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2005/05/19 오전 5:00 | 땡전 통신
1982년 3월18일 오후 2시 부산의 미국 문화원 건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1시간 만에 진화됐지만 그 불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 있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노란 플라스틱 물통을 하나씩 든 20대 여자 2명과 남자 1명이 들어와 수위의 제지를 물리치고, 여자들이 물통에 든 인화물질을 복도 바닥에 붓고 남자가 불을 붙인 후 함께 뛰쳐나갔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국도극장 앞과 유나백화점 앞에 “미국과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살인마 전두환 북침 준비 완료” 등의 내용이 적힌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는 제목의 유인물이 살포됐다. 전두환 정권은 즉각 고정간첩의 사주나 좌경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보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우선 경찰은 80년 12월9일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질러 수배중에 있던 정순철과 부산대 학내 시위 관계로 수배중인 이호철 등 시국사건 수배자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면서 현상금 2천만원을 내걸었다. 수사는 3월27일 사건 당일 용의자들을 목격했다는 음식점 여주인의 신고로 급물살을 탔다. 3월30일 고신대생 이미옥 등이 잡히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이 사건의 주범으로 고신대생 문부식과 김은숙이 공개 수배됐다. 4월1일 신부 함세웅의 주선으로 문부식·김은숙이 원주에서 자수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 종결되는 듯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그것도 여학생들까지 가세해 미국을 상대로 방화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민주화운동권 내부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80년 5월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운동권 내부에서는 미국이 과연 이 나라 민주주의의 지원자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를 동원한 광주민주항쟁의 진압은 불가능했다. 운동권에서는 전두환 일파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미국이 최소한 묵인은 했으리라고 판단했다. 거기에다 80년 8월8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운동권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응징과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해 12월9일 가톨릭농민회원 정순철이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 사건이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비디오실 내부 20평 정도만 불타는 등 피해가 적었고, 또 전두환 정권이 미국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을 꺼려해 보도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82년 4월2일 문부식의 배후로 광주항쟁 수배자 김현장이 검거되고, 3일후 김현장을 은닉한 혐의로 천주교 원주교구 신부 최기식이 연행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현장은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인 80년 5월말 원주로 최기식을 찾아와 그의 보호 아래 원주교구청 안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문부식을 만난 것은 81년 가을 무렵으로 부산의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원이었던 허진수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때 그는 문부식에게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알려주며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를 거론했다. 그리고 함께 부산 미문화원을 찾아가 그 주변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부식에 의하면 김현장은 3월18일 방화사건의 구체적인 계획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부식이 사건이 발생한 후 원주교구를 찾아간 것은 81년 12월 원주교구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 참석하여 그곳에서 김현장을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부식은 김현장이 그곳에 은신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그곳에 가면 김현장의 소식도 들을 수 있겠고, 또 최기식 신부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김현장을 만났고 경찰의 가혹한 심문에 방화사건 전 부산을 함께 찾았던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천주교를 손볼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천주교가 종교를 앞세워 좌경분자를 숨겨주고 불순활동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어용 언론들은 교회도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라며 연일 공세에 가담했다. 사태는 이제 천주교와 정권의 전면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천주교측은 처음에는 당시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교회와 사제는 교회법에 따라 범죄 혐의자라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언제나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주로 방어에 치중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 사실이 알려지고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 보도가 계속되면서 각 교구 사제단들의 성명 수위도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4월15일 발표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교회사회선교협의회 성명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용인,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과 주한 미대사 워커 등의 한국민 비하 발언, 한·미간 불평등관계 등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경으로 들면서 당시 운동권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일련의 반미운동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게 된 궁극적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한번 정식으로 까발려 보자고 나선 것이다. 최기식 신부 구속으로 야기된 천주교와 정권과의 공방전은 이내 일단락된다. 전두환 정권이 아킬레스건인 광주문제를 자꾸 거론해야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공세를 늦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방전 속에서 천주교는 광주사태 이후의 긴 침묵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맞게 됐다. 부문운동간 연대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광주민주항쟁이 비극으로 끝난 뒤 2년이 채 안돼 민주화운동권이 전두환 정권의 총칼에 대한 공포, 80년 서울의 봄의 좌절에 대한 패배의식, 광주 영령들에 대한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82년 8월11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 16명에 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김현장·문부식은 사형, 김은숙·이미옥은 무기징역, 기타 관련자들은 징역 3년에서 15년까지를 선고받았다. 최기식에게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그렇지만 이후 반미운동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운동권에서는 지속적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과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문제삼았다. 지역의 미문화원은 운동의 주요 타격 대상이었다.
83년 9월22일에는 대구 미문화원 정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1명이 죽고 4명이 다쳤다(이 사건은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 있으나 운동권 내부의 행위는 아닌 듯하다). 85년 5월23일에는 대학생 73명이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문제를 제기하며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해 농성에 들어갔고, 86년 4월28일에는 서울대생 이재호·김세진이 “반전반핵 양키 고홈”을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겪고 난 후 반미는 운동권의 주요한 사상적 흐름이 됐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권의 변화를 대중 앞에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출처 = 경향신문
|
=============================================
운동권 출신의 블로그 라서 미화된 내용이 있습니다.양해해주세요! |
첫댓글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들어왔습니다. 경향신문에서 다룬 미문화원 방화사건인지라 본질이 호도된것 같아서요. 역사학도님이 바라보시는 안목은 어떻하신지 알고 싶군요.
저는 김대중의 거짓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여태껏 국민을 속여온 김대중의 거짓에 전쟁 선포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글도 중요한 자료이네요. 앞으로 광주사태 바로보기에 대한 글 자료는 http://bookstore21.net/discussion/518.htm 에 모아두려고요.
언젠가 역사학도님의 옳바른 사관이 인정받게 될 날이 있을겁니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대중은 그야말로 세계를 속인 세기적인 사깃꾼이라고 할수 있겟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잔인하다 하시겠지만 옛날 같으면 육시랄 종자 입니다.
떼돈을 벌은 모든친인척까지 추적해서 옥에 가두고 모든돈과 재산을 국고에 다시 집어넣어야 합니다. 역사학도님 광주사태는 연구하실만큼 하셨으니 김대중의 선동으로 생긴 모든 어지러운 역사를잘 연구하셔서 옳바른 역사로 남게 하였으면 합니다. 항상 감사하고 마음으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답니다. 건필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