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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모악산으로!
산행을 다녀와 여러 소소한 잡일들에 밀려 산행기가 늦어지다 보면
기억이 퇴색되고 감흥이 떨어져버릴까 봐서
일어나서 술기운으로 얼룩진 몸뚱이를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글이란 자고로 따스한 김이 모락 피어올라야 하거든요.
한 달 만에 오솔길 가족과 함께하는 산행을 모르는 친구 놈이 전날 밤 10시에
“뭐하냐! 술이나 한 잔하게 빨리 와라”
“어딘데?”
“인천”
“안 돼, 내일 산에 가기로 선약이 되어있어.”
“야, 전화 바꿔줄게”
“......”
“오빠, 나 오늘 깨까시 씻고 왔단 말이야”
흐미! 깨까시 씻고 왔다고 하네요.
“꾸울꺽”
바야흐로 러시아 월드컵으로 지구촌이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시기.
때는 2002년,
아아 ~ 잊으랴 ~ 어찌 우리 그 날을 ~
그래서 그때,
감동이 한강 물처럼 흐르다 넘쳐 눈을 적시고 잠을 적시고,
입술을 적신 기억을 하나 끄집어냅니다.
온 국민을 분단 오십년 만에,
그토록 싫어했던 빨갱이로 만든 히딩크 신드롬.
그 붉은 스카프 하나 챙겨 가지고
붉은 앙마가 되어 거리 응원장으로 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북한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어느 집회에서 그런 복장 그런 붉은 색 스카프를 두르고 나타났다면
대번에 '빨갱이, 주사파' 운운하였을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므로 축구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열정도 사라진지 오래고
그 위대하고 목이 쇠는 뜨거운 6월의 날을 비집고
우리 오솔길 가족이 완주의 모악산으로 향합니다.
언제나 똑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달에 한 번쯤 하루만이라도 등짐을 메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새처럼 자유롭게 날았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눈앞의 모든 것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멀리 하면 멀리 할수록 문명의 질환에 걸립니다.
현대인은 문명에 지쳐있습니다 .
우리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자연의 정기를 마셔야합니다.
우리가 자연의 정기와 침묵에 안길 때
우리는 생의 싱싱한 건강성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AD 2018년 6월, 셋째 주 목요일!
얼~라↗ 빈자리가 별루 없네.
어인 일이지? 더워서? 좋은 산이라? 산악회의 활성화?
유력한 이유 찾는 못된 습성을 버리면 이런저런 다양함의 혼숙이겠지만,
평소 산행 때에는 몇 자리가 비었었는데 글쎄다....
들으니 가고자하는 이 많았으나
좌석이 부족하여 눈물로 돌아선 자가 수두룩했다니
다음 산행은 밤잠 설쳐가며 선착순으로 신청을 해야 할까 벌써 걱정입니다.
“초록빛으로 가늠한 들녁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 싶었다,”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그 땅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쭉 뻗은 길을 내달립니다.
잿빛 풍경이 차츰 초록빛으로 물들자 복잡했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펼쳐지는 곳, 김제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이 풍요로운 땅에는 가혹한 수탈이 잇따랐습니다.
그래서 김제는 동학농민운동의 투쟁지이자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그린 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군산과 김제의 경계를 가르는 만경강을 건너 완주 땅으로 방향을 틉니다.
조정래 선생의 표현은 과장이 아닙니다.
풍경이 그린 그림은 8할이 하늘입니다.
차창밖에 보이는 곳이라곤 아늑하게 펼쳐진 논
직각의 구획에 서있는 전봇대
듬성듬성 자리한 촌락이 전부입니다.
정겨운 시골풍경을 보며 산 아래 모악산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사람들의 조심스런 방문을 나무들도 조용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모악산 들어서는 시점부터 낯익은 시인의 시를 읽는 것으로 산행은 시작합니다.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저 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 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 란 시를 읽으며 발길을 들여놓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모악산은 산이 아니고
어머님의 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머뭅니다.
이렇게 쾌적하게 산행을 하여 본 적이 언제였던가?
도시라는 공간에서‘빨리빨리’라는 병에 빠져 살아온 제 자신이 생각납니다.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 뻘 속에 꽁꽁 숨어 있다가
단비를 만난 가물치처럼
그 신선함을 충전하기 위하여
힘차게 헤엄쳐 들어갑니다.
이 땅 구석구석에는 이미 드러난 이야기가 있듯이
묻혀서 사람의 관심 밖으로 벗어난 이야기도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들끼리 서로 얼키고설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옛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을 전해주고
사람 사는 일의 바른길을 가르쳐 주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또 그런 이야기들이 옛 것이 아닌 오늘의 것이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한번 걸러져서 진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회자되는 것이니
이로써 민중에 떠도는 말들을 바로 민심이라고 하지 않는지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늠하여 더 아름답고 절실한 이야기로 만들어
우리의 가슴에 별빛처럼 박히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문인들입니다.
모악산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김양순 할머니를 기리는 김양순 선덕비가 있습니다.
김양순 할머니는 일본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겪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어 다니는 사람들이나
전쟁 중 쫓겨 다니는 사람들을 목숨을 걸고 숨겨주었답니다.
또한 일제의 수탈과 전쟁으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시주로 들어 온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였고,
가진 돈이나 재물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사람들을 살렸답니다.
할머니는 평생을 남을 돕고 남에게 공헌하는 홍익인간 정신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로 가고 있는 오늘도 여전히 덥습니다.
초입부터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 회원들의 얼굴이 초록으로 싱싱합니다.
허나 탄성과 탄복도 잠깐
수백 개의 계단과 돌길은 현대문명이 근접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오직 내 몫의 두 다리로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나무와 돌로 계단을 깔아놓은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누군가 열심히 만드는 수고를 했지만 등산에는 부담입니다.
등산은 높은 산의 맨땅을 걷는 것보다
낮은 산의 계단을 걷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계단 길을 걷을 때에는 발바닥 전체가 바닥에 닿는 것이 요령입니다.
그래야 발의 피로를 줄일 수 있습니다.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편안하듯이
원래의 등산로에서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산을 오를 때에도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 걷는데
길고 긴 인생길은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팍팍한 오름길은 길손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습니다.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 오름길을 뿌리치느라 숨이 차오릅니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산도 사람도 지칩니다.
길은 험하나 그만큼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도 허벅지가 뻐근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지금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자가 오르막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듯이 ....
산에 대한 열정이 막 움트기 시작한 십 수년 전.
막연한 동경심에 젊은 패기로 덤벼들었던 산.
철마다 모습을 바꾸는 산을 보기만 하면
예쁜 여자를 대하면 아랫도리가 꿈틀되듯 오르고픈 욕망이 끓어올랐었는데
허나 이제는 조그마한 오름 능선에서도 슬슬 단내가 납니다.
저도 오르는 산행에 발목이 뻐근합니다.
그래도 산을 오르는데 그럭저럭 이력이 붙었을 만도 한데 이 모양입니다.
가끔은 낮은 산이 더 높아 보이고
내려가는 길이 더 험난하여 질 때가 있습니다.
아마 아직도 이력서의 한 칸을 매우기에는 역부족인가 싶습니다.
그래, 그렇네요.
이제 중늙은이 소리를 들어도 새삼스럽지 않으며
바람처럼 보이지 않게 내 몸과 마음을 쓸고 간 반백년의 세월이
그냥 갈 리가 없다는 것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작금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만 내 가슴을 태우고 있는 격함은 도대체 어찌 할 요량인지?
얼마나 많은 날들이 지나야 온유한 눈길로 삶을 관조하며 초탈해질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수평선으로 침몰하는 까치놀을 닮을 수 있을까요?
바쁘게만 살았던 나 자신과의 만남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이는 산을 오르며 내가 나 자신에게 쓰는 러브레터 같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고단함이 머지않아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몸이 힘겨울수록 주위의 풍경은 더 극치를 이룹니다.
술을‘곡차’로 불러 유명한 진묵스님이
20여 년간 머물러 유명하다는 대원사에 이르렀습니다.
대원사는 천년하고도 수백 년이 지난 고찰인데
우리나라 고찰 중 자동차로 들어갈 수 없는 몇 곳 중 하나입니다.
절집이 크지 않아 더욱 제 마음에 듭니다.
다시 길을 이어가기를 시작하자 말자 가파른 산길이 시작됩니다.
사실 오르막만 계속되는 바쁜 길이 마냥 즐겁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재밌다, 재밌다 하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올라선 길이고 그래야 즐거운 풍경이 눈에 찹니다.
준비 안 된 몸이 힘겹긴 하지만 힘들다 느낄 때쯤이면
완만한 길이 맞이합니다.
오르막이 계속되는 산길에서 만나는 평탄한 길은
고향 친구처럼 반갑습니다.
그래도 우리 일행들은 다가서는 한 계단의 설렘과
떠나보내는 한 계단의 아쉬움을 한 발 한 발에 담아 오릅니다.
그리 높지 않고 길지 않는 산일지라도
산을 아무리 잘 타는 사람도 정신력이 없으면 완주는 어렵습니다.
산이 내게 가르쳐준 데로 합니다.
내딛는 한걸음에 인내를 다지고 또 한걸음에 겸손을 새깁니다.
두터운 산행 길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수다를 피우는 여인네들
우리네 시골 아낙들처럼 이들의 웃음이 소박하고 정겹습니다.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산길에서 수다는 고단한 걸음을 위로합니다.
오르내리는 길에 조금 미끄러지고 자지러진들 무슨 대수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이 즐겁고 행복한데요....
낯선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환하게 웃는 산객들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인의 눈으로 그들에게 잣대를 대고 맙니다.
더 많이 가진다고, 더 편해진다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 무엇이 이처럼 맑고 푸를 수 있을까요?
이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산에 오르는 그들의 웃음 속에서 배우게 됩니다.
산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인
지친 산객에게 건네는 다왔다는 말은 그저 짓궂은 장난만은 아닙니다.
산을 올라가는 사람에게 내려오는 사람의 조언은 언제나 옳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칭찬이자 앞으로 걸어갈 길을 위한 응원입니다.
세상 앞에 겸손하다가 때론 당당하다가
그러다 문득 오만했다는 부끄러움에 고개 떨군 날
카라반은 길을 잃지 않으려 새끼 낙타를 묻고 가고
어미 낙타는 그 자리를 잊지 않고 찾아간다는 은유처럼
간절함은 기본을 잃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는 듯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다시 우리의 처음입니다.
내면의 정원을 오래 가꾼 사람들은 인생이 한 마당 정원임을 압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한 꽃나무처럼 가꾸고
자기에 삶의 환경도 소중하게 가꾸어 갑니다.
스스로 정원이 되고자 하는 삶.
그것은 많은 사람과 자신을 나누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홀로 누리는 대정원의 쓸쓸함과 외로움보다는
소박한 마음의 정원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쉬어가는 풍경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정원을 가꾸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감성뿐이고
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점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그 사랑과 감성으로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가는 산행객들이 부럽습니다.
이 글을 읽는 그대 마음의 정원에는 지금 무엇이 자라고 있습니까?
소나무 틈으로 햇살은 새어나고
바쁜 일상의 틈사이로 달려온 산행이 즐겁기만 합니다.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아온 삶
늘 저만치 내빼는 것을 뒤쫓기만 했지만
산에서는 걸음도 마음도 여유를 찾습니다.
한 발, 한 발 옮기다보니 어느새 산의 중턱에 올라와 있고
드디어 만난 정상이 고된 길을 달려온 일행을 맞습니다.
돌아보면 아득한 길에서 우리는 정상에 올랐습니다.
젊은 청춘의 이빨처럼 콱 박혀있는 정상석 앞에 우뚝 서니
초록 풍경 가득 담아내는 일행 여인네들이 분주합니다.
또 다른 풍경에 가려 언젠가 빛바래질 마음속의 풍경을 아쉬워하며
스마트 폰에 한 컷, 한 컷 담고 있습니다.
정상에서 맛보는 이 짧은 순간의 황홀감!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는 이 쾌감!
당장에 숨 가쁨만 생각하면 더없이 고된 시간이나
허나 정상에서 크게 들이마신 바람의 시원함을 아는 이들에게는
산을 오른 모든 시간이 각별합니다.
이는 마음으로 품고 싶었던 여자와의 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인네들은 어떤 생각일까요?
정상에는 방송통신시설과 군 통신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필요에 의하여 들어서 있는 축조물이겠지만
꼭 정상이어야 하느냐에 대하여는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저 앞으로 내다보이는 구이저수지의 위용이 대단합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굴곡진 저 산봉우리들 같은 세월을 지나왔지만
회원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은 꿈 많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합니다.
나무가 있으면 비켜가고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면 그뿐입니다.
박인환의 시처럼 어느 구석에라도 결국 옛날은 남을 것입니다.
나보다 앞선 누군가가 이미 올랐으니 자만할 일이 없고
나보다 힘겨운 누군가가 뒤를 따르니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힘겨운 레이스가 필요하면 내 앞선 사람을 쳐다보고
힘든 고통으로 휴식이 필요하거든 내 뒷사람을 쳐다보면 되지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인 지하 만인지상에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랴?
마음 편히 자기가 하고픈 것을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생을 부질없는 일에 낭비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먹는 재미야 여행의 피로를 풀어 주는 활력소가 아닌가 ....
역시 산행은 혀에 감기는 막걸리와 만날 때 제대로의 맛이 나는가 봅니다.
소주, 막걸리까지 주님과 아주 가까운 푸른오솔길 산악회는
자신에 앞서 서로에게 권하느라 바쁜 아름다운 모임이 틀림없습니다.
땀 흘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순간의 달콤함이란
언어도단의 경지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절대적 행복은 상대적 행복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일행 여인네들의 미색에 취하고 한 폭의 절경에 취하니
어찌 우리의 산하가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산하만큼은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로 마루금으로 펼쳐져 있는 산과
그리고 그 어귀마다 자리하고 있는 마을과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실핏줄 같은 길이
농부의 굽은 허리처럼 정답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 조망됩니다.
지금 이 순간엔 결코 중국의 황산이 부럽지 않고 장가계가 부럽지 않습니다.
정상에 닿았어도 길이 끝나지 않으면 산행은 계속됩니다.
내려가는 길의 즐거움은 오르는 길의 그것보다 결코 작지 않습니다.
간단한 오찬 후 다시 남아 있는 풍경을 만나러 길을 나섭니다.
모악산을 품에 안고 일행들은 세상으로 향합니다.
내려갈 때는 올라올 때만큼의 패기는 사라졌지만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고 길을 나서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합니다.
떠나온 정상은 조금씩 멀어지고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은 점점 가까워집니다.
아득한 옛날 두 발로 시작했듯이
우리는 끝없이 걸으며 마음의 무게를 덜어냅니다.
삶의 세파에 격렬하게 부딪치지 않고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비타민처럼 값진 재산.
저는 30살 즈음부터 3년간 고창 선운사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님들 덕분에 차의 오묘한 맛도 알게 되어
어디 여행을 가더라도 그 고장에서 이름난 찻집을 찾아다니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도심에서 나 역시 분주한 세상사에 묻혀 살다보니
어느새 혀끝이 달달한 믹스커피에 중독되어
차 맛과 다향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당시 경험한 바로는
차는 세 번을 우려야 그 진정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 우린 차는 맛이 너무 세서 혀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게다가 특유의 풋내도 거슬렸습니다.
그러나 다기를 준비할 때의 설렘, 찻잔의 온기, 찻잔에 담긴 오묘한 녹색,
함께하는 이와 나누는 대화와 눈길만큼은 첫잔의 그것이 가장 상큼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린 차 맛은 훨씬 부드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떫은 탄닌 성분은
마음과 차가 오롯하게 하나 되는 것에 다소 방해가 되었고요.
세 번째 우린 차 맛은
차를 마셔본 경험이 적은 사람에겐 거의 맹물 수준으로 맛도, 향도 매우 약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혀 위로 조금씩 흘려보낼 때부터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온몸을 깨우며 퍼져나가는 그 기운 만큼은 어느 때보다 더 강렬했습니다.
당시 차를 마시면서 얻은 교훈은
세상사 뭘 하든 차를 우릴 때와 마찬가지로
삼세판은 해야 제대로 알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혹은 두 번 해보고 안 된다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쉽사리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산행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첫 행보에는 설렘은 있어도 앞서가는 사람의 꽁무니를 쫓다보면
뭐가 뭔지 모른 채 끝나기 일쑤고,
설혹 홀로 걷는다 하더라도 잔뜩 긴장하다 보면
주위를 둘러보거나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두 번째 행보부터는 조금 친해진 사람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어디 가면 멋진 쉼터가 있는지, 또 어딜 가면 걷기 좋은 길이 있는지,
어디 가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를 대충 알기 때문에
훨씬 편안하게 산행에 임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부터는 별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편안하게 걸으면서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되는
그야 말로 몰아일체의 깊은 경지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혀끝에 맴도는 세 번째 우린 오묘한 차 맛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최소한 세 번은 만나야 친근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낯가림이 심해 생판 모르는 이들과 함께하는 산행이 별로 달갑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산악회를 멀리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새내기 회원으로 함께하게 된 푸른오솔길에서 첫 산행지인 부안 변산 산행에서는
막 우린 차처럼 입에 착 달라붙지 않아 나 역시 따로국밥처럼 놀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푸른오솔길 가족들의 환대와 배려에서 가식 없는 정감이 느껴졌고
게다가 산행모임치고는 꽤 알차게 산행을 진행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산행에도 흔쾌히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산행지가 내게 칠갑산이라는 점이 더 큰 유혹(?)이었지만
두 번째 만남부터는 훨씬 더 친근하고 편안했습니다.
어느덧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세 번째인 축령, 서리산행부터는
세 번째 우린 차 맛 같은 은은함이 혀끝에 맴돌았고요,
산은 우정을 가르칩니다.
산처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산에 가면 미움이 없어집니다.
모두가 소박하고 진실한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미움의 감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산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요?
때가 되면 모래알이든 바위든 모두 다 가라앉습니다.
모악산에 마음을 두고 내려왔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시 산에 오른다면
그때 두고 온 마음에게 안부를 물을 것입니다.
행복한 산행을 되뇌이며 ......
등산화를 벗고 물속에 발을 담갔습니다.
혹 초록 물이 들까 싶어서....
오늘 하루 수고한 나의 두 발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애들아, 다음엔 어디를 걸어볼까?
지난 발자국
- 장 현 종 -
지난 하루를 뒤집어
내 발자국을 따라 가노라면
사고(思考)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
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다.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오후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것들이 정말 고마웠던 하루였습니다.
지금보다 나은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지위에 접지할 때 내 발에 느껴졌던 생의 운동성으로
또 길 위에서 걸어가야지요.
길은 걸음으로서 길이 되는 것이라고 하지요.
누군가에겐 탐욕의 길이고
누군가에겐 권력을 향한 욕망의 길이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상처준 이들에게 사죄하지 않고
그저 뻔뻔스럽게 걸어가고 싶은 길일 것입니다.
힘을 내겠습니다. 그렇게
자꾸 지치고 포기하려는 저를 잡아 이끌어주길 바라고 또 바래봅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무엇을 털어내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
삶의 무게는 나이만큼 더 무거워졌고
매 순간 서툴고 불안하고 버겁기까지 합니다.
삶이란 머문 자리마다 그리움을 남기고
다시 떠도는 여행이 아닐런지요?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지나간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라고....
잃은 것보단 얻은 것이 많아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쉼의 시간을 준 자연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아침에까지 술이 깨질 않아
오늘 하루 출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초안을 잡아놓았으나
표현을 다듬고 글의 순서를 바꾸고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바로 잡는 이‘데스킹’작업은 정말 힘이 드는 일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이 일을 하다보면 오른쪽 뒷골이 아픈 편두통까지 옵니다.
이제 다음 산행에 뵙기를 청하며 산행 이야기를 멈추겠습니다.
2018. 6. 22.
ㅇ ㅖ 소 담
‘모반 (謀叛 )’이나 ‘배역 (背逆 )’과 같은 말은 입에 담기조차도 거북스럽지만 ,
저 깊은 마음 한켠에서는 알듯 말듯 어떤 야릇함 같은 것이 샘솟는 그런
흥미진진한 단어가 아니겠는가싶다 .
헌데 어쩌면 그런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단어들의 중심체라고 할 수 있는
전북은 그에 걸 맞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다고 한다 .
정여립이 대동계를 만든 곳도 이곳 모악산이며 , 동학혁명 때 동학교도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세를 폈음에 말이다 .
또한 모악산 아래에는 불교 , 천주교 , 개신교 , 증산교 등 종교성지가 그대로
남아있단다 .
모악산은 불교를 대표하는 금산사와 귀신사 , 개신교의 금산교회 , 천주교의
수류성당 , 증산교의 동곡약방과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시원지이자 문화
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
한 때는 이곳에 수많은 종교집단들이 자리 잡고 교세를 펴 충남 계룡산과
함께 한국 2 대 명산으로 꼽혔단다 .
게다가 북한 김일성의 본관이 전주이고 그 전주김씨 시조묘가 바로 이곳
모악산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
(일설엔 전주김씨 시조묘가 워낙 명당인 탓에 3 대에 걸쳐 발복 (?) 한다는
설이 있다는데 아마도 그건 작금의 상황에다 맞춘 게 아닌가싶기도 하고 ..)
어쨌거나 모반 (謀叛 )’이니 ‘배역 (背逆 )’이니 하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논리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
그러함에 풍수학자 최창조교수의 “땅의 눈물 , 땅의 희망 ”이란 저서의 목차
중에서 “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 ”이란 부분을 되새겨볼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싶다 .
[ 호남에 대한 편견의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를 꼽는다 . 이것은 태조 26 년 (943 년 ) 충신인 박술희에게 내려준 비밀 유훈
이었다고 한다 .
-- 중 략 --
훈요십조에서 호남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제 8 훈으로 , 그 내용
은 차령과 금강 이남은 지리적 형세가 배역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의 인성 또한 그러할 것인즉 그들을 조정에 참여케 하거나 왕
실과 혼인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
-- 중 략 --
뿐만 아니다 .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우리나라 3 대 배역의 강으로 영산강 ,
섬진강과 함께 낙동강을 꼽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왕건은 그
의 출신 기반인 중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 중 략 --
특히 동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곳
에서 도를 얻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 중 략 --
어찌 되었거나 이미 고려 초 훈요십조에 의하여 반역의 땅으로 규정지어진
전라도는 이 사건 (정여립 )으로 또 다시 그 오명을 다지게 되는 셈인데 ,
과연 반역의 땅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
결론적으로 그럴 수 없다 . 그런데 반역이란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
왕조의 무능과 부패 , 파렴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
그것을 정도에 어긋난다는 뜻인 반역이라 쓴 것은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하는 민중의 처지에서 보자면 당치도
않은 논리가 된다 .
땅이 순하면 그 사람이 순하고 산천이 돌아앉듯 거역의 자세를 취하면 그
주민도 그를 닮는다는 것이 풍수의 주장이다 . 일신의 평안만을 원한다면
순한 땅이 명당이 된다 . 그러나 우리 모두를 생각한다면 , 다시 말해서 공동
체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역사적으로 풍수상 반역의 땅이란 이름을 가졌던 곳은 바로 그런 점에서
재평가되어야한다 . 거듭 말하지만 반역의 기운을 가진 땅이란 게 있을 수
있으나 반역이란 말이 가진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반역의 땅이란 게 결코 나쁜 땅이 아니다 .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맞지 않는
땅일 뿐이다 .
전라도는 넓은 들판의 땅이다 . 서해의 바다에서 시작한 저평 (低平 )은 김제
만경평야를 거쳐 갑자기 우뚝 솟은 평지돌출의 모악산을 만난다 . 들판은 지
배층을 상징한다 . 평지돌출의 모악산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 민중은
저항의 선봉인 모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들판 가운데 서지도 못하
고 모악산과 들판이 만나는 점이지대에 의지하게 된다 . 이것이 우리나라 마
을 입지의 풍수적 골간을 이루는 배산임수 (背山臨水 )라는 것이다 . 보수로
대변되는 들판에 대하여 돌출되게 저항하는 산 , 그 사이에 끼어 부대끼는
민중이란 뜻이다 .
그들에게는 정당한 저항이지만 반대로 보수적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 . 세상의 변화를 사람들이 그런 평지돌출의 성격을
가진 산의 품에 안겨 혁명과 개혁을 꿈꾸는 것은 마침내 산과 사람이 상생
의 궁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줌이다 . 간혹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더 나아가
그런 산에 깊이 파묻혀 신선을 꿈꾸기도 한다 .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
른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
전라도는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천혜의 땅이었다 . 그 풍성한 생산성이 타 지
방에 위협감을 주게 되었으며 결국 전라도를 외경의 땅 , 반역의 땅 , 편견을
가지고 보는 땅으로 만들어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
고려 태조 왕건이 전투에서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연전연패한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
오죽했으면 자손에게까지 전라도에 대한 경계를 당부했겠는가 .
천혜를 받았으므로 편견을 당해야 하는 땅 ,
전라도의 모순이다 .
한데 기묘한 것은 지지난해 황해도 구월산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다 .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모악산 , 또 하나의 계룡산을 보았다는 착각을 했었다 .
북한 최대의 평야지대인 재령과 안악 , 신청 벌방 (들판의 북한 말 )을 감싸 안 듯 둘러싼
구월산은 이 역시 평지돌출의 곳으로 그 성격은 모악을 닮았다 .
판소리 ‘변강쇠타령 ’에서 변강쇠가 어디로 가서 살 것인가 고민하는 대목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 “동 금강 석산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 북 향산 (묘
향산 ) 찬 곳이라 눈 쌓여 살 수 없고 , 서 구월 좋다하나 적굴 (도적 소굴 )이
라 살 수 있나 . 남 지리 토후 (土厚 )하여 생리 (生利 ) 좋다하니 그리로 살러
가세 ”
모반과 민족 신앙으로의 요람 같은 모악산과 도적의 소굴로 표현되는 구월
산 , 뭔가 땅의 이치가 통하는 대목은 아닐까 ?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이상스
럽게 정여립의 모반을 처음 고변한 사람들이 당시 황해도 관찰사와 재령군
수와 안악군수와 신천군수 등이라는 사실이다 .
구월산 자락의 수령 방백들이 떼를 지어 모악산의 정여립을 고변한 땅의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 -- 이하 생략 -- ]
..
뭐랄까 , 참으로 아담한 사찰이 아닌가싶다 .
크기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나름 잘 짜여진 어떤 틀처럼 말이다 .
대원사를 둘러보며 나가려 하는 그때 마지막 건물인 명부전 (冥府殿 )이 내
발목을 잡는다 .
‘소신공양 (燒身供養 ) 문수스님 추모소 ’..
헌데 뭔가가 이상함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
4 대강사업을 반대하며 소신공양을 한 문수스님은 경상도에 있는 절의 스님
이었던 것 같은데 어찌 이곳 대원사에 추모소가 마련되었는가 함에 말이다 .
좌우단간 뭔가 모를 착잡함이 밀려온다 .
4 대강사업이 대체 뭐길래 산 목숨까지 불살라가며 중단하란 유지를 남기고
그렇게 이 세상과 하직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
4대강 사업이고 뭐고, 하면 어떻고 또 안 하면 어떤가?
이 세상 모든 게 다 내 맘 같지 않은데 그렇게 목숨까지 걸어야만 되는가?
그저 조금씩만 양보하며 ,
그저 조금씩만 챙겨주며 ,
그저 조금씩만 헤아리며 살아가면 될 것을 말이다 .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
마음도 축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
12:13, 쉼터 .. (~12:17)
그렇게 무거워진 발걸음과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려 쉼터 의자에 앉아 물도
마시며 잠시 쉬어본다 .
전망대를 오르는 계단 바로 앞에서 막걸리를 팔고 있음에 아예 못 본 척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버린다 .
‘가지 않는 길 ..’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오는 그 유명한 ..
“따지고 지지고 할 것 없다 ”라는 맘으로 배낭을 둘러메곤 이정표에서 가리
키는 금산사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
언제부턴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금처럼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볼 것
없이 무조건 내가 가장 먼저 접한 거 , 그걸 선택하고 그리고 그 다음 기회
가 온다면 그때 다음 걸 택하리라 맘을 먹었음에 말이다 .
그렇게 가다보니 앞에 두 손을 마주잡고 걸어가는 부부가 눈에 들어온다 .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그 부부 모습이랑 지금 내 앞의 부부 모습이 꽤나
많이 닮은 것 같아 보임에 더더욱 부럽기만 하다 .
(ㅋㅋ ..
산행하면서 부부인지 아님 다소 부적절한 (?) 관계인지 구별하는 방법들을
아시는지 ??
부부는 보통 남편만 배낭을 메고 아내는 물통정도나 넣을 수 있는 허리에
매는 쌕 (Sack)이나 아님 빈 몸에다가 등산복장의 브랜드도 둘이 거의 비슷
한 게 보통이지만 ,
부적절한 (?) 관계는 무조건 둘 다 배낭을 메고 , 완전 고가의 등산복장에다
그 브랜드가 서로 다르며 , 여자의 경우 화장에 많은 신경을 쓰고 , 먹을 걸
엄청 신경 써서 싸오려니 배낭이 빵빵 (?)하답니다 .
헌데 이게 100% 다 맞는 건 아니라는 거 아시죠 ??.. ㅋㅋ )
귀경 시작 10 분도 되질 않는 시간에 아직은 저만치 위에 떠있는 둥근 해
가 내비치는 햇볕이 다소곳이 찰랑이는 저수지에 낙조처럼 어우러진다 .
어머니 품과도 같은 그 아늑함 ..
아마도 이곳 모악산 (母岳山 )에서의 느낌이 그러함에 시인 ‘고은 ’은 ‘산 ’이
아니라 ‘어머니 ’라 표현하지 않았나싶다 .
세계적인 명상의 메카, 모악산에 4일부터 10일까지 미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명상 여행단 150여 명이 방문했다.
이들 외국인 명상여행단은 개천절을 맞아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을 배우고 'K-힐링'으로 대표되는 한국 고유의 명상 등을 체험하기 위해서 찾았다고 한다.
이들은 현지 단센터와 뇌교육협회 등에서 단학과 뇌교육을 체험하거나 국학기공 강사로 무료로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선도(仙道) 명상 체험과 교육, 여행을 겸하는 명상여행을 통해 홍익정신을 배우고 체험해 이를 다시 각국에 알리고 있다.
전라북도 선도문화연구원 관계자는 “올해 외국인 명상여행단이 모악산을 찾은 것도 10년이 됐다”며 “해를 거듭할수록 외국인들이 모악산을 찾는 이유는 이곳이 맑고 강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며 코리안스피릿(Korean Spirit, 홍익정신)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천일암은 맑고 강한 기운이 서려 있는 볼텍스(vortex)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용어로는 명당이라고 볼 수 있다. 명상하는 사람들은 모악산의 강한 에너지 속에서 내면으로 쉽게 몰입해 평화의 상태에 도달한다. 이것이 모악산이 세계적인 명상의 메카로 알려진 이유”라고 덧붙였다.
김제의 벽골제 저수지 근처 장화리에는
조선시대 만석꾼으로 알려진 정구례의 유별난 뒤주가 있습니다.
장화리 쌀뒤주는 초가지붕을 얹을만큼 커다랗습니다.
정준섭은 고종이 왕의 자리에 있ㄴ을 때 구례군수를 역임했다고 하여
정구례로 알려진 이로
이곳에 쌀을 가득 채워넣고 배곫는 이웃을 대접했습니다.
이 뒤주에는 쌀을 70가마나 넣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매일 수백 명의 손님을 맞이했기에 1달이면 동이 났다고 합니다.
정구례 고택 바로 건너편에는 열녀비가 하나 서 있습니다.
남편이 병에 걸리자 둔부의 살을 내주었다고 하는 부인을 기리는 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출신 가수 현숙이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7년이나 수발해 효녀로 소문이 났습니다.
애주가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잔만 마셔도 기력이 회복된다는 이른바 <천하 3대 명주>.
백살이 넘는 소나무 고목을 뿌리째 넣어 담그는 송화대력주,
불로초를 넣어 마시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주에 이어
사계절 피어나는 백가지 꽃으로 담그는 백화주가 그것입니다.
흡사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세 가지 술 중 백화주만큼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백화주가 가전되는 김제 학성강당에서 말입니다.
학성강당의 백화주는 정확히 말하면 백초화춘(百草花春)입니다.
백가지 약초로 담근 약초주에 사계절 동안 따다 모아 그늘에 말린 백가지 꽃을 넣고
다시 정성으로 빚은 술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밀주를 단속하던 시대를 지나며
가양주의 맥이 끊긴 어려운 상황에서
고집스레 전통을 이어온 것은 어떤 마음에서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비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신과 태도에 관한 터일 것입니다.
말끝에 고운 미소를 덧붙입니다.
우리 여 회원들의 매력이 점심 자리에서 꽃이 핍니다.
김제 백구면에 가면 <정휴당>이라는 한옥 민박집이 잇습니다.
앞마당에는 꽃핀 매화나무에 새가 앉아 있고
흰털이 풍성한 사모에드가 호기심 아린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크기별로 장독이 주르륵 서있는 뒷마당에는 목련이 만개했습니다.
한옥 민박집 정휴당에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이들의 취향을 저격할만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골마루에 올라 한지를 덧댄 문을 엽니다.
방안에 쓰던 물건이 그대로 있습니다.
자개장, 괘종시계, 경대 등 세월을 탄 물건들은 깨끗한 새것 같습니다.
80년을 지탱한 고택은 주인을 닮아 정갈합니다.
‘고요하게 쉬는 곳’이라는 뜻으로 정휴당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정휴당에는 복도며, 방에 표구된 글씨와 그림, 도자기들이 많습니다.
군데군데 걸린 사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흑백사진 안에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 지사들이 쭉 서있습니다.
집주인의 시조부와 만립대학 설립을 위해 애쓰던 사람들이랍니다.
대학설립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세운 사립학교가
정휴당 바로 앞에 자리한 치문초등학교입니다.
시조부의 호를 딴 이 학교는 3. 1운동 등 항일운동에 참여해
여러 번 폐교를 하기도 했다는데
집주인인 홍정자씨는 이곳에서 30여년간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옛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정말 친할머니 댁에 쉬고 있는 듯 편안해집니다.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으로 끓ㄴ여낸 찌개
이웃이 수확한 쌀로 지은다는 차진 밥과
텃밭에서 직접 기른 작물이 밥상을 가득 채웁니다.
집주인의 손맛은 여느 식당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품입니다.
입맛을 돋습니다.
“부침개 좀 더 부쳐줄/가?”
이미 듬뿍 담아낸 찬이 부족하지 않을까하고 돌아보는 그녀의 얼글에
흐믓한 미소가 만연합니다.
식사 후 마루에 걸터 앚아 쉬는데
그녀가 대추차가 담긴 잔을 내밉니다.
정휴당의 마당에는 따뜻하고 나른한 봄볕이 가득 쏟아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풍수에 관한 것이다. 모악산은 좌청룡우백호 지맥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명당은 좋은 기를 가진 땅이다. 산이 성곽처럼 사방을 감싸 그 공간 전체를 보국하는 길
지 란다. 대표적으로 모악산 장군봉의 기운이 머무르는 ‘전주김씨 시조묘’ 터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32대 조상인 고려 무신 김태서의 묘를 품고 있다.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은 대원사에서 수행하며 도를 이루었다고 하여 대원사를 증산교의 성지로 추앙받게 했다.
ㅡ모악산행기ㅡ
모악산 가는 길은 여느 명산처럼 즐느런히 늘어선 음식점을 옆에 두고 출발한다.
선녀와 나무꾼이 사랑을 속삭이다
천제의 노여움으로 석상이 됐다는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선녀폭포를 거쳐 사랑바위 옆 길로
한때 북한 김일성의 시조묘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던
전주 김씨 시조 문장공 김태서 시비가 있는 곳을 지나쳐가려니
사람들의 수군숙덕거림이 귀에 쟁쟁하다.
이 터를 써서 김일성 일가가 발복했다는 해석은 누가 했는지 모르겠으나
모악산이야 말로 후천개벽 미륵의 산실임을 보여주는 것은
단풍나무를 등지고 바위 위에 자리 잡은 대원사 절이다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이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으면 금산사 미륵전으로 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떠나기 전 49일 수도한 끝에 깨우침을 얻은 곳이다.
절간은 왜 한산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적막함에 기대어 구도자의 수도 일신양양은 보이진 않는다.
모악산에 들어 처음 마주한 대원사란 절이 가져야하는 소소함 속 성불은 없다.
몸을 바쳐 사회개혁을 이루려 자기 몸을 바쳤던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기리기 위해 지폈던 명부전 촛불이 꺼져서다.
숭고한 뜻이 빛이 바랬다.
스님이 절간에 나와 불의한 정권에다 대고 개혁하라 외쳐대는 것이 불경스런 것이라면
모악산을 중심으로 변혁을 이루려했던 정여립과 전봉준은 철저한 반역이다.
'완산칠봉 바라볼 때마다 전주성 밀고 들어가던 농군들의 함성들,
완산칠봉에는 전주화약 믿고 뿔뿔이 돌아가는 농꾼들의 여물지 못한 뒷모습,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해는 내일 또다시 떠오른다.’ 라고
신영복 선생님이 전봉준을 대신하여 말한 것은 혁명이었으나 돌아온 건 반역이다.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라고
일찌기 외쳐 죽임을 당한 정여립과 청년기를 여기서 보낸 전봉준,
39세로 요절하며 세상의 모든 병을 떠안고 가겠다는 강증산도 모악산을 뿌리로 두고 있다.
얼마 전 그 소나무 뒤로
오색 빛 영롱한 무지개가 떠서 상서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예언한
이 절 주지스님의 말씀 뒤로 수왕사가 장군대좌형 혈자리에 있어서 그것이 통했는지
이 절을 찾는 신도 중엔 검경찰에 봉직하는 사람이 많단다.
그중 이번 정부에서 아주 중대한 자리를 맡은 '이건리'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장은
이곳에서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명박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2009년
광주고등검찰청차장시절 5.18 묘역을 찾아 시대의 아픔을 나눴다는 것이다.
'거짓을 몰아내고 진실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겠다'는 그의 일성을 믿어보자.
쉴 여유를 주지않고 오르막길만 있는 모악산 중턱에 와서야
길손의 갈증에 회답하려는 듯 발걸음을 붙잡는 막걸리 맛은 천하 제일미다.
안주라야 멸치 고추 된장이지만
이 한잔으로 기운을 북돋은 사람들은 모악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철제 휀스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핀 물봉선이 어딘지 모르게 짠하다.
정상 무제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은 없고,
너머로 보이는 장군봉은 역적치발등이라 해서 함부로 묘자리를 써선 안되는 곳이었지만
모악산을 주저 앉힐듯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중계기 탑 앞에선 할말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위한 이기 앞에서 먼저 무너진 건
씁쓸하게 모악산 정상을 찍고 서둘러 내려가는 등산객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가난한 일본인들에겐 김제 만경 평야는 그야말로 노다지였으니
반강제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대거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대신
일본인들은 말 그대로 여기가 금산인 셈.
그걸 속 끓이며 말없이 지켜보던 절이 금산사였음에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용화세상 미륵불 출현을 바라는 민중의 심정을 담은 절이
그나마 이곳에 있었으니 희망을 가졌으리라.
또한 이 일대는
계룡산의 신도안(新都安), 풍기(豊基)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이라 하여 좋은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