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因緣
<제8편 풀꽃>
①어느 봄날-21
정읍댁은 여간해서 헤프게 말을 흘리어내지는 아니하였지만, 속으로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하여보면, 가슴 한켠으로 저릿저릿 아픔이 전율하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번민도 없으리라고, 그는 정읍댁의 속맘을 꿰뚫어 헤아리고 있었다.
하기에 가족들이 아침을 다 먹은 뒤는 으레 그렇듯 자전거 뒤에 정읍댁을 태우고, 복숭아과수원을 향하여 달리었다.
이것은 비단 정읍댁 뿐 아니라, 구레나룻 쪽으로 생각을 돌리어보더라도, 겨우내 두어 달이 지나도록 그림자도 비치지 아니하였을 뿐더러, 소식조차 전하여주지 못하였으니, 그는 나름대로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를 거였다.
그는 서둘러 자전거페달을 밟으면서 범바위고개 오르막길을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고갯마루에서 바우네가 내리어다보고, 있지 않은가. 얼핏 치어다보기에도, 그녀는 복부가 마치 맹꽁이처럼 불러있었다.
“친구, 워디루 나들이 가는 겨?”
천복이 고갯마루에 올라 자전거를 세우자, 바우네가 정읍댁에게 달리어들더니, 다잡아 묻는 거였다.
“난, 모른디, 야럴 따라간겨. 근디 당슨 배가 터질 긋 같네. 은지가 날 달이랑가?”
정읍댁은 그녀의 물음에 시치미를 떼고, 어디를 가는지 모른다며, 천복을 따라간다고만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배가 유독 불러 보이니까, 속으로 섬뜩 놀란 정읍댁은 언제 날 달이냐고, 묻는 거였다.
“담달이 날 달인디, 울 영감언 아덜얼 낳얀다고 헌디, 워쩔라나 울 수영엄니한티 가서나 여쭤볼랑게.”
천복은 둘이서 은근한 말을 주고받자, 이내 소변도 볼 겸하여서 자리를 피하여주었다.
“근디 바우네넌 아럴 워떻기 밴겨?”
정읍댁이 불쑥 묻는 말이었다.
“업세. 자그넌 아럴 생즌 안 낳본, 여자츠럼 말허네이. 아, 울 영감허고, 자서나 뱃제.”
정읍댁이 물은 건 그것이 아닐 터인데, 그녀는 영감하고, 자서 아이를 배었다고 대꾸하였다.
“그러먼, 핑생 살으갖고, 못 난다더니, 인자사 아럴 밴겨?”
정읍댁은 은근히 바우네를 추궁하고 있었다. 실지 정읍댁은 그녀가 임신한 속내를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와 둘이 만나 노닥거릴 겨를도 없으려니와, 바우네의 그 비밀스러운 일을 경산은 알고 있으되, 경산 또한 정읍댁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였다.
경산은 만일 정읍댁에게 바우네가 총각 김봉규와 상관하여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가는 어떠한 자극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을 거였다.
혹시라도 바우네의 일을 정읍댁이 안다면, 어엿하게 남편이 있으면서도 외간남자와 가까이하여 아이까지 배었는데, 자신은 남편도 없으면서 비구니처럼 청승떨고, 독수공방 홀로 고독을 씹을 게 뭐냐며, 뭇 거친 사내들이 드나드는 정희네 목로에서 어느 남자를 잡고서라도, 꼬리를 칠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가 친구흔티 허넌 말이지먼, 속곳동냥혀서나, 아글 밴건 영감도 안게로.”
이렇게 바우네가 털어놓았는데, 정읍댁은 그녀가 아이를 배려고, 홍산장터 친구네 술밥 집을 다니면서 뭇 남자와 상관하였던 일은 이미 신물이 나도록 그녀로부터 들은 이야기이었다.
그래서 어떠한 남자와 상관하였기에 임신하였는지를 물었던 거였는데, 하여튼, 정읍댁은 그녀가 김봉규 총각과 상관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천복이 다가오자, 정읍댁은 자전거 뒤에 올라타고, 천복은 바우네에게 고개를 까딱하여보이고는 다시 자전거를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신작로 길가 산비탈로는 울긋불긋한 진달래꽃들이 연지곤지처럼 붉게 보이었고, 눈 멀리로 옹기종기 초가집 동네마다 개나리꽃 목련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숙영이네 큰 대문 앞에 다다라서야 자전거를 세우고, 정읍댁이 내리어서고, 언덕길로 접어들어 구레나룻이 있는 과수원집을 향하였다.
‘똑똑, 또르록. 똑똑, 또르록..’
그때 문득 목탁소리가 들리어오자, 천복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큰 대문 쪽으로 시선을 보내었다.
뽀얀 잿빛가사를 걸친 중 하나가 대문 앞에 선 채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는 거였다. 비록 까까머리에다 가사를 걸친 뒷태이었으나, 웬일인지 낯설게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시선을 바로하고, 과수원집을 향하여 고개를 넘어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토방에는 신발이 보이지 않는 거였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 그가 설마하니, 방에 들어앉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자 그는 마당 한가운데에 멈추어선 채로 두리번거리어보았다. 그때 헛간 뒤로 텃밭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어오는 거였다. 그는 소리를 따라 헛간모퉁이를 돌아가 보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뜨악한 생각이 드는 거였다. 혹시나 못 볼꼴을 볼지 모른다는 경계심이 그를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노파심일지언정, 그만큼 청각을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게 하는 거였다.
첫댓글 정읍댁과 천복의 나들이에 고갯마루에서 바우네와의 조우하는 장면이 진풍경입니다.
바우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정읍댁은 바우네의 부른배로 밀어서 대충 넘어가고
바우네는 천연덕스럽게 속곳동냥 운운하고...
스님이 대충 누구일까 짐작은 갑니다만
헛간모퉁이 일은 짐작이 안갑니다 ㅎ
천복은 오늘따라 과수원집을 긴장감을 갖고 갑니다.
육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열흘이 십년 같은데
두어 달이나 건너뛰고 왔으니 천복에게는 과수원집이
생경한 거지요. 그래서 모두가 의문을 갖게 된 거지요.
구레나룻도 고정배기인데 헛간 뒤에서 못된짓할 사람이 아니지요.
그런데 천복은 얼른 정읍댁을 인계하고 알듯한 스님을 마주쳐야는데
그게 더욱 긴장으로 변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