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02
11월7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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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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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번 주간 내내 첫번째 독서로는 지혜서가 봉독됩니다. 이 책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서 9장 5~6절)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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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는 마침내 평생토록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로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나 다른 사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고, 함께 생활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살아생전 직접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목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 질 때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사도로서의 신원, 사명, 의무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티토서에서 어떤 사람이 사도요 참 목자인지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교우들의 신앙을 성장시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
거만하지 않은 사람
쉽사리 화내지 않고 자제력을 갖춘 사람
과음하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
손님을 환대하는 사람
선을 사랑하는 사람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
하나하나 점검해보니 저는 사도요 목자로서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과음하지 않는 사람’이란 대목에서 크게 마음이 걸립니다. 환골탈태해야 할 부분입니다. ‘신중한 사람’이란 표현 앞에서도 많이 송구스럽습니다. 매사에 더 진지해지고 신중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쉽사리 화내지 않고 자제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대목에서는 부끄러움이 참으로 큽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심하게 화를 냈던지, 얼마나 많은 경우 이성과 자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지...
한 사목자가 쉽사리 화내고 자제력을 상실할 때, 그가 담당하고 있는 공동체가 얼마나 힘들게 되는지를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지도자가 수시로 분노를 터트릴 때, 그를 따르는 양들은 얼마나 불안해지고 당혹스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사랑과 온유의 박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입니다. 그 역시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한 성격하셨더군요.
젊은 사제 시절 그는 개신교도들이 활개를 치던 샤블레 지방으로 선교를 떠납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자 크게 분노를 합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싹 쓸어버릴까 고민도 했습니다.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고, 연세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젊은 시절의 혈기로 저질렀던 과오를 크게 참회합니다. 동시에 열렬한 기도 생활과 더불어 비약적인 영적 성장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어느날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외풍에도 깊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 년, 이 년, 십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였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토록 그를 흠모했고 존경했고 추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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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이 '세상'>
‘아바타’라는 영화를 많은 분이 보셨을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 지구는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나먼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 자원을 채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독성을 지닌 대기로 인해 자원 획득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인류는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합니다.
한편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아 판도라에 있는 인간 주둔 기지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된 제이크는 자원 채굴을 막으려는 나비의 무리에 침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임무 수행 중 나비의 여전사 네이티리를 만난 제이크는 그녀와 함께 다채로운 모험을 경험하면서 네이티리를 사랑하게 되고, 지금까지 자신이 일해주고 있었던 인간들이 한 평화로운 세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갈취하려는 나쁜 무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끔 우리도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이크는 나비족을 구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더이상 인간 친구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제이크는 인간이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 전체를 등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한 쉰들러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이 자신이 살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쉽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쉰들러는 자신이 독일인이지만 독일인들에게 적이 되고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을 감수하며 유태인들을 구해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 그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저는 ‘하와’를 연상합니다. 하와는 이 세상에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 줄 유일한 짝입니다. 그러나 그 하와가 들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입니다.
만약 내가 그 열매를 받아먹지 않으면 하와는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죄짓게 했습니다. 하와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일이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들고 우리 옆에 서 있는 하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와와 함께 사는 한 결코 하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귀, 육신과 함께 ‘세상’을 인간이 싸워야 할 원수로 가르쳤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는 세상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북한에 사는 사람들이 북한 체제에 대해 모두 찬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런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자신의 무언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체제 속에서 그 체제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체제 속에서 살다 죽었다면 그 사람은 그 체제가 받게 될 벌을 같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우리를 자기 삶의 방식대로 살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돈과 권력과 명예와 힘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은 언젠가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죄로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 깊이 빠져 사라지게 될 바빌론, 이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또 큰 능력을 지닌 한 천사가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말하였습니다.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질 터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계시 18,21)
그렇다면 우리가 살 방법은 무엇일까요? 당당히 이 세상과 맞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가 이 세상의 조류 안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부자가 되기를 강요할 때 예수님은 가난해지기를 원하셨고, 이 세상이 명예를 찾을 때 예수님은 멸시를 찾으셨고, 이 세상이 편안함을 찾을 때 예수님은 고행과 희생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만이 이 세상, 즉 바빌론과 함께 멸망하지 않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이 세상에 순응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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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뉴욕에 있는 신문사는 교구 신부님들의 ‘사랑방’과 같습니다. 안식년으로 여행을 오신 신부님, 유학 온 신부님, 한국에서 휴가 온 신부님들이 잠시 머물다 가곤합니다. 안식년 중인 신부님이 며칠 머물다 갔습니다. 신부님은 27년 전에 보좌신부님으로 퀸즈의 한인성당에 3년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본당 청년들과의 모임에 잠시 함께 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2번 놀랐습니다. 하나는 기억력입니다. 저도 나름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데 신부님의 기억력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했습니다. 27년 전의 청년들 이름과 세례명을 거의 기억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름은 생각나지만 세례명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이름은 생각나는데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심한 배려입니다. 서울 간 오빠가 동생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듯이 신부님은 오랜만에 만나는 청년들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받는데 익숙해 있던 제게는 다소 생소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그렇게 반가운 것은 신부님과 청년들이 좋은 추억을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시 만나도 반가운 인연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처와 아픔이 남는 만남도 있습니다. 기억력이 좋아도, 물질적인 보상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만남입니다. 그 이유는 품격과 자질의 문제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강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셨습니다. 왜 아팠는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작은 약점을 들춰내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세리를 낮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는 바리사이들의 행동을 나무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의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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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6: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오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남을 유혹에 빠지게 하고, 피곤하게 하며, 넘어지게 하고, 모든 일을 어지럽히고,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다. 죄짓게 하는 일이 있어서 죄가 생겨나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것이 곧 죄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잘못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부자 이야기에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그때마다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어 나쁜 습관이 굳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것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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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와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그리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가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7회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만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저마다 여러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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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님]
<용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보통 두세 번 용서하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를 더 늘려 잡으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하고 있는 이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그가 잘못한 것들을 일일이 공책에 적었다. 그리고 자기도 얼마간 잘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 잘못도 써 내려갔다. 그런데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두 쪽밖에 안 되는데 자기 잘못은 세 쪽이나 되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 잘못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며, 또 자기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닮으려면 먼저 용서하라’라는 말이 있다. 용서는 ‘신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신에게 베푸는 자비요, 상처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치유 행위이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증오심을 갖게 되면 그로 인해 더 큰 상처만 생긴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고 기도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도 언제까지나 유보된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간마다 용서를 청하는 우리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서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랑을 나누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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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가족으로, 친구로, 스승과 제자로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많은 관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자라나고 성숙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친구를 잘못 만나면 인생이 꼬이기도 하고,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치면 그 제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평생 진리로 알고 살아갑니다.
나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은 없는지를 생각하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 부정적인 영향들에도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분열입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데 대화와 타협을 하지 못하고 내 의견만을 고집할 때, 나의 명예만을 지키려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짓밟을 때, 내가 잘못했음에도 용서를 청하지 못하고 자존심만을 내세울 때, 그리고 잘못한 형제가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데 나의 상처만을 내세우며 그를 용서하지 못할 때, 이런 것들이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은 바로 분열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바로 용서와 믿음입니다. 이들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일치와 친교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맺는 많은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일치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고, 추문과 악한 표양으로 분열의 씨앗이 된다면, 이것은 개인적인 선행이나 악행의 차원을 넘어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의 심장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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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관계를 잘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이는 화롯불처럼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리 대하여서도 안 되고, 아무리 내 아내, 남편, 자식이라고 하여도 내 소유물처럼 다루어서도 안 됩니다. 친한 친구끼리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당사자가 없다고 험담과 뒷담화를 일삼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만, 그렇다고 내 잘못이 아니니 용서를 청할 필요도 없고, 굴욕스럽게 낮은 자세로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생각의 틀을 꾸짖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용서 청하면 언제든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고,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다고 판단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언제든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지도자인 원로와 감독이 될 수 있는 인격적 조건을 열거합니다. 흠잡을 데 없고, 가정에 충실하며, 방탕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 거만하지도 않고, 손님을 잘 대접하며, 선을 사랑하고,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굳게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사제와 주교를 선발할 때 이런 기준들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한 사도들의 기도가 우리 입에서도 나와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지닌 이들을 성령께서는 우리 세상과 교회를 바꾸는 놀라운 능력으로 채워 주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교회의 성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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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홀로라도>
루카 17,1-6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믿음의 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대 홀로라도>
그대, 착한 사람아
그대의 착함이
벗들마저 착하게 하리니
홀로라도 늘 착하시게나
그대, 참된 사람아
그대의 참됨이
벗들마저 참되게 하리니
홀로라도 늘 참되시게나
그대, 곧은 사람아
그대의 곧음이
벗들마저 곧게 하리니
홀로라도 늘 곧으시게나
그대, 밝은 사람아
그대의 밝음이
벗들마저 밝게 하리니
홀로라도 늘 밝으시게나
그대, 맑은 사람아
그대의 맑음이
벗들마저 맑게 하리니
홀로라도 늘 맑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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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 군대에서는 사병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평일 일과 후와 휴일에는 휴대전화 소지와 사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고, 올해 말까지 시범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군 생활할 때는 소위 휴대전화 전에 많이 사용했던 삐삐도 있기 전이어서 무조건 공중전화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중전화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수신자 부담 통화’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집에 전화 한번 하고 싶어서 공중전화 앞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편하게 휴대전화로 통화할 수 있습니다.
신부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려고….”라면서 군대 다녀온 거의 모든 신부가 휴대전화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군대에만 충실해야지, 휴대전화가 있으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한 뒤에 탈영과 자살이 급격하게 줄었데.” 저 때의 군대 생활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군대는 옛날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휴대전화가 사람을 살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경험이 무조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또 환경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사람은 무조건 율법 중심이었지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세세한 규정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탈리오 법칙으로, 피해자가 받은 피해 정도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내리는 보복 법칙이 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하지 말고 그 대신 용서하라는 새 윤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용서는 한계가 없는 것으로, 회개하거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먼저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굳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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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유혹은 나 자신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연약한 피조물이므로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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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자답게 사랑하기>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나 일반 대중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웃을 사랑할 때 제자답게 좋은 일 하는 적극적인 사랑도 해야겠지만 소극적일지라도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사랑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로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데 이런 의도와 달리 나도 모르게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남을 죄짓게 하는 겁니다.
부지불식간이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라는 뜻인데 실제로 우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입니다.
전에 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운동권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후배들을 의식화하고 투사로 길러내곤 하였지만 이처럼 의식을 강조하고 의식을 하며 살려고 하더라도 우리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것이 현대 심리학의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 성찰과 아울러 무의식의 개조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오랜 기간 형성된 무의식을 개조하기 위해 그것을 또 오래 의식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무의식은 의식의 반복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제가 청원자 양성을 할 때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듯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양성도 했는데 예를 들어 수도원 들어오기 전에 하던 대로 문을 쾅쾅 닫아 이웃에게 피해 주던 형제를 이제는 그러지 않게 하기 위해 문을 살살 닫는 것을 의식하고 반복하게 하면 나중엔 의식치 않아도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살살 문을 닫게 되지요.
다음으로 주님의 제자라면 형제의 죄를 무한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줘야 한다.”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면 한 번 용서하기도 힘든데 주님의 제자라면 무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두 번 용서해줬는데도 그 죄가 반복되면 구제 불능이라며 포기합니다.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한두 번 용서해주는 정도이고, 더 이상의 사랑을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형제가 죄짓거든 꾸짖는 것까지 하라고 합니다. 꾸짖어서라도 죄를 짓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용서해주는 것도 힘든데 꾸짖는 사랑까지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꾸짖을 때 상대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꾸짖는 것도 힘들지만 꾸짖을 자격이 없는 나라는 것을 알면서 꾸짖는다는 것이 더 힘들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힘들어도 사랑 때문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꾸짖어야 하고, 그렇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며 꾸짖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답게 사랑하는 것 참 힘듭니다.
그래서 힘드니 그만둘까, 힘들어도 사랑할까 선택해야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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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자기 훈련>
- 참사람되기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해(to be)’,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발적 한결같은 분투의 노력을 통해, 자기 훈련을 통해 참사람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인생 여정은 참사람이 되어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광야인생 여정중에 세부류의 인생이 즉 성인이, 괴물이, 폐인이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고 잘못 미치면 폐인이, 괴물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자기 훈련에 미쳐야 참사람에 도달합니다.
요즘의 만추의 단풍처럼 성숙해가는 가을 노년 인생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이래서 평생 자기 훈련입니다.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은총과 더불어 평생 자기 훈련이 필수입니다. 전우애의 훈련, 학우애의 훈련, 형제애의 훈련입니다. 읽을 때마다 공감하며 결의를 새로이 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기도중 한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한결같은 자발적 분투의 훈련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자기 훈련입니다. 이래야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나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 목표가 바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온통 자기 훈련에 관한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남을 죄짓게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훈련 역시 필수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역시 깨어 자기 훈련에 충실할 것을 명하는 주님이십니다. 형제가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용서하는 용서의 생활화입니다. 새삼 용서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부단한 용서의 훈련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의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께 믿음의 은총을 청하는 사도들입니다. 참 좋은 믿음의 은총입니다. 믿음 역시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저절로 믿음이 아니라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믿음의 훈련이 절대적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여 제반 수행에 충실함이 바로 믿음의 훈련입니다. 마음을 다해 매일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에 충실하는 것 역시 믿음의 훈련입니다.
매일의 규칙적 일과의 수행에 충실하는 것 역시 믿음의 훈련입니다. 인내의 훈련, 기다림의 훈련, 형제들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견뎌내는 훈련 역시 믿음의 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티토서에 나오는 원로와 감독 역시 얼마나 자기 훈련이 잘 된 자질의 사람들인지요!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원로나 감독은 물론 믿는 이들 누구나 유의하여 훈련해야 할 주의 사항들입니다. 공동체의 책임을 진 이들은 더욱 자기 훈련에 힘써야 함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자기 훈련을 사랑하십시오. 선을 사랑하듯이 자기 훈련을, 자기 성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얼마나 자기 훈련을, 자기 성소를 사랑하는지 자부심 넘치는 다음 확신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얼마나 자기 훈련이 잘 된 바오로 인지요! 자기 훈련에 앞서 자기의 성소에 대한 확신이 우선임을 봅니다. 바오로와 같은 이런 자기 성소와 신원에 대한 확신에서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자기 훈련의 열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처럼 자기 훈련에 늘 충실한 이들이 참으로 영육으로 튼튼하고 건강한 이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자기 훈련입니다.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의 학인으로서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은 자발적 열정의 자기 훈련은 필수입니다.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용서도 기쁨도 평화도 찬미도 감사도 은총임과 동시에 훈련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 자기 훈련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필리2;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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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기적!>
오늘 복음(루카17,1-6)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 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무거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1-2)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3-4) 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람들의 '구원지침'입니다. 그러니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신앙인의 참모습'입니다. 하지만 삶의 자리에서 이를 실행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의 힘'이 우리에게 더해져야 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굳게 믿고, 굳게 희망하면서, 굳게 사랑을 실천해 봅시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오늘도 '믿음의 기적'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힘으로 어제 기공식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께 함께 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평신도 주일에 많은 신자들이 함께 해 주셔서 크게 기뻤습니다. 늘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잘 걸어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잊지않고 기억하면서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궁전)을 잘 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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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gzmsIj3s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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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 4)
삶의 새로운
시작은 회개이며
회개의 절박한
실천은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함께 걸어가는
우리들 일상이며
우리들의
오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용서는 무척 힘든
우리의
내적작업입니다.
뜨거운 신앙은
우리를 용서로
초대합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관계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간절히 묻게 됩니다.
미운 마음을
억울한 마음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용서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마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들
관계입니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우리들 관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상처는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서로 닮아있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용서의 길로
안내하는
십자가의
상처입니다.
원망하는
상처가 있기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용서의 시작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용서 안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회개이며
용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회개로 시작되고
하느님의 은총에
화답하는 길이
다름아닌
용서임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하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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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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