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에서 ‘비행’ 요소의 결여에 대한 고찰
제주대학교 유가철학 중간고사 대체과제
철학과 2017101231 강봉석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원령공주>,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의 대부분의 경우 공통된 특징이 존재한다. 바로 ‘비행’이다.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개인적인 취향일지 아니면 대중의 공통적인 욕망과 동경, 로망이기에 그 점을 공략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행을 인식하고 보면 거의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이 하늘을 날거나 <벼랑 위의 표뇨>에서 하늘을 날듯이 물 속을 헤엄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주인공 자매가 토토로 혹은 고양이 버스를 타고 하늘을 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강의 신 하쿠와 함께 하늘을 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주인공이 하울과 함께 하늘을 걸어다니고 또 비행기를 타고 날기도 하며 하울은 아예 새로 변해 날아다니기도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 <바람이 분다>와 같은 작품들은 비행기가 작품의 스토리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비행기 또는 마술을 통한 비행, 그마저도 아니라면 새를 등장시켜 비행에 대한 모습을 작품들에 꾸준히 등장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지브리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작품인 <원령공주>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아주 악착같이 비행에 대한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수많은 동물이 등장하는데도 새는 기껏해야 멧돼지들이 모일 때 그 주위를 맴도는 정도로만 등장할 뿐 주된 감상 요소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아시타카도 히로인인 산도 숲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긴 하나 하늘을 날진 않는다. 심지어 아시타카의 경우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기까지 하는데도 하늘만큼은 날지 않는다. 이렇게 설정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고 보며, 다른 지브리의 작품들과 <원령공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본다.
비행이 가지는 속성을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표현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붉은 돼지>에서 비행은 낭만을 가지고 국가에 통제당하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행동이다. 하지만 비행하는 한 한 자리에 정착할 수 없는 외로운 것이다. <바람이 분다>에서 비행은 낭만임과 동시에 지극히 기술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비행기 동체와 날개의 곡선을 아름답다고 하며 비행 그 자체에 동경을 품지만 비행기는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을 필요로 하며 전쟁의 무기로 쓰임에도 필수적이기에 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늘을 나는 괴조(怪鳥)로 변하는 것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저주라고 말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비행은 해방을 의미한다. 오물신이었던 한 강의 신은 쓰레기들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해진 뒤에 자유롭게 날아가며, 마녀 유바바에게 종속되어 있다가 이름을 되찾으며 자유로워진 하쿠는 용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게 된다. 이와 같은 예시들을 종합했을 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사용되는 비행 묘사는 이전의 지루한 일상과 사회로부터의 탈출, 기존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를 의미하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더더욱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만드는 속박이기도 하다. 또 비행을 동경과 낭만의 대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동경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원령공주>에서는 그러한 비행을 작품에서 배제시킨다. 모든 존재는 전부 땅에 붙어 살며, 신조차 모두 이 땅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즉 신조차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나무의 정령인 고다마도 자유자재로 나타나고 사라지지지만 나무가 죽을 때 함께 죽는다. 비행을 배제함으로서 자연을 경외해야 하는 것 혹은 인간을 넘어선 것으로 그려지지 않고, 인간과 똑같이 이 땅에 존재하면서 우리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자연도 온전히 자유롭지 않으며, 자연도 삶이라는 문제에서 해방되어 있지 않다.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잘 잡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 아시타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저주를 받아 몸이 썩어가며 죽어가는 아시타카는 죽음이라는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자연과 인간 모두를 고려하면서 둘 중 어느 쪽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작품 속 그 누구보다 고생하고 노력하며 분주히 뛰어다닌다. 단순히 자연을 향한 시선을 낭만으로 두지 않고, 인간의 삶과 똑같이 삶이 있는 것으로 보며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듯이 자연도 그와 똑같이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령공주>에서 인간과 자연은 적극적으로 화해하지 않는다. 자연을 대표하는 산은 다시 숲으로 돌아가고 아시타카는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간다. 그래도 아시타카의 마지막 대사인 “함께 살아가자”가 주는 메시지는 <원령공주>의 표어인 “살아라”의 진정한 모습이며, 자연 친화가 단순한 낭만과 감성의 영역이 아닌 또다른 삶과의 공존과 화합임을 의미한다. <원령공주>는 다른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던 가벼운 로맨티스트적인 메시지를 넘어서서 궁극적인 연대와 이해, 사랑의 메시지를 만들었기에 가장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주제의식과 동떨어진 지적질을 하자면 도입부에서 하늘을 나는 새가 등장했던 듯해요. 웃자고 하는 소리니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고요. 비행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에서 벗어나는 해방, 자유라고 하고, 그러한 행위와 그것에 대한 기대조차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철저히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을 듯해요. 사슴신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생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개발행위는 중지되지 않는 현실 등이 치열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살아라"라는 메시지와 묘하게 일치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이렇게 볼 때 이 주제는 도가철학에 좀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유가철학에서 논의되었던 이야기들이 좀 더 반영되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 그런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