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죽더라도 처음 세웠던 뜻과 정신은 잃지 말아야지.'
나날이 어려워지는 가운데서도 장준하는 밤늦도록 홀로 남아 일했다.
죽어가는 <사상계>를 끝까지 살려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시련을 혼자서 이겨 내기란 몹시 힘에 부쳤다.
1966년 어느 날, 장준하는 <사상계>사무실로 찾아 온 후배 백기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20대에 총을 들고 왜놈을 몰아 내려다가 처음 실패했소. 그 때부터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구려. <사상계>는 죽었소. 나는 이제 더 이상 펜을 잡은 언론인이 아니오. 독재자가 총칼로 언론을 짓밟아 버렸는데 언론인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지금부터 나는 직접 국민들을 상대로 호소하며 독재의 무리와 맞서 싸우겠소."
"그럼 선생님께서 정치를..."
"그렇소."
1966년 10월 15일 오후, 경상북도 대구 수성천 모래밭에서는 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다.
연사로 나선 이는 장준하였다.
"총칼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박정희는 내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위해서 돈을 마련하려고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값싼 사카린을 몰래 들여와 국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더러운 돈을 챙겼습니다. 그런 일에 앞장 선 박정희는 밀수왕초입니다."
그 날 장준하가 한 연설이 신문과 방송에 나가자 박정희 정권은 국가 원수모독죄로 그를 잡아들였다.
밀수왕초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장준하는 석 달 동안 감옥에 갇혔다.
이것이 그의 첫 감옥살이였다.
이 때부터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른 일곱 번이나 경찰에 잡혀갔으며 그 가운데 아홉 번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듬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장준하는 민주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연설을 했다.
가는 곳마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그럴 수록 그는 박정희 정권에 가장 무섭고도 미운 사람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며칠 지난 뒤부터 낯선 차가 장준하를 미행했다.
그들은 사복 입은 경찰이었다.
결국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아... 장이욱 선생님, 선생님께서 왜놈들에게 끌려와 갇힌 곳에 30년이 지나 저도 왔군요. 선생님께서는 왜놈들에게 끌려오셨지만
저를 끌고 온 자들은 같은 민족이랍니다.'
그는 감옥 철문을 들어서며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었던 장이욱 선생님을 생각했다.
감옥에서 장준하는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장준하가 감옥에 있는 동안 국회의원 선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 청량리 부근인 동대문 을 선거구에 출마했다.
감옥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옥중 출마를 한 것이었다.
아내 김희숙이 선거운동에 나섰다.
연설회때에는 남편을 대신해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저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가정주부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왜 갇히게 됐는지는 아주 잘 알지요. 저는 남편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해도 하나도 좋지 않아요. 그저 죄 없는 우리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하루빨리 철장에서 풀려나기만을 바랍니다. 올바른 사람이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바랍니다."
연단을 내려와 보니 둘레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장준하와 함께 정치 활동을 했던 고흥문 국회의원도 있었다.
"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때도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오늘은 마음껏 울었습니다그려." 그는 김희숙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장준하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장준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 외국 기자가 소감을 묻자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쿠데타 세력은 반드시 자기들이 했던 대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장준하는 국회의원을 지내는 4년 동안 바른 정치인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는 4년 내내 월급이라곤 만져보지도 못했다.
월급이 나오면 빚쟁이들이 고스란히 가져가 버렸다.
<사상계>가 그에게 남긴 빚은 그만큼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