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면 꽃집 (외 2편)
이수진
첫눈이 내리면
나는 내 몸 어딘가에 앉고 싶어진다
기억에 없는 어느 시간이
막 들이밀고 와서
설렘을 한가득 피워낼 때면
나도 모르게 오후의 불안 뒤로 두 걸음 물러나곤 하였는데
그날은
거기 꽃집이지요
어떤 목소리가 내게 들이닥쳤다
나는 얼결에 존재와 부재의 내통으로
이때껏 슬픔이 잘 지내고 있다는
난데없는 안부들이
수국으로 제라늄으로 피어나는 시간을 듣고 있었다
가만히 그리움이 자라는 동안
어느 천사의 동행처럼
나는 거기에 잠시 속해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답 없는 우두커니에
꽃이 관여하지 않는 흔들림이 스미듯
부름과 무답 사이로
잠시 머무르다 물들기도 하고
문득 돌아보다 닮아가기도 했을
한때 우리였을 순간들
지금은 잊은 것도 잊은 꽃집이라는 꿈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첫눈이 꾸는 꿈에
내가 앉은 건지 눈이 앉은 건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장지에서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꽃잎을 하나씩 따내고 있었다
우리가 떨어뜨린
눈알사탕에
개미들 몰려드는 줄도 몰랐다
게임이 끝물로 향해가고 있을 즈음
먼 친척 형이
이놈의 개미새끼, 하면서
오른발로 개미족을 짓이겼다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지구 끝의 비명이 가볍게 덮였다
우리는 그때
죽음을 열망하며
마지막 꽃잎 잃을 이마에
딱밤 새길 생각으로
웃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근사한 일
우리가 극장에서의
약속이 많았던 때
서로에게 시가
되어주는 날도 있었지만
철새들이 날아간 설산을
그리는 날이 더 많았다
아이스크림 광고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몰라도
눈 덮인 마을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주 웃기도 하였다
한 번은 우리가 직접 이별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고는
그것을 그대로 완성해버렸다
깨어 보니 텅 빈 어둠
지붕 없는 하늘
그 아래서 우리는 모두 젖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무얼 더 하려 해도 무얼 더 할 수 없었다
우리의 러닝타임
유리병 속 던져진 필름마냥
철새들은 돌아오는 길을 잃고
우리의 영혼은
조금 일찍 가볍지 않은 걸음을 걷게 되었다
희망이 낮을 땐
희망을 바닥에 널어놓아야
가장 근사하다는 걸
알아보는 우리의 눈뜸이 있었다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202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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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 충남 아산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