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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묵상글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받아들이고, 모셔 들이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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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받아들이고, 모셔 들이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요즘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불현듯 어둠의 감정이 스며들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과거를 생각하면 과거의 죄와 잘못이 가슴을 후벼파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과 걱정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로만 듣던 나이 현상이 제게도 생긴 겁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온라인신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지난주 순종에 관한 강의를 할 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종이란 나의 행복을 하느님 뜻에 맡기는 것이라고.
그리고 어제 미사 중에는 이런 기도를 마음속으로 또 했습니다.
제게 어떤 것이 주어져도 당신의 뜻과 섭리에 감사하게 하소서!
그동안 미래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어떤 것이 제게 닥치더라도
주님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제게는 잘 받아들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는데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정도를 넘어 감사하게 해달라는 거였지요.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내게 주시는 것은 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 뜻에 나의 미래와 행복을 맡겨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고, 마리아 품에 잉태되셨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께서 당신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고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매우 두려우셨고 불안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하느님을 더 믿으셨고 그분께 매달리셨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성령의 힘에 감싸여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알림을
동정 마리아께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맏이이신 외아드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어
당신의 흠 없는 태중에 모셔 들이셨나이다.”
<받아들이심>과 <모셔 들이심>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우리도 오늘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모셔 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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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은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분의 희망 안
우리는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성모님은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인 사랑의 감실, 거룩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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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르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꿈의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미루지 않는 결단을 내려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 연장이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 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합니다.
@@ 어머니,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어머님
인간으로 볼 때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또 있겠습니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천상의 이 말을 듣고나서
당신의 역사는 얼마나 파란이 많았습니까?
남편 요셉에 대한 걱정,
말구유에서 아들의 해산,
이집트로 피난,
마침내 십자가 곁에서
외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십자가가 있었겠습니까?
성총을 충만히 받는다는 것이란
반드시 지상의 행복이나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님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안락은 물론
정신적 안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총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지상에서 고통을.
십자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한 당신이
여인 중에 총복을 받으신 당신이.
누구보다 가혹한 십자가를 져야 했고
누구보다 처참한 고통을 받았거늘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배문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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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를 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발 기준에 ‘충성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위라고 칭찬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고난의 현장에 남자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울며 예수님 고난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것도 마리아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도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참된 평화를 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렸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위대한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위대한 마리아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 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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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영화를 보면 주연 배우만 있지 않습니다. 만약 주연 배우 1명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는 조연도 필요하고, ‘지나가는 행인 1’과 같은 엑스트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화의 내용이 풍성해집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연의 역할도 또 조연의 역할도, 엑스트라의 역할도 모두 필요합니다. 물론 나의 세계 안에서는 자신이 늘 주연이지만,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는 어떤 역할이든 모두 소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늘 주연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 다르면 틀렸다면서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고 화풀이하듯이 하느님을 떠나겠다는 말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연출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영화에서도 감독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 영화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감독의 뜻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자기 뜻대로만 하겠다면, 그 영화는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은 아무리 그 배우가 최고의 배우라고 한들, 그 영화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라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 뜻에 맞춰서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소설가 이디스 워튼은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말했습니다. 촛불이 되거나,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연급의 촛불도 빛을 퍼뜨릴 수 있지만, 조연급의 거울도 빛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안에서 어떤 삶이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 뜻을 따를 때, 커다란 작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믿음에 찬 순명, 그 순명으로 큰 시련을 겪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순명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주연의 삶을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이 어떤지만을 살펴보시고 그 뜻을 향해 나아가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에 구원의 빛이 퍼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는 조연이 더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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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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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사랑과 겸손, 경청과 순종, 찬미와 감사-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고 절묘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교회의 전례를 통해서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하느님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광야의 사순시기, 올해 사순 제4주간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기쁨의 축제들로 가득합니다.
기쁨의 장미주일에 이어 월요일은 성 요셉 대축일, 화요일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그리고 오늘 토요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특히 매해 광야의 사순시기에 맞이하게 되는 성 요셉 대축일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의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벌써 만개滿開하기 시작한 온갖 봄꽃들이 대축일을 경축하며 이미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해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강론을 준비하며 늘 영문 주석을 읽을 때 마다 주석 앞부분 말씀이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인도의 시성, 기탄잘리의 시인,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 격찬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가 한 말입니다.
“모든 아기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이다.”
그러니 모든 아기의 탄생은, 특히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통해 태어나게 될 그리스도 예수님은 얼마나 큰 축복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서의 예언의 실현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이름은 얼마나 멋지고 은혜로운지요! 비단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임마누엘입니다.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타고르의 말씀과 오버랩되어 얼마전 읽은 기사 내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 0.78 시대! 가임기 여성 한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아이의 숫자가 0.78명이라는 것이다. 외국인 유입이 없이 인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합계 출산율이 2.1명을 넘어야 한다. OECD 가입 국가 중 합계 출산율이 1명 밑으로 떨어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모든 아기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인데 웬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한국의 현실입니다. 아이들 보기 참 힘든 시절입니다. 저의 1970년대 초등학교 교사시절 80-90명의 참 다양한 한반 아이들이 함께 즐거이 뛰놀던 모습이 이제는 아득한 꿈처럼 생각됩니다.
불암사 개 선재가 아침 일찍 수도원을 방문하여 수도원 동생 개들 다섯을 만날 때 반갑게 뛰노는 모습이 역시 함께 뛰어 노는 아이들의 기쁨을 연상케 하니 더욱 아이들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예전 학교나 마을은 언제든 아이들 노는 소리로 왁자지껄했습니다. 이젠 학교 운동장도 마을도 아이들 소리 들어보기 힘든 텅 빈 침묵의 무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마침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선을 위해 1929년에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가 좋아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선물로 나누고 싶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 벌리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다시 깨어나소서.”
참 고무적이고 위로가 되는 시요 우리를 참으로 분발케 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다시 깨어나”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배우고 싶습니다.
첫째, 하느님과 사랑과 겸손을 배웁니다.
참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복음입니다. 하느님 친히 주도권을 잡으시고 그 존엄하신 분이 이름도 없는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를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찾아 나서는 겸손이 감동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그 촌구석에 있는 마리아를 눈여겨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좌절할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여겨 주목하시다 때가 되면 개입하셔서 큰 도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찾아냈을 때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바로 다음 인사말이 이를 입증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감격에 벅찬 하느님의 환호소리처럼 들립니다. 바로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이 처방을 받았을 때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물寶物입니다!”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이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연거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것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깊은 영적 소망일 것입니다.
둘째, 마리아의 경청과 순종을 배웁니다.
주님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마음에 담아두고 생각하는 마리아의 침묵과 경청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귀를,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혼자 일방적으로는 일을 못하십니다. 상대방 인간의 협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십니다. 이어지는 마리아의 경청의 겸손한 믿음에 마음이 놓이신 주님은 당신 속내를 다 드러내십니다. 이 또한 모험입니다만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신뢰하신 것입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어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당신 속내를 완전히 다 밝히십니다. 그처럼 마리아를 사랑하고 신뢰하셨던 것입니다. 시종일관 겸손히 침묵중에 경청하던 마리아의 “예스(YES)”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번으로 끝난 믿음의 순종이 아닙니다. 시종여일, 늘 아드님과 함께 하시며 믿음의 순종으로 일관하신 영원한 “예스맨(YES-MAM))”성모님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은 끝까지 순종하며 책임을 다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실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함께 하시며 책임을 다하신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부전자전이란 말도 있지만 저는 모전자전이라는 말마디가 더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아드님의 고백은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삶의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러 온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을 다한 삶이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성모님으로부터 경청과 순종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당연스럽고 자연스런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와 감사와 더불어 저절로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마리아 성모님으로부터 경청과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마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삶은 선물입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요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아니 우리 하나하나 역시 임마누엘 하느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주님의 사랑과 겸손, 마리아 성모님의 경청과 순종을 배우고, 찬미와 감사의 응답의 삶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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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모님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대답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고민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셨을까요. 혼전 임신은 아주 위험합니다. 죽을 수도 있는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약혼한 요셉에게도 이야기를 해야 할 터인데, 이런저런 고민 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십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마음에 품습니다.
우리도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특히 기도 생활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만을 품어야 하는 그 순간에 많은 것을 걱정하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분심에 사로잡힙니다.
지인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신부님, 왜 기도만 하려고 하면 생각나지도 않던 많은 것들이 떠올라서 기도를 방해할까요.
맞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심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고 집중할 수 없기에 나의 모습도, 하느님의 뜻도 듣기 어렵게 됩니다. 마음의 잔잔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뜻에 집중해보세요. 그리고 성모님의 굳은 신앙을 닮아 성모님처럼 하느님만으로 오늘 하루를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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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을 바꾸면….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하루가 바뀌고
하루가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체이즈-
작은 것을 바꾼다는 것은
그냥 작은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작은 것은 나중에 엄청난
선물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작은 선행이, 기도가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선물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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