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원님의 팔순을 맞아
김광한
어느덧 80세 할머니가 되었네요
흐르는 세월
오늘도 산과 들엔 아름다운 꽃을 피워
아ㅡ 기쁨 넘치는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네
새싹이 꽃필 때엔 깊이 묻어두었던 그대를
그대를 가슴 가득히 안아 올리며 꿈꾼다
따듯한 님에 품에 안겨 행복해하는 나
사랑으로 세상을 잃어버린 내가 내가 되네
사랑으로 온 세상 얻은 나는 행복하여라
지금도 마음은 화려한 장미꽃이련만
아ㅡ아름답던 사랑 노래 부르고 싶어라
돌아보는 지난 세월은 황홀하고 아름다워라
따듯한 정이 그리운 지루한 하루하루
그리운 그대 그리워 가슴 아린 안개꽃 피어나
그리움 향기 되어 노을 속에 찬란히 흘러가고
그리움 향기 되어 노을 속에 고요히 흐르네
<전세원 ]작시, 김성희 작곡>
어느 정도 인생을 살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한때 사랑했거나 미워했던 사람들, 그리고 사업적으로 만나 머리를 맞대고 금방 뭐가 될 듯 열을 올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 같다. 평균 수명이 50도 안 됐던 시절에 인생 80년을 사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지금은 80세가 되어도 젊은 사람처럼 공원에서 공놀이하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처럼 복 받는 일이 가장 큰 복이다. 무난하게 남들에게 해끼치지 않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주는 하느님의 수명(壽命)의 복이다.
그러나 이런 복은 반드시 주위에 함께 살던 사람들의 축복이 따라야 더 값지다. 그래서 자서전(自敍傳)이 생겨났고 문학인들 사이에 기념문집(記念文集)을 만든다. 내가 세상을 보는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남이 나를 그동안 눈여겨본 객관적인 생각이 이 문집에 들어가야 문집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전세원 선생이 올해 팔순을 맞았다. 1942년생이니까 말띠이고 팔순, 엊그제 40 불혹(不惑)이라고 젊음이 몽땅 지나가 한꺼번에 늙은 것처럼 허탈해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후로도 한눈팔지 않고 세월은 굽이굽이 40년이나 흘러 팔순이 되었다. 젊어서는 공주(公主)란 별명이 붙어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줬던 전세원 선생은 나이가 들자 스스로 어두(語頭)에 할미 자(字)를 붙여 할미 공주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공주님(?)의 얼굴, 그 눈빛 속에는 남을 즐겁게 하는 웃음이 넘쳐있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눈빛이 선하고 약간은 장난기 섞인 모습에 사람들은 부담 없이 금방 친숙해지고 공주께서 먼저 물심양면으로 베푼 정에 따라 많은 사람과 오랜 교제가 이뤄졌다. 이런 공주님의 첫인상이 마치 푸치니 오페라 <공주는 잠 못 이루어>에 나오는 투란도트 공주 같은 인상이다. 아름다움을 갖춘 공주를 손에 넣기 위해 이웃 나라 왕자들이 접근하나 공주는 이들에게 문제를 낸다.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언젠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남자 주인공인 오페라 극에 등장하는 중국 공주의 모습이 바로 전세원 로사 공주의 모습과 닮은 그것 같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당신도, 공주여,
그대의 차가운 침방에서,
별을 보시오,
사랑과 희망에 전율하는
"공주는 외로워 오페라 대사(臺詞)"
공주님의 인상은 흔히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미인이 아니라 독특하고 개성이 있는 예쁜 얼굴이다. 그냥 예쁜 정물화 같은 얼굴이 아니라 슬기로움이 곁든 얼굴이다. 일찍이 김동길 박사가 생전에 한사람이 일생동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숫자가 평균 1천 5백여 명이라고 했는데 공주님은 아마도 이 숫자를 상회(上廻)할 정도로 여러 활약을 해왔다. 그만큼 문학 음악 예술 정치 등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고 그간에 만난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보다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여류 작가들과의 만남은 보통 문학 모임, 주로 문학의 밤이나 시화전 문학기행 같은 데서 행사 끝나고 뒤풀이 음식 먹을 때 만나는 것이 보통이다. 공주님과의 첫 만남도 이양우 사백(詞伯)이 주도하는 문학모임에서였다. 20여 년 전 나는 공주님의 오른편 검지 손가락에 낀 묵주(默珠)반지를 보고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대화 도중 공주님은 대대로 이어지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특히 외가에서는 여러 명의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배출이 되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물이 여럿 있다고 했다.
외가쪽의 할아버지로 자유당 정권 당시의 총리와 부통령을 지낸 장면 박사와 그 아들인 장익 춘천교구장(선종)교구장 등등 가톨릭과 깊은 연관을 갖고있었다.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고 해서 속으로 놀라기도 했다. 정치외교학과는 여자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학과였기 때문이다.
숙명여대는 서울 용산 남영동에서 효창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남영동은 60년대 내가 다녔던 중앙대학을 가기 위해 노량진까지 가는 전차(電車)를 갈아타는 환승지이기도 했다. 벌써 50여 년 정도 훌쩍 넘은 세월이라서 자세하고 큰 기억은 없지만, 의식(意識)의 타임머신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 보면 근처에 성남극장이 있고 맞은편에 파리 제과점, 그리고 금성극장과 또 그 맞은편에 황혼이란 다방이 있었다. 황혼 다방? 다방 이름이 여간 구식이 아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식의 애상(哀傷)젖은 이름은 짓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순간적인 멋보다는 은근한 노스탈자 같은 간판 이름들이 많았다. 60년도 웨린 비티와 나탈리우드가 나오는 <초원의 빛>이란 영화가 상영되고 <패티 페이지>의 아이 웬트 유어 웨딩이란 슬프고 애절한 노래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낭만으로 작용했던 그 시절, 아마도 그 시절에 공주님의 얼굴은 모르지만, 그곳 그 장소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인연. 만나서 연애편지를 주고 집적거렸다면 분명히 딱지를 맞았을, 아련하게 실없는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그 시절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그것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깊은 인연을 새삼 느끼게 하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서로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진리이기도 했다.
아무튼, 공주님은 내게 며칠 후 지인들과 함께 로마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 베네딕토 7세 성하(聖下)를 알현(謁見)한다고 했다. 훗날 내가 존경하는 김현욱 박사도 함께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한 달쯤 후에 문학모임에서 만났을 때 내게 바티칸 광장 옆의 성물(聖物) 가게에서 샀다는 크리스털 묵주를 선물했다. 그곳 신부에게 방사(放赦)도 받았다고 했다. 첫걸음이기에도 값비싸고 감촉이 좋은 묵주여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 묵주는 훗날 내가 성당 갈 때 갖고 갔다가 나의 어머니가 임종할 때 손에 쥐여 드렸고 하늘나라 갈 때 갖고 가셨다.
뒷날 집사람과 패키지로 로마 바타칸 베드로 성당 마당 오른쪽 성물 가게에서 묵주를 샀는데 여러 개 사다 보니 크리스털로 된 묵주가 값이 너무 비싸 나무로 된 것을 몇 개 사 가톨릭 신자인 지인(知人)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지인 가운데 두 명이 선종(善終)할때 그 묵주를 손에 쥐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2008년도에 <문화저널>이란 인터넷 신문에 전세원 공주님의 문학과 인생에 대해 쓸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나는 공주님의 외양에 깃든 명랑함 속에 슬프고 애처로운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즉 4남 1녀를 낳아 한참 세상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즈음 사랑하던 부군을 불시에 사고로 잃고 혼자 되어 자녀를 키우는 굳센 어머니로서의 임무를 아주 훌륭하게 이행해서 지금은 모두 장가 출가를 시키고 여생을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삶을 지속하겠다는 공주님의 이야기·그것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가난하고 슬픈 경험을 갖고 외로워하는 많은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희망을 주는 삶의 시작이란 것을 알게 해 주는 데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쓴 많은 시를 가곡의 노랫말로 만드는 작사가로서 활동했다. 수렁처럼 깊고 헤어날길 없는 슬픔을 맛본 주인공으로서 이 시로 된 노랫말들은 가곡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으며 작곡가는 좋은 곡을, 성악가는 아름다운 노래로 화답을 했다. 그동안 수백 편의 노래에 작사해 얼마 전에는 시디로 출반되기도 했다. 그녀가 노랫말을 붙인 노래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으며 작곡가는 물론 노래를 부른 성악가들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공주는 무대에서 직접 노래도 부르고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음악회가 열릴 때마다 공주님은 저희 부부를 초대해 고급 음악을 아는 교양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노래라야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현인 선생의 굳세어라 금순아 등 유행가 몇 곡 외에 품위 있는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던 음치(音癡) 부부에게 공주께서 보내준 음악회 초대 티켓은 음악을 아는 문화 상류층의 일원으로 틈입(闖入)게 만들어줘 여간 고맙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가요무대나 송해 선생의 전국 노래자랑 같은 프로나 즐겨보던 우리 부부는 연미복(燕尾服)을 입은 지휘자와 턱시도 차림의 성악가가 부르는 기름진 노래를 듣고 남들처럼 박수도 치고 즐거워했다. 우리에게 나눠준 그 티켓이란 공주님이 어려운 성악가나 작곡가들을 위한 말 없는 후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종 문화회관의 세종 홀을 비롯해 사당동의 예술의 전당 광화문의 금호 홀, 구로 구민회관 아트홀 등 어쩐지 우리네에게는 주눅이 들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로과 장소로 초대해 음악의 즐거움을 준 공주님은 우리 부부에게 참으로 다정한 이웃으로 항상 남아있다.
10여 년 전에 오른쪽 어깨에 고통스러운 오십견이 왔을 때 당진 출신의 3선 의원이셨던 김현욱 박사가 공주님을 시켜 제게 연락을 해왔다. 소록도 병원장이었던 조창원 박사가 영세를 받고 감격해서 그린 한국 순교자(殉敎者)의 모습을 해설할 글을 써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어깻죽지가 아파서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니까 공주님이 자신이 북경에서 받은 부항 치료 자격증이 있으니 안심하고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송파구 언덕 비탈에 있던 김 박사의 사무실로 가서 공주님으로부터 고통스러운 부항 및 사혈(瀉血) 치료를 한 달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공주님의 치료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인정사정없이 오염된 피를 정성껏 뽑는 공주님의 눈길이 무척 예리해 보여서 공주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주님은 나뿐만이 아니라 김현욱 박사를 비롯한 여러 명에게 자신이 배운 기술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래서인지 어깨의 통증이 가라앉고 그 후 조선 시대 희생된 천주교 순교자의 일생을 글로써 쓰게 되었다. 103명에 달하는 순교자의 마지막 모습을 담는 작업에 돌입해 한 달 만에 끝을 보았다. 책자 판매 수입은 모두 중국 장춘에 있는 김대건 기념 성당과 김대건 로(路)의 보수에 쓰기로 했다. 물론 자원봉사 차원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 즉 성리학을 숭상하던 국가라 이교(異敎)인 천주교를 믿는 자들을 국가 반역죄 차원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써 단속했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세대를 한 묶음으로 묶어 서로 감시 고발하는 제도이다.
그 당시 다섯 번의 박해, 그것을 군란(窘亂)이라고 하는데 1791년의 정조 때의 신해 박해, 1801년의 순조 때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 병인박해 1866년 대원군 때 병인박해 등이 당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일반 시자들 수 만 명이 참수되거나 교수대에서 목을 매달려 죽었다. 그것을 조창원 박사가 사재를 털어 캠퍼스에 그렸고 화보를 만들기 위해 해설을 붙이는데 내가 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명동 가톨릭 회관 1층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때 화랑을 오가면서 공주님과의 인간적 친밀도가 더 높아졌다. 그 후로도 천주교 내의 좌익 세력인 정의구현사제단 타도에 함께 나섰고 공주님은 솔선해서 선두에 서서 좌익 종북에 물든 사제들을 향해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문 씨 정권의 불법 무도한 정책과 야만적인 행위를 규탄하고자 시청 앞 태극기 시위에 김현욱 박사와 서석구 변호사 김찬수 지사(志士) 등과 함께 나서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얼핏얼핏 지켜본 전세원 로사 공주님의 일생은 정의를 기반한 자유와 평화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내유외강(內柔外剛)의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정에서는 다정다감한 어머니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자신의 예술과 동료 예술인들을 사랑하는 인정 많고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과 모자는 그녀 자신을 기쁘게 할 목적보다 많은 사람의 미적 감각을 제고(提高) 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더럽고 추악한 것을 싫어하고 투명하고 밝은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속에 음침하고 반역적인 것은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전세원 로사 공주가 팔순을 맞는다고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우리 시대에 그만한 용모와 성격으로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한 사람의 어깨에 세월이란 짐을 올려놓는다는 것이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밝고 아름답고 착한 성격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존임 팔순을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세요.
김광한
1944년 서울 용산 출생
중앙대 문과대 국문학과 69년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