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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미륵보살은 이 뜻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게송으로 물었습니다. |
금일 법화경 법회 큰스님께 법문을 청할 청법가(請法歌)를 하겠습니다.
(진행자)금일 법화경 법문을 해 주실 무자 비자 큰스님께 삼배 올리겠습니다.(대중 삼배 올림)
전통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여러 번 반복을 해서 가장 이것이다 싶어서 그래서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은 여러분들이 몰라서 내가 선창을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선창을 하면은 하고 싶어도 참고 있다가 선창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상심심미묘법....’ 이게 전통 상강례(上講禮) 의식이에요.
수십 년 가르친 사람도 그 의식에 따라서 그렇게 따라서 합니다.
불자님들은 그만치 수준이 있으니까 수준이 있으면 그 수준에 맞춰서 의식도 그렇게 따라서 그렇게 법도에 맞게 하는 것이 보기가 좋고 모양이 좋다고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 설사 어느 다른 절에 가시더라도 ‘아 이런 의식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그렇게 맞춰서 법도와 예법에 맞게 척 하면 그게 제일 듣기도 좋고 모양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의 포교고, 전법이니까 말씀드립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는데 오종법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책을 지니고 다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꼭 책을, 지금은 상권을 하고 있으니까 책을 꼭 지니고 다니세요. 다니시면 그 만치 이득이 있고 공덕이 됩니다.
연세 지긋한 분이 또는 젊은 분이 척 내 놓고 읽으면서 전철을 타고 가는 그 모습, 얼마나,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근사합니까?
국민 교육 입장에 있어서도 그 점이 참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것을 우리 불자님들이 선두에 서서 그런 교육을 하십시다.
그래서 이 법화경의 오종법사는 가지고 다닌다, 항상 가지고 다닌다, 등산을 가든지, 뭐 화장실을 가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더러운 곳일수록 청정한 경전이 필요한 곳입니다.
‘무슨 초상났다, 무슨 화장실이다, 그런 데에 스님, 그런 경전이나 염주 가져가면 됩니까?’
그런 곳일수록 경전과 염주가 더 필요한 곳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돼요.
그리고 또 다니다 보면 읽게 되고, 읽게 되면 외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누구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이야기해 주세요, 그땐 마음 놓고 이야기해 주세요.
그리고 좋은 구절이 있으면 노트하십시오. 사경하십시오. 그것이 법화경의 오종법사, 가지고 다닌다[受持], 읽는다[讀], 외운다[誦], 말해 준다[解說], 쓴다[書寫].
이 시간의 제한도 있고 하기 때문에 경전 구절구절을 낱낱이 다 함께 우리가 다 읽으면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충 요약을 하고 거기서 꼭 빠뜨려선 안될 중요한 내용은 제가 짚어서 설명해 드리고, 여러분들이 집에 가셔셔 또는 찻간에서
이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법사의 가르침과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그 성의가 서로 맞아 떨어져서 축착합착이 됐을 때 그 효과는 열 배 스무 배 더 드러나고 그 상승효과가 나타납니다.
어떤 일에도 마찬가지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일러주고 자식이 듣고저 하고 할 때 그 교훈은 훨씬 빛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와 같습니다.
법회에 모인 대중들 중에서 여러 대중들을 내가 이제 소개를 했죠? 그러면서 우리 불자들, 승속을 막론하고 최초에 부처님의 제자가 된 그런 기원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늘은 18쪽에 보면 ‘게송으로 다시 묻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경전에는 그 중에서 가장 정제된 경전, 발달한 경전, 다듬어진 경전, 가장 우수한 경전은 이 산문과 운문이 이렇게 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용어로 말하면 ‘장항(長行)’과 ‘게송(偈頌)’ 이렇게 말해요, 전통적으로는.
그래서 장항(長行)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장항을 다시 반복 연습하거나 좀더 부연 설명하는, 장항에서 빠진 부분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운문으로써 시 형식을 통해서 다시 거론을 합니다. 그것을 ‘게송(偈頌)’ 이렇게 해요.
그것은 보통 우리 용어로는 ‘산문(散文)’과 ‘운문(韻文)’ 그렇게 합니다. 앞에 장항은 산문에 해당되고 게송은 운문에 해당됩니다. 시형식으로, 5자 시 형식 내지 7자 시 형식을 통해서 다시 이제 뜻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거죠.
반복해서 공부하는 점도 있고, 좀더 부족한 점을 더 드러내는 그런 점도 있습니다.
법구경 같은 것은 순전히 시 형식으로써 경전이 이루어진 것이 법구경이잖습니까?
이게 다른 경전에는 그렇지 못한데 어찌하여 이런고 하면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법화경은 가장 발달한 경전입니다.
불교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탄생한 경전, 결집된 경전이 법화경이기 때문에 그런 글의 형식까지도 그와 같이 아주 그 완벽하게 구비되었다,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미륵보살은 이 뜻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게송으로 물었습니다.
여기 미륵보살이 이제 부처님의 광명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들을 신기하게 보시고서 그 뜻을 묻기 위해서 산문으로 묻고 나서 다시 게송으로, 시 형식으로써 다시 묻게 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고 한 단락만 우리가 다음 페이지 중간까지 같이 한번 합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6. 미륵보살은 이 뜻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게송으로 물었습니다. 일만 팔천 국토를 비추시고 모두 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아비지옥까지 비치고 위로는 유정천(有頂天)까지 비치어 |
이렇게 이제 대략적으로 이러한 말씀을 하고 그 다음에 그 광명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모습을,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도 소개하게 되고, 그 다음에 보살들이 보살행을 닦는, 다시 말해서 우리 불자들이 수행하는 어떤 상서의 모습도 소개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보살의 어떤 그 수행하는 모습을 주욱 여러 가지를 많이 소개 하는데 나중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는 모습도 이 광명 속에 나타나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들을 전부 이야기를 하는데 우선 여기서 빠뜨려선 안 될 일이, 내용이 이런 것이 있습니다.
19. 만약 어떤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싫어하면 열반의 도리를 설하여 모든 고통을 없애도록 합니다. |
이 내용은 부처님의 설법의 내용을 여기서 간략하게 소개를 합니다. 부처님 일생동안 설법하는 그런 그 설법의 전체 개요를 이야기하는데,
온갖 고통이 싫어서 아 정말 세상이 싫은 사람, 정말 고통이 싫은 사람, ‘제발 뭐 성불이고 보살행이고 그거 난 관심 없다, 오로지 그저 고통만 없었으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래, 고통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부처님의 설법보다 더 급한 일이듯이’
부처님은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 열반의 도리입니다. 열반재일 얼마나 많습니까? 열반의 도리,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이 조용히 가라앉아가지고 깨끗하게 식어버린 상태, 다시 말해서 불을 켰다가 그 불이 꺼지고 그리고 그 불을 지폈던 나무나 짚이나 촛불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불을 지폈던 그 물건들이 깨~끗하게, 싸~늘하게 식은 재처럼 우리의 사고가 그렇게 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무 걱정 없겠죠.
저도 한참 참 고민 많을 때에는 저~ 산속에, 그것도 산속에 양지 바른 곳이 아니고
저런 이름 없는 돌이 되어가지고 그냥 살았으면, 저런 이름 없는 돌이 되어서 아무 고통도 즐거움도 모르고 세상사 모르고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지극히 소극적인 그런 삶을 ‘열반의 도리’라 합니다.
이것은 할 수 없어서 방편으로 부처님이 내놓은 가르침이 열반입니다.
‘부처의 삶을 살라!’ 라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 법화경의 가르침입니다.
앞에서는 성문이고, 여기서는 연각의 도리입니다. ‘그래, 인연이 그런 걸...’이렇게 하고 인연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버립니다. 인연은 그게 아니에요.
인연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인연을 지어갑니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인연을 지어가고 만들어갑니다.
‘아이고 그것도 다 인연인 것을...’ 이런 식으로 그냥 운명에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그렇게 인연을 이해하면 그건 잘못 된 거예요.
인연은 지극히 능동적인 그런 요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난 중생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법화경을 통해서
이렇게 적극적인 사고를 하고 거기에 깊은 자각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이 위대한 경전이고 법화경이 공덕이 많다, 라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다음 페이지에 보면 ‘보살행의 상서’라고 되어있습니다.
20. 내가 보니,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저 세계의 보살들이 |
이것 참, ‘내가 보니,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저 세계의 보살들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걸 다 봅니다, 지금 ! 광명이 이 모습을 비췄어요!
‘저 많은 세계의 보살들이 가지가지 인연으로 부처님의 도를 구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지가지 인연으로, 여기에 와서 복을 비는 사람, 여기에 와서 뭐 염불을 하는 사람, 주문하는 사람, 아 법화경만 좋아서 오신 분, 기도하기 위해서 오신 분, 천도하기 위해서 오신 분, 아니면 뭐 그저 매일 법당이고, 또 그저 부처님 도량이니까 그저 기계적으로 나오신 분 뭐 등등 여러 가지 인연이 다 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이 자리에 오셨던, 우리는 법화회상에 왔고 법화행자입니다. 법화회상이요, 법화행자입니다. 하나로 귀결되어 버렸어요, 이제는.
결국은 그러한 인연으로 끝내는 불도를 구한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보면은 가지가지 인연 중에서 여기 보시를 들고 있어요.
금강[다이아몬드] 같은 온갖 보배와 또 노비와 수레들과 보배로 꾸민 연을 기쁘게 보시하여 불도[佛道;불교]에 회향하고, |
‘삼계에서 제일 가는 일불승(一佛乘)을 얻어 부처님의 칭찬 받기를 원한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시, 너무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지마는 진부하다 생각마시고 내가 다시 이제 보시에 대해서 조금만 언급하고 나가겠습니다. 이거 끊임없이 보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계속...
그렇게 이제 베푸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된다, 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가치 있는 보시가 무얼까?
법을 우리가 이렇게 서로 전하고, 또 귀담아 듣고, 또 딴 사람에게 소개도 하고, 또 책으로 된 것을 나누고 하는, 이 일이 가장 우수한 보시입니다. 그거 아셔야 돼요.
그러면은 다른 보시보다도 그 공덕이 훨~씬 높다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제 부처님의 식성에 맞는 공양을 대접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누구에게 식사 한 때를 대접한다, 그럴 때 여러분들, 그 사람의 식성을 감안하고 대접을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을 여러 수십 년 올렸습니다.
한사람도 아마 제대로 부처님 식성 알아가지고 공양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가 그동안 구태의연하게 걸어온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선조들이 해온 그 모습 그대로, 마 그게 불교려니, 이렇게 생각하면 이 시대를 살 가치가 없는 거죠.
이렇게 발전한 21세기 이 시대에 우리가 호흡하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이 시대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그런 불교를 개척해 가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는 부처님 식성에 맞는 공양을 대접하자.
자기식성에 맞는, 된장찌개 좋아하는 수준에게다가 저기 양식집에, 비싼 양식집에 가서 공양 대접해 봐요.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거야.
밥맛이고 뭐고 뭐 다 잊어버리고, 땀만 빠작빠작 흘리다 나오는 거야. 돈은 몇 배로 더 들고. (일동 웃음)
부처님께 그런 식으로 공양 대접한 게 아닐까? 그동안 불공드린다고 하면서...
양식이 뭔지도 모르는 된장찌개 수준에게다가 양식을 대접하면서 하루 종일 땀만 빠작빠작 흘리고 밥맛이 뭔지 모르고 그러다가 실수하기가, 곧장 실수만 나오죠.
물 쏟고 뭐 쏟고, 그리고 여기다 걸치는 무슨 수건 있지요? 그것도 저기 떨어져 저 쯤 가 있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가 공양 올렸습니다, 사실은 우리 하는 행동이 그랬어요.
불공, 불공, 얼마나 정성스럽게 합니까? 정성은 그렇게 들이면서 실지로 부처님 식성을 알고 공양 올린 적이 없습니다.
저기 남산 만치 쌓아놓고 촛불을 켜고 향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다. 법공양이 제일이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대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