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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설교론
제 1 절 : 조 직
설교의 재료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설교로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짜야 하는가? 설교의 재료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설명한다고 해서 하나의 설교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고 재료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설교가 되도록 조직을 바로 해야 하나의 설교가 된다.
이 조직에 대하여 1.대지를 어떻게 가르느냐? 2.전개를 어떻게 하느냐? 3.서론, 결론을 어떻게 하느냐? 4. 대지의 내용을 어떻게 메우느냐? 4.설교의 분량을 어느 정도로 하면 되겠는가의 문제가 고려된다.
1. 대지의 가름
이 대지에 대하여는 위에서 말한 "현대 설교의 문제점" 5가지 가운데서 세째 번인 대지를 가르는 문제에서도 이미 논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논해 보자.
설교의 대지는 성경 본문이 갈라 주는 대로 갈라짐을 받아야 한다. 설교 대지는 설교자 자신이가르는 것이 아니고, 설교자 자신이 갈라서도 안 되고, 순전히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 주는대로 설교자 자신은 갈라짐을 받아야 한다. 설교자가 제멋대로 대지를 가를 아무런 권리도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성경 밑에 있어야 한다. 인간이 성경 위에 올라 설 수 없다. 성경 본문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에 근거 없는 대지를 설교자가 자신의 주관대로 갈라서는 안 된다.
어떤이들이 "설교는 꼭 대지를 갈라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한다. 설교할 때 꼭 대지를 갈라야 하는가의 문제는 사람들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성경 본문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주면 대지를 가르고, 성경 본문이 대지 없이 된 본문이면 대지 없이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대지를 셋으로 갈라주면 대지를 셋으로 해야 하고, 성경 본문이 대지를 다섯으로 갈라주면 우리도 대지를 다섯대지로 갈라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하게 기독교의 사색 방법은 계시 의존 사색이지 추리의 사색이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사색할 때에는 성경의 진리가 계시해 준 그대로 사색해야지 성경의 진리를 떠나 우리 멋대로 추리해 나가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무시하고 우리 마음대로 적당히 추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있을 수 없다.
바위가 제멋대로 생긴 것 같지만 그 바위 결이 있듯이 성경에도 대지의 결이 있다. 그리고 이 바위에 있는 결은창조 후 몇 백년이 지난 뒤에 어떤 사람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라 창조때부터 그렇게 되어져 있듯이 성경 속에 있는 대지의 결도 성경이 기록된 후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 때부터 결정 되어 있는 결이다.
이 바위를 깰 때에는 결을 따라 깨어야 바위가 쉽게, 또한 깨끗이 깨어지듯이 우리가 대지를 가를 때에도 이 성경 속에 이미 박혀 있는 대지의 결 그대로 갈라야 한다.
산에는 광맥이 있다. 그리고 이 광맥은 창조 때부터 이미 되어 있는 광맥이지 창조 후에 어떤 사람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다. 광산업자는 창조 때부터 이미 산속에 박혀 있는 광맥의 줄기를 바로 찾아가며 광석을 케야지 창조때부터 이미 산속에 박혀있는 광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아무데나 가서 광석을 캐려고 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성경 속에도 이 성경이 기록될 때부터 결정지어진 대지의 광맥이 있는데, 설교자는 성경이 기록될때부터 성경 본문 속에 박혀 있는 이 대지의 광맥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대지를 갈라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대지를 만들어 파고 들어가면 실패하게 된다.
우리가 개울을 건너갈 때에는 징검다리를 꼭 밟고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가 2개이면 2개를 밟고, 징검다리가 3개이면 3개를 밟고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가 없는데 자기 멋대로 적당히 밟고 가면 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갈 수 있는 한계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는 거기까지 가야지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는 그 이상은 한 발자국도 더 갈 수 없다.
우리가 대지를 가를 때에는 성경의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놓아 주는 그대로 밟고 나가야 한다. 성경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4개 놓아주면 우리 설교의 대지도 4발자국 집고 나가야 한다. 성경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놓아 주지 않는데 설교자 자신이 제멋대로 강물에 빠져 가면서 걸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본래 성경 본문에 놓여져 있는 대지의 징검다리를 따라 가야지, 징검다리의 한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물에 빠져 가면서까지 대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2. 전 개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전개시키는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선명하고 분명하게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2:17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전하지 않고 순전하게 전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혼잡하고 복잡해서 무슨 말씀인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명하게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4가지로 고려해 전개하고자 한다.
(1) 직설적 전개
이 "직설적"이란 뜻은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한 길로 곧게 가지 못하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하면서 우왕 좌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치 캄캄한 밤에 유성같이 한 설교에서는 한 가지 진리를 선명하게 선포 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캄캄한 밤에 유성을 본다. 캄캄한 밤에 유성이 얼마나 선명한가! 캄캄한 밤의 유성은 운무가 아니다. 운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운무는 분명치 않으며, 선명하지도 않고, 희미하다. 우리의 설교가 운무처럼 희미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표현되면 안 된다. 꼭 캄캄한 밤의 유성같이 내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어떠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들어도 다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말해야 한다.
경부 고속도로로 달리는 시한(時限) 운행의 차들은 서울에서 출발해서 부산까지 직행으로 달린다. 우리의 설교는 마치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직행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의 차들처럼 직설적으로 설명이 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직행으로 달리던 차가 형편에 따라 고속도로를 벋어나 이 지방 저 지방의 골목으로 드나들면 안 되듯이 우리의 설교가 한 길로 곧게 나아가지 못하고 어느 골목으로 전개되어 나아가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면 안 된다.
화살이 여기저기 들렀다가지 않듯이, 시위를 떠난 화살은 그 표적을 향하여 직선으로 날아간다. 화살이 여기저기 들렀다 가지 않고 그 설교가 목표하는 표적을 향하여 선명하고 분명하게 직선으로 전개되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가게에 비하면 마치 시시한 물건을 조금씩 다 갖다 놓고 파는 구멍 가게(잡화상) 같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상품에는 웬만한 물건이 다 있다. 일용품치고 별로 없는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물건 한 가지만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우리의 설교가 구멍가게(잡화상)처럼 시시한 물건으 이것저것 다 갖추어 있으면서도 어느 한 설교에서 어느 한 가지 내용만을 굵고 깨끗하게 표현하는 도매상 물품이 못된다면 그 설교는 실패다.
우리의 설교를 음식에 비하면 일품 요리를 만드는 전문 음식점이 되야 한다. 이 음식, 저 음식, 조금씩은 다 만들지만 이렇다 할 특색이 있게 내 놓을 만한 음식을 못 가진 대중 식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 식당에는 어느 음식이고 거의 다 만든다. 그러나 그 음식점을 대표할 만한 특색있는 음식은 없다.
반면에 전문 음식점은 어느 한 가지 음식이라도 그 집의 명예를 걸고 내 놓을 만한 특색있는 음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설교가 이 음식, 저 음식, 조금씩은 다 들어 있는 대중 식당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한 설교에서는 그 설교만이 표현하는 어느 한가지 진리를 굵고 선명하게 표현하는 전문 음식점이 되어야 한다.
(2) 떠벌리지 말 것
우리의 설교를 "직설적으로 유성과 같이 선명하게 전개시키라"는 말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 설교의 전개를 "더벌리지 말라"는 말이다. 떠벌리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1)의 정반대이다. 우리가 설교의 대지가 마치 첫째 대지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 같더니 함경도 방향으로 올라가고, 둘째 대지는 신의주로 올라가는 것 같더니 울산으로 내려와 도대체 우리 설교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 떠벌려 놓으면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경부고속도로이면 서울에서 떠나 바로 부산을 향해 직행해 나가야 한다. 만약 그 차가 부산으로 가는지 신의주로 가는지, 아니면 함경도로 가는지 전혀 방향 감각을 잡을 수 없게 이리 저리 달리듯이 우리 설교의 진로가 전혀 방향 감각을 잡을 수 없게 여기 저기 떠 벌려 놓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는 본문 설교를 착각하여 성경 본문을 무질서하게라도 나열만 시켜 놓으면 그것이 바로 본문 설교인 줄로 알고 있으나, 성경 본문을 무질서 하게 나열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본문 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본문을 이리 저리 떠벌리지 말고 질서있게 정돈시켜야 그것이 바로 본문 설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착각이 없어야 할 것이다.
(3) 통일성 있게 집중시킬 것
우리의 설교를 "선명하게 전개시키라"는 말을 또 다른 면에서 말하자면 모든 대지는 제목을 중심으로 "통일성 있게 집중시켜야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2)의 경우와도 정 반대이다. (2)에서는 우리의 대지를 여기저기 떠벌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설교의 모든 대지는 그 설교의 제목을 중심으로 통일성있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 대지도 제목을 향하여, 둘째 대지도 제목을 향하여 통일성 있게 집중되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렌즈를 통하여 태양 광선을 한 초점으로 모아 까만 천에 대면 불이 나서 구명이 뚫리듯이 우리 설교의 대지의 모든 광선을 "제목"이란 한 초점으로 집중시켜 "제목"이란 한 초점에서 구멍이 뚫어져 불이 붙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 설교의 대지의 광선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제목"이라는 한 초점으로 모이지 못하면 안 된다.
(4) 대, 소지를 복잡하게 가르지 말 것
"선명하게 전개 시키라"는 말을 또 다른 면에서 고찰한다면 대지를 가르는 실제적인 면에서 한 대지 안에 여러 소지를 둔다든가, 그 소지 안에 또 작은 소지를 둔다든가 하여 설교의 대지를 잘 분간 할 수 없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설교는 결코 박사 학위 논문이 아니다. 박사 학위 논문은 학구적인 논문이니 제목 분류나 소제목 분류가 다양할 수 밖에 없으나 우리의 설교는 논문이 아니고 어린이에서 팔순 노인까지 다 알다 들어야 할 대중성을 띤 것이니 가능한 한 대지 구분은 단순하고 선명해야 한다. 설교하는 사람이 대지를 복잡하게 갈라 "큰 첫째의 작은 첫째, 작은 둘째, 큰 둘째의 작은 첫째와 작은 세째", 심지어 "큰 둘째의 작은 첫째의 더 작은 첫째"하면서 설교를 한다면 도대체 누가 그 설교의 내용을 알아 듣겠는가? 촌수를 가릴 수 없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설교의 대지는 설교자 자신의 주관대로 가를 수 없고 성경 본문이 갈라 주는 대로 갈라짐을 받아야 하니 성경 본문 자체가 대지를 그렇게 갈라 주는 때에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대지를 가르는 실제적인 면에서 본문이 제시하는 대지 구분에 저촉됨이 없이 설교자 자신의 기교에 따라 대지 구분을 단순화 할 수 있는 상태에서 기교가 있는 것이다.
즉 설교자 자신은 기교에 따라 본문이 제시하는 대지에 저촉됨이 없이 대지 구분을 단순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 서론, 결론
설교에 있어서 서론과 결론은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필요하다.그러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서론과 결론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때에는 서론 정도는 도리어 생략하는 편이 좋다. 효과 면에 있어서 결론은 거의 빼 놓을 수 없으나 서론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때에는 백 번 빼도 좋다.
현대 설교에 있어서 어떤이들은 죽을둥살둥 설교에 서론이 빠지면 설교가 성립이 안 되는 줄 알고 격에도 맞지 않는 서론, 더구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서론, 심지어 역효과를 나타내는 서론까지 억지로 갖다 붙이면서 손해를 보는데, 우리는 설교할 때 너무 서론의 종이 될 필요는 없다.
서론의 목적이 무엇인가?
본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리를 놓아 주는 일, 또는 본론의 구미를 돋우어 주기 위한 자극제가 서론의 목적이다. 본론의 내용이 어려워서 그 본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설명해 주는 예비 설명, 즉 본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서론이다. 그리고 본론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예비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때라도 본론에 대한 흥미나 구미를 돋우어 주는 자극을 일으키는 면에서 서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필요 없을 때, 즉 본론이 쉬워서 서론의 에비 설명이 없어도 잘 이해가 되는 때와 본론의 흥미나 구미를 돋우어 주지 않아도 될 때에는 서론은 언제라도 생략할 수 있다.
예비 설명인 서론이 없이도 본론이 쉽게 이해되는 경우, 볼론의 흥미를 돋우어 주는 자극적인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서론이 없으면 설교가 성립이 안 되는 것처럼 격에 맞지도 않는 서론을 억지로 끌어다가 붙여,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에게 실크 햍(silk hat)을 씌운다든가, 양복을 입고 넥타이 맨 사람에게 갓을 씌운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서론의 모자를 씌워가면서까지 손해 볼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설교를 작성할 때에 있어서 너무 서론의 종이 될 필요는 없다.
"결론"이란 본론에서 설명한 진리를 간추려서 재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이 본론과 다른 내용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설교는 본론에서 설명한 진리와 전혀 다른 내용을 결론으로 내세우는 일이 있다. 본론에서는 노랗다고 실컷 설명해 놓고 결론에서는 빨갛다고 강조하거나 본론에서는 희다고 설명해 놓고 결론에 와서는 검다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
본론에서 노랗다고 설명했으면 결론에 와서는 "그러니 과연 노랗지 않느냐!"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본론에서 애써 설명한 노란 사실을 결론에서 재 강조 하고 본론에서 희다고 설명했으면 결로에 와서도 "그러니 과연 희지 않으냐!"라고 본론의 진리를 간추려서 재 강조하는 것이 결론이다.
그런데 이 서론과 결론을 만드는데 있어서 서론과 결론의 내용을 다른 어떤 말보다도 성경의 내용으로 하면 더 좋다. 보기를 들자면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설교한다고 할 때에 서론을 소개 할 때에 다른 어떤 말보다도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라는 말씀과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69:20)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상에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자가 없으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된 인자를 두려워하느냐?"(사51:11)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를 진정 위로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고 서론을 전개하면 다른 어떤 말로 서론을 전개하는 것보다 더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
결론을 맺을 때에도 다른 어떤 말을 빌려 오는 것보다 성경 구절을 가지고 맺는 것이 더 좋다. 가령 우리가 "주님을 섬기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고 할 때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다 설명하고 난 뒤에 "사람이 나(예수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신 요12:26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면 다른 어떤 말을 빌려다 결론을 맺는 것보다 가치가 있고 무게가 있다.
4. 대지의 내용을 메우는 문제
이제는 각 대지의 내용, 또는 대지 없이 설교할 때에는 그 설교의 내용을 무엇으로 메우느냐에 대하여 논해 보자.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 줄 때에는 대지를 세우고 설교하고,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 주지 아니할 때에는 대지 없이 그대로 설교를 한다. 대지를 세우고 설교할 때에는 그 대지의 내용을 메우게 되고, 대지 없이 설교할 때에는 그 설교 자체의 내용을 메우게 되는데 대지 또는 설교 자체의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메우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아마 이 문제는 설교학의 여러가지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지 또는 설교 자체의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메우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평가가 거의 좌우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묭해 주는 성경 구절로 대지의 내용을 메우라는 것이다. 대지의 내용을 메우기 위하여 예화집이나 잡지나 기타 다른 문헌에서 그 대지의 내용을 메울 만한 내용을 찾는 것도 할 수는 있는 일이겠으나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 주는 성경 구절로 메우는 것이 제일 좋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경 구절 아닌 다른 문헌들(예화집이나 잡지등)에서 재료를 찾는 수도 있겠으나 우선 성경 구절로 메우는 것이 제일 건전하고, 더구나 교인들에게 성경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데 도움이 크다.
"대지의 내용을 성경 구절로 메우라"고 주장하면 어떤 이들은 "설교하는데 있어서 예화를 전혀 안 쓰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저자의 말은 성경 구절로 메우는 그것이 바로 예화라는 말이다. 예화는 어떤 진리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비유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예화집에서 끌어 와야만 예화가 되고, 성경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 구절 자체나 성경에 있는 이야기로 비유하면 그 재료가 단지 예화집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화가 될 수 없는 것일 수는 없다.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 진리를 알기 쉽게 풀이해서 설명하기 위한 예화라면 그 예화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든지 간에 다 예화가 될 수 있다. 꼭 성경 아닌 다른데서 그 재료를 끌어와야만 예화가 될 수 있다는 법은 없다. 예화집이 아닌 성경에서 끌어 온 예화를 구태여 명칭을 붙인다면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붙일 수 있따. 그러니 우리가 대지의 내용을 메울 때에 예화집에서 끌어 오는 것보다 우선 1차적으로 이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로 대지의 내용을 메울 만한 재료가 없을 때에는 할 수 없이 2차적으로 예화집이나 다른 데서 예화의 재료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저자의 경험을 두고 말한다면 저자는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에서 재료를 찾지 못하여 예화집을 더듬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여러해 동안 설교하면서도 거의 모든 예화를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에서 끌어왔지 다른 곳에서 예화를 끌어 온 적이 없다. 이런 것을 보아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의 자원이 우리에게 얼마나 풍부한가를 보여준다. 거의 예화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공급해 주는 예화의 보고가 되어 준다.
대지의 내용을 메우는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인용함에 있어서는 두가지 방면에서 인용할 수 있다. 본래 "보충 설명"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에서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겸손하면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보충 설명할 때에 "겸손하면 어떤 복을 받는가?"라고 설명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요 "겸손하지 못하면 어떤 화를 받는가?"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적인 면이다.
또 다른 예로는 "정직하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정직하면 어떠한 복을 받는가?"라고 하면 긍정적인 면이요, "정직하지 못하면 어떠한 화를 받는가?"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적인 면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대지의 내용을 메우기 위하여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 주는 성경적 예화, 또는 분문 예화를 인용할 때에도 그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 긍정적인 면의 구절과 그 내용을 보충 설명해 주는 부정적인 면을 다 들어서 설명할 수 있다.
대지의 내용을 메우는데 있어서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 줄 만한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두 면에서 인용하면 좋겠다는 것은 동감이 가는데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어떻게 찾아내느냐에 대한 방법이다. 어떠한 사실이 좋은 줄은 알면서도 그 좋은 일을 실현시킬 만한 방법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찾는 방법은 세가지가 있다.
(1) 뇌리 성경 일람표
"뇌리 성령 일람표"라는 이 명칭은 저자가 만든 단어인데,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하자.
우선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수 없이 많이 읽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을 수 없이 많이 읽으면 한 번 눈을 감고 묵상만 해도 창세기 1장에서 계시록 마지막 장까지의 모든 성경 구절이 한눈에 환하게 나타난다. 이것을 저자는 소위 "뇌리 성경 일람표"라고 한다. 이 사실은 성경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가는 문제이다.
우리가 성경을 수 없이 많이 읽을 수록 한 번 눈을 감으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 구절이 한 눈에 환하게 나타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주판을 많이 연습한 사람은 주판을 손에 안 들었을 때에도 한 번 눈만 감으면 주판이 눈에 환하게 나타나며, 그 나타난 주판을 근거로 암산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주판을 많이 연습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주판을 많이 연습하지 않은 사람은 눈을 백 번을 감아도 주판이 눈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주판이 눈에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 주판을 근거로 암산은 더욱 할 수 없다. 그러나 주판 연습을 수 없이 많이 한 사람에게는 한번 눈만 감으면 주판이 마치 실물 주판처럼 눈에 떠오르며 그 주판을 근거로 상당한 숫자에 이르기까지 속으로 주판질을 하면서 암산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만 주판을 수 없이 연습한 사람에게 한해서만 이해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일은 피아노 연주에서도 볼 수 있다. 피아노를 처음에 배우는 사람은 악보 한 번 보고 건반 한 번 보곤 해야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피아노 연습을 수 없이 한 사람은 건반을 전혀 안 보고 다만 악보만 보고 연주한다. 피아노 초보자가 이 사실을 보면 전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건반은 전혀 보지 않고 악보만 보고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이것은 다만 피아노 연습을 수 없이 한 사람에게 한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있어서도 성경을 수 없이 많이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눈을 감고 명상하여도 성경 말씀의 일람표가 전혀 떠오르지 않으나 성경을 수 없이 읽은 사람은 눈만 한번 감고 묵상하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의 성경 구절이 한 눈에 환하게 나타나는데 자기 눈 앞에 전개 되는 이 성경 일람표에서 그 대지를 보충 설명해 줄 만한 성경 구절을 자유롭게 택해서 인용한다. 이것이 소위 "뇌리 성경 일람표"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뇌리 성경 일람표"는 성경을 수 없이 많이 읽은 사람에게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데, "뇌리 성경 일람표"가 눈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음(2, 3)에서 다루기로 하자.
(2) 관 주
"뇌리 성경 일람표"가 아직 눈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선 관주를 이용 할 수가 있다.
(3) 컨콜던스(concordance)
"뇌리 성경 일람표"가 아직 눈에 나타나기 전에 우선 신세 질 수 있는 도 다른 하나의 도구는 컨콜던스이다.
그런데 관주나 컨콜던스도 도움이 되나 "뇌리 성경 일람표"에 비하면 근본적인 면에서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뇌리 성경 일람표"가 유기적인 면이 있는 점에 비하면 후자의 2가지는 보다 더 기계적인 점이다.
어떠한 점에서 기계적인가를 알아보자.
a. 관주의 경우에는 두가지 단어가 똑같아야만 인용할 수 있다. 컨콜던스에 있어서는 더한데, 기계적으로 단어가 똑 같아야만이 참고 구절을 찾을 수 있지 똑 같지 않으면 참고 구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은혜"라는 단어와 "은총"이라는 단어 사이에 뜻은 거의 같으나 컨콜던스는 "은혜"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참고 구절을 열거했지 "은총"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뜻은 거의 같으나 컨콜던스는 "인자"라는 단어는 열거하나 "자비"에 대하여는 열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뇌리 성경 일람표"에 있어선 단어는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뜻에 있어서 거의 같은 뜻이라면 "뇌리 성경 일람표"에 나타나는 성경 구절에서 얼마든지 유기적으로 선택해서 쓸 수 있다.
b. 후자의 두가지는 그 뜻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면은 열거하나 부정적인 면은 열거하지 않는다. 더구나 관주에 있어서 가령 정직한 자가 복을 받는 구절에 대하여 예시할 때에 정직한 자가 복을 받는 그 면에 대해서만 예시하나,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하다가 화를 받는 사실에 대하여는 예시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뇌리 성경 일람표"는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벌을 받은 부정적인 면도 마음대로 유기적으로 선택하여 인용할 수가 있다.
c. 후자의 두가지는 단어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어가 똑 같던지, 아니면 문장이 거의 같지 않으면 참고 구절이 예시되어 있지 않으나 "뇌리 성경 일람표"의 경우는 단어가 서로 다르고 심지어 문장과 문맥까지 다르다 하더라도 사실에 있어서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 줄 수 있는 사실이라면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 골라 유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가령 마5:5의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내용을 보충 설명할 때에 우선 긍정적으로는 창세기 26장의 이삭의 경우를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삭은 창세기 26장에서 우물을 세 번씩이나 양보했는데, 네 번째 우물을 파고 이삭이 말하기를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젋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26:22)라고 하였다. 온유하게 우물을 세 번씩이나 양보한 이삭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장소를 넓게 해 주셨으니 온유한 이삭이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는가!
부정적으로는 암1:13~15의 예증을 들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암몬 자손의 말이 나오는데 암몬 자손은 자기의 지경을 넓히려고 길르앗의 아이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잔인한 짓을 하였다. 그들이 온유하지 못하고 자기의 지경을 넓히려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잔인하고 강퍅한 짓을 했는데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영토가 넓어지지는 않았다. 넓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이미 가지고 있던 영토도 지켜내지 못하고 살던 땅에서 쫓겨나 사로잡히게 되고 저희의 왕은 그 방백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게 되니 이것이 온유하지 못하고 강퍅한 자가 받는 결과이다. 온유하지 못하고 강퍅하더니 영토를 넓히기는 커녕 있던 땅도 빼앗겼다.
이 예증은 마5;5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서의 보충 설명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6장과 아모스 1장 13~15절을 살펴 보자. 이 두 가지 예증은 관주나 컨콜던스는 예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본문 예화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으며, 온유하지 못하고 강퍅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못 받을 뿐 더러 가지고 있던 땅에서도 못 살고 쫓겨나는 예증을 각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서 보충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관주나 컨콜던스에서는 같은 단어나 같은 문장이 없기 때문에 예시하지 못하는 예증들도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는 유기적으로 자유롭게 예증해 줄 수 있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하루 바삐 성경을 수 없이 많이 읽어 "뇌리 성경 일람표"를 사용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다.
A. 대지를 매우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조심해야 할 3가지 조건
a.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그 대지를 보충 설명함에 있어서 꼭 맞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야 한다. 잠 25:11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하였다. 아로 새긴 하얀 은쟁반에 노란 금사과를 올려 놓으면 얼마나 잘 어울리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은쟁반에 금사과 모양으로 꼭 맞는 구절을 인용하여야 한다. 두루뭉실 적당하게 갖다 대도 괜찮게 들어 맞으나 톱니바퀴(혹은 나사와 볼트)는 적당하게 갖다 댄다고 맞는 것이 아니다. 톱니바퀴는 꼭 들어 맞아야지 이 톱니바퀴와 저 톱니바퀴 사이에 조금의 편차가 있다해도 맞지 않는다. 우리의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두루뭉실 이래도 적당하게 맞고, 저래도 적당하게 맞는 식의 인용이 되어서는 안 되고 두개의 톱니바퀴처럼 꼭 그 성경 구절이라야 정확하게 들어 맞는 구절을 사용해야 한다.
b.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그 성경 구절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인용해야 한다. 즉 해석을 바로 해서 인용하란 말이다. 우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의 참 뜻을 바로 모르고 잘못된 뜻으로 알고 인용하면 안 된다. 현대 설교의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다. 그래서 상술한 현대 설교의 문제점들 중 둘 째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c. 어느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그저 사무적으로 그 성경 구절을 소개하거나 한번 읽고만 지나가지 말고 모처럼 찾아내서 인용하는 구절인 즉 그 구절을 인용할 때에 그 구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설명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다. 좀더 속된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 인용하는 구절을 보충 설명에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도로 이용하고 우려낼 수 있는 최대한도로 우려내라는 뜻이다.
대지를 보충 설명한다고 하면서 모처럼 찾아낸 성경 구절을 그저 사무적으로 소개만 하고 지나가든가, 한번 읽기나 하고 지나가면 청중들은 본문 설교는 건조무미하다는 평을 하게 된다.
모처럼 힘들게 찾아낸 구절이니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용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이용하면 청중들이 인용하는 성구 하나하나에 취미와 흥미를 느끼게 되고 따라서 성경 자체에 대하여서도 재미를 붙이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느헤미야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실을 말한다고 하자. 느헤미야 8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모습이 여러모로 나오는데, 우선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7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실을 보충설명하기 위하여 이 구절은 한번 읽고만 지나가면 건조 무미 할 뿐더러 이 구절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데 보충 설명하는 구절로 인용 되어졌는지 그 이유조차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거기에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에스라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 등, 즉 백성들의 지도층에 속하는 몇몇 사람들만 말씀을 사모하고 일반 대중은 말씀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지도자이고 피 지도자이고, 남자이건 여자이건, 늙은이고 젊은이고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거족적으로 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은혜로운 분위기를 보여 준다. 이렇게 설명하는 때에 청중들은 느8:1이 무엇을 말하는지 밝히 알게 되며 이 구절에 대한 새로운 흥미가 붙을 것이다.
에스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구절은 느8:3이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 구절도 그저 한 번 읽기나 하고 지나가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새벽부터 오정까지라면 적어도 6시간 정도는 될 것이다.
20세기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가 30분만 지나가면 벌써 교인들은 시계를 보기 시작하는데, 에스라는 새벽부터 오정까지 6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읽을 때 청중들은 지리하여 주리를 틀지 않았다. 에스라가 6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지리한줄 모르고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귀를 기울이되 극성스러운 극성파 몇 사람만 그리한 것이 아니라 뭇 사람들 즉 백성들 전체가 다 그리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인용한 구절을 최대한도로 이용한다는 뜻이다.
가령 우리가 약 1:2의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구절을 인용한다고 하자. "시험"이라는 것은 한 가지라도 괴로운 것인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시험"이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런데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되 겨우 기뻐하는 빛깔만 보여도 좋은 일인데, 본문에서는 기뻐하되 보통 기쁨이 아니라 "온전히 기뻐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약1:2의 뜻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느 성구 하나를 인용할 때에 그 성구를 그저 소개만 하거나 한번 읽기나 하고 지나가지 말고 그 성구 가운데서 청중들에게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청중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할 때에 청중들은 그 구절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게 되며 따라서 점점 성경 전체에 대하여서도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바의 인용한 구절을 이용할 수 있는데까지 최대한도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5) 설교의 분량
설교의 분량 문제에 대하여서는 두가지 면에서 고려되는데, 하나는 평소에 주일날마다 우리가 본 교회 강단에서 하는 설교와, 또 하나는 다른 곳에서 설교를 부탁 받은 경우이다. 평소에 우리가 본 교회 강단에서 설교 할 때에, 아무리 길게 해도 30분을 넘기면 안 좋은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 그것도 어린이로부터 늙은이까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대중들인데 자기 육신이 지치면 아무리 귀한 말씀이라도 잘 받아지지 않게 된다.
예배시간은 설교만이 아니라 다른 순서들도 있으니 예배 시간 전체를 2시간 정도로 끝내기 위해서는 설교는 30분 이하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설교 부탁을 받고 가서 설교할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보통 설교를 몇 분 해달라고 시간을 제한해 준다. 방송 설교도 이와 같다. 이럴 때는 일정한 시간 안에 설교를 마쳐야 한다. 그런 때는 정해진 시간보다 2분정도 짧게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5분만 해 달라고 부탁할 때에는 13분 정도로, 10분만 설교 해 달라고 하는 때는 8분 정도로 설교를 마치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