어떤 누구의 개입이 없이 직접 하늘을 우러르며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했는데 뭔가 그 결심을 하는 순간 좀 불안하기도 했지만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됨을 느꼈다. 당분간 모든 것을 내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진정한 나로 돌아와서 하루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로지 하루하루를 되도록 많은 시간을 나 혼자만의 일로 채워 가기로 하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피아노학원에 가서 두드렸는데 ‘일단 오는 애들만 수업하고 있어요.’라는 원장님 문자를 받고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잠잠해지면 다시 시작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생활의 중심축이었던 ‘피아노 두드리기’를 대신할 뭔가를 찾아야 한다. 오로지 음악 감상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면서 틈틈이 내 생각을 글쓰기로 표현하려고 한다.
내 일상을 버텨 주던 ‘피아노 두드리기’도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환기가 잘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가장 전염성이 높고 또 나이 든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하니 피아노 학원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코로나 19가 유행하기 전에도 좀 찜찜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나 무료하여 시작했으니 이왕 배운 김에 즐길 정도는 칠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그동안 나를 구속하던 모든 의식儀式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시간을 알차게 채우면 된다. 어제는 세워 둔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엔진 시동을 걸고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우편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이 유일한 어제의 외출이었다.
단지 살아 있는 동안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신비롭고 귀한 줄을 깨닫고 늘 밝은 길을 벗어나 어두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습관에서벗어나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리라. 부질없는 고민에 빠져 허비하던 시간에 음악을 감상하든지 독서를 하고, 미리 만들어 걱정하기는 버릇을 작품 구상력으로 승화시켜 습작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면 좋은작품이 나오리라.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시도는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이 나이에 줄을 세워 사람을 구분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어두움에서 벗어나 오늘을 즐기자. 친구 덕분에 은퇴 후 점점 글쓰기에 취미를 갖게 되었고 꿈도 생겨 읽을 만한 책 한 권 내려는 욕심을 갖고 노력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인생이 끝나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나는 문학적인 결과물로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으니 지각생도 이런 지각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심한 대로 책을 읽긴 하는데 몇 쪽에 그치고 금방 피곤해서 책을 덮곤 한다. 나도 할 얘기는 있다. 직장 동료가 빌려준 ‘이승훈의 시론’인데, 워낙 딱딱한 내용이어서 지금까지 반밖에 못 읽었다고. 다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한 가지 느끼는 건 무엇이든지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르고 학설이 달라서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만사가 다 그럴 것이니 잘 모른다고 해도 창피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오늘도 잠시 그 ‘시론’을 펴 들고 몇 쪽 읽다가 EBS 교육방송 프로그램 중 ‘북 카페’라는 프로그램을 들어 보기로 했다. 12시부터 14시까지 방송하는 긴 프로그램인데 처음으로 거의 다 들었다. 진행자가 책도 읽어 주고 책 소개도 하는데 오늘은 아프리카 고원 지대에서 커피 농장을 했던 이가 쓴 책-out of Africa-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쉽게 풀어 쓴 ‘10번의 산책’이란 책이었다. 저자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내용을 읽어 주고 해설을 덧붙였는데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꾸준히 들으면 독서하는 습관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현관 쪽에는 아버님 초상화, 침실에는 어머님 영정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 뒤로는 보이지 않지만 좁은 길로 이어진 저세상이 느껴진다. 뵐 날이 멀지 않았다. 나 때문에 선친께서는 마음고생 많으셨다. 오직하면 내 대신 공부해 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얼마나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잘못했는지 그리고 내가 삼남매의 아버지로서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남은 생 모든 열정을 음악과 문학에 쏟아 부으며 살아가리. 아침에 일어나 눈부시게 환한 햇빛이 쏟아짐을 느낄 수 있는 생명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가리. 부르시는 그 마지막 순간, 감사하는 마음이 모든 생각이나 감정을 압도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리. 요 며칠 동안 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인생은 외로운 것이고 가족이나 친구가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니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잘못한 것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누가 용서해 주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잘못 구어진 백자는 깨뜨려 없앨 수 있지만 잘못 만들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 잘했든 못했든 같이 가는 것이다.
오늘 2020.4/21, KBS FM 명연주 명음반 후반부에 방송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서 창세기 41장-요셉이 이집트 왕의 꿈꾼 이야기를 듣고 해몽한 이야기-을 읽었다. 사실 우연의 일치로 베토벤의 기악곡을 들으며 읽은 성경 구절이지만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 춘향으로 꿈의 내용과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관련을 지어 보았다.
바로의 꿈은 이렇다. 그가 나일 강가에 서서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그 뒤에 약하고 아주 흉하고 파리한 소 일곱 마리가 올라와 살진 소를 다 잡아먹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한 줄기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동풍에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좋은 이삭을 삼켰다.
애급의 마술사들은 못했지만 요셉은 두 꿈은 결국 같은 내용이라며 해몽했다.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들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 것이니 풍년에 곡물을 거두어 흉년을 대비하면 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진행자 정만섭 씨의 해설이 들렸다. 운명의 문을 두드린다는 식의 해설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감상해야 된다며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서 베토벤이 뭔가를 표현하려는 '불꽃'을 느껴야 한다고 했는데 새롭게 다가왔다. 하긴 해설에 의존해서 그 테두리 안에서 음악을 감상하면 듣는 사람 모두가 유사한 느낌을가질 것이 아닌가. 다양한 감정이나 생각을 제한한다는 것은 너무 규격화하는 것이리라. 풍성한 감정이나 생각이 '불꽃, '바로 7년의 풍년은 아닐까. 음악 감상을 통해 그래도 뭔가 '뜨거움'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풍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셉이 왕에게 말했듯이 수확의 일부를 거두어 비축해야 하리라. 다가올 날은 7년 동안의 흉년이라고 보고 물질적∙정신적인 풍요를 위해 비축하리라.
아니면, '삶'은 '오늘'이니 7년이 아니라 사는 날 내내 '오늘'은 '풍년, 풍어' 내일은 '흉년, 흉어'라고 생각하며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야 되지 않을까. 나아가 달리 생각하면 사는 동안은 7년 동안의 풍년이고 죽음 이후는 7년의 가뭄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다. 또 삶은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니 살아감은 늘 죽음 이후를 준비하라는 말은 아닐까. 코로나 이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너무 사회, 국가, 세계화 등 점점 사회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교류를 극대화한 경향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분히 경제적인이유-상업성도 개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코로나19로 인하여 적당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지하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법이 아닐까. 앞으로 인류가 책을 가까이하게 되고 문학이 큰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
첫댓글 제목을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는 코로나' 라고 바꾸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아주 멋진 수필이네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방문해 주시니 감사!! 3월에 낙서처럼 쓴 글이라 뒤죽박죽입니다. 일단 올려 놓고 고쳐 나가려고 합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코로나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견하고 적응하는 법을 익혀야겠습니다.
"잘못 구어진 백자는 깨뜨려 없앨 수 있지만 잘못 만들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 잘했든 못했든 같이 가는 것이다." 서주님의 사색의 깊이와 울림이 잠언처럼 다가옵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상념 속에 번뜩이는 님의 예지력이 돋보이십니다. 저도 상념에 젖게 하는 좋은 글을 접할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추 선생님, 뒤죽박죽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을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서 좋은 수필 한 편이 되도록 해 보렵니다. 어제 부터 열반경-현암사-을 읽고 있습니다. 이원섭 시인이 번역한 책이 마침 집에 있어서 읽고 있는데 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