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ENTIALISM; THE LAST ACCEPTABLE PREJUDICE
역자는 ‘최후의 면책성 편견, 학력주의’라 번역했다.
‘마이클 코언’은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이자 해결사로 일해 왔다. 그는 트럼프가 했던 지저분한 일을 밝혔는데, 정사를 치른 여자에 돈을 질러주는 일, 트럼프 모교의 이사진에게 트럼프의 성적, SAT 점수 등을 밝히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던 일이다. 무기가 되어버린 대학 간판은 트럼프가 자신의 학업성적이 뛰어났다 자랑했으나 그의 사용어휘는 연구자에 따르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었다. 그의 국무장관도 트럼프를 ‘얼간이’라 부르고 세계인식 수준이 초등학생 6학년 수준이라 말했다. 1990년~2000년대 주류 정당들은 불평등, 임금 정체, 제조업 일자리 감소 등의 해답으로 교육을 내세웠다. 지난 수십 년간 진보 및 자유주의 정치권의 주된 담론은 교육에서 맴돌았다. 학력주의가 잘못된 대표적 사례는 ‘데이비드 할버스탑’의 명저 “최고의 인재들 The best and the brighter”다. 이 책에서 케네디는 최고학력의 호화판 내각을 꾸렸던 사례가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뛰어난 전문성에도 베트남 전쟁의 늪에 뛰어든다. 오바마 내각도 비슷하다. 오바마의 경제고문들도 늪을 자초했다.
능력주의 사고방식은 이분법적 대조 가치로 ‘스마트하냐 우둔하냐 smart vs Dumb’로 자리 잡았다. 오바마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 그래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오바마는 “저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우둔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스마트냐 우둔하나 논법을 썼다.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에 노동자들은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에) 불만을 느낀다. 학력주의는 면책성 편견이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두드러진다. 대학 졸업이 없는 약점을 있는 집단 중 가장 피하는 대상은 모슬렘, 터기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시각장애인, 저학력자 등에서 고학력 유럽인이 보이는 반응은 저학력자가 가장 기피 대상이었다.
미국은 2/3, 영국은 70%가 비 대졸자이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극소수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이 있어야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능력이다. 2016년 미국 비 대졸자의 2/3가 트럼프에 투표했다.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의 지지에 변수가 되었다. 학력이 높은 사람은 힐러리에게 투표했다. 트럼프는 승리를 자축하면 “난 덜 배운 사람을 사랑한다.” 외쳤다. 미국의 고학력자는 중도좌파 정당에, 저학력자는 우파정당에 투표한다. 이런 현상은 영국도 마찬가지기로 대졸자 비중이 제일 낮은 20개 지자체 중, 15개에서 브렉시트 찬성표가 많았다. 고학력자가 많은 20개 자치단체는 모두 반대했다. 1970년대 이전은 미국도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 꾸준히 민주당에 투표했었다.
능력주의는 오늘날 세계에서 패권을 쥐고 있다. 세계 전역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도좌파와 우파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책에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되지 않고 있다. 부유하고 유력한 힘이 있는 사람은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하고,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식에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부자와 인맥 있는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불평불만들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하는 공허한 약속이다.
능력주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는 것이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노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얻어야 한다. 사다리의 단이 얼마나 떨어지어 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민주사회에서는 정의 사회에 대한 방법으로 자유시장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에 담론을 뒀다. 두 사상 모두 능력주의와 구별하기 어렵다. 경쟁적 시장사회에서 ‘승자는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관념을 반박하기는 하되, 이 폭정을 극복할 수단을 내놓지 못했다. ‘하이테커’는 <자유 헌정론>에서 저유와 공존할 유일한 평등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여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가는 평등 하거나 우대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평등한 운동장을 만들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 현실적이며 결국은 강압적인 계획이기 때문이다. 가족제도 하에서는 인간은 서로 다른 처지의 가정에서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집권 엘리트에 대한 포플리즘의 반격은 대체로 자신들이 전문직업인들에게 비 대졸자라면서 업신여겨졌다고 믿는 노동자들의 분노에 힘입는 것이다. 좋음보다 옮음이 먼저라는 주장은 사회적 명망을 개인 도덕의 문제로 돌렸으며,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이 오만과 굴욕의 정치에 깜깜하게끔 했다. 인종과 성적 부정의가 감소한 지금, 우리는 아직도 스마트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 사이의 큰 부정의를 남겨두고 있다. 우리는 서로 ”운명을 함께 나눠야 한다“ 주장한 ‘본 롤스’의 민주적 감각과 동떨어진 채 일부 복지국가 자유주의가 빠지기 쉬운 능력주의적 오만의 민낯이다.
2021.02.21.
공정하다는 착각-2
마이클 센델 지음
와이즈베리 간행
첫댓글 능력주의적 오만이 착각으로 이어지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