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와 항우본기
흔히 중국 오페라라고 불리는 대표적 전통 연극인 경극 중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은 초한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초왕(楚王) 항우(項羽)와 그의 여인 우희가 마지막 이별을 하는 ‘패왕별희(覇王別姬)’다.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하여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는 요소 외에 항우와 우희가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대표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항우는 명문가 후손으로 태어나 탁월한 힘과 지략, 높은 뜻과 호방한 기질 등 영웅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한 몸에 갖춘 완벽한 인간이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많은 호걸이 나타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영웅의 표본에는 단연 초패왕 항우를 꼽는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많은 동양 고전에서 흠모와 때로는 비판 대상이 되곤 한다. 한편 절세미인이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한 남자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우희는 고결함과 정절의 상징이다.
패왕별희가 인간으로서 항우의 매력과 애절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항우본기는 역사적 사실과 통찰력에 기반하여 항우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진시황이 BC 210년 사망한 후 진승과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많은 군웅들이 봉기하자 항우도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옛 초나라 지역에서 세력을 결집한다. 항량이 죽자 유방과 합세하여 함양을 함락하고 진나라를 멸한 뒤 팽성(彭城)에 도읍하여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한다.
그러나 한왕(漢王)으로 봉해진 데 불만을 품은 유방이 반기를 들어 관중(關中)을 평정하고 항우에게 도전하게 된다. 이후 장기판에서 아직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치열한 초ㆍ한 공방이 5년간 벌어진다. 초반에는 군사력에서 앞선 항우가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나 유방 측 간계와 게릴라전에 말려들어 단 한 번 결정적인 해하(垓下)전투에서 사면초가를 당해 패하고 자결함으로써 천하를 유방에게 양보한다.
실패한 영웅 항우의 최후에서 패왕별희의 서사적 감상과 인간적 비장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지만 사마천이 냉정하게 묘사한 항우의 결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리더십 교훈을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직선적이고 열정적인 항우 성격이다. 꾸밈없고 솔직한 것이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비범한 인간이 여과 없이 뿜어내는 능력과 에너지는 보통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열등감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리더가 지나치게 똑똑하고 부지런하면 주변에 훌륭한 사람이 모이거나 크기 어려운 법이다. 뛰어난 지략가 범증의 말을 넘치는 자신감으로 무시해 결국 그를 떠나보낸 것이나, 훗날 유방에게 붙어서 항우를 곤경에 빠뜨리는 한신의 능력을 한 줌 거리로 과소평가한 항우의 실수는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마는 우유부단함이다. 숙적 유방을 제거해 위기의 싹을 자를 수 있었던 홍문(鴻門) 잔치의 숨막히는 장면은 수세에 몰린 유방의 전전긍긍한 계략과 우위에 있으면서도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항우가 대조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가장 잘못된 결정은 내리지 못한 결정이다. 요즈음에도 한때 잘나가던 기업들이 안일에 빠져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분석만 거듭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필름 카메라 시절 절대 강자면서 디지털카메라에 관한 가장 많은 원천기술 특허를 보유하고도 불과 10년 만에 존재마저 희미해진 코닥(Kodak)은 대표적인 사례다. 리더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리더는 차라리 결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조직 전체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투지와 인내심 결여다. 한나라 추격 군에 쫓겨 오강(烏江)에 이른 초왕에게 오강의 정장은 “강동(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이 사방 천리요, 백성이 수십만에 이르니 족히 왕이 되실 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얼른 건너십시오.”라고 권한다. 이에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피한들 무엇 하나? 내가 강동 젊은이 8,000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 부모를 대하겠는가?”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장하고 고결한 영웅의 모습이라고 후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장면이지만 조직을 책임진 리더 모습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위험에 처하자 아들 말을 대신 타고 도망쳐 후일을 도모한 비정한 조조 모습이 리더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을까.
조직원은 어려움에 직면하면 리더를 바라보게 된다. 지도자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비현실적인 감상에 빠져 있다면 조직은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함과 개인적 치욕을 감수하면서 조직을 위해 몸을 사리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인 것이다.
첫댓글 어려울 때 앞으로 나서야지 ..
松이에게 어울리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