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위청 편: 제4회 흉노를 완승해 불패의 명성을 떨치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위청의 무덤)
제4회 흉노를 완승해 불패의 명성을 떨치다
위청의 예기가 한창인데 소년 영웅 곽거병(霍去病)이 또 나타나 절세의 재능을 떨쳤다. 그로 인해 더 없는 기쁨을 느낀 한무제는 이렇게 생각했다.
“위청과 곽거병은 하늘이 짐에게 내린 흉노의 천적이다. 반드시 짐의 생애에 흉노를 사막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할 것이다.”
한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을 불렀다.
“흉노에 돌아간 그 조신은 원래 흉노의 상국이었는데 우리에게 항복한 후 다년간 장군으로 있었소. 지금 그는 우리의 사정을 잘 안다고 여겨 선우의 군사가 되었는데 그는 선우를 설득시켜 흉노인들을 모두 사막의 북쪽으로 이주시켰소. 그는 우리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넘어 가서 그들과 결전을 벌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막북(漠北)에서 예기를 모으고 원기를 회복한 후 다시 남하해서 우리의 변경을 범하려 하고 있소. 그들은 부상당한 호랑이나 이리처럼 상처가 아물면 다시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덮칠 것이고 추위에 언 뱀처럼 깨어나면 즉시 독을 뿜으며 우리를 물 것이오. 우리는 그들이 원기를 회복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소!”
곽거병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사막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데 우리는 그들이 적을 얕잡아 보는 단점을 이용해 사막을 넘어가서 그들과 결전을 벌일 수 있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오. 두 장군은 각기 5만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동쪽과 서쪽 두 갈래로 사막을 넘어 흉노와 결전을 벌이시오. 위청 장군, 어떻소?”
“모든 것은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소신은 반드시 폐하의 뜻에 따라 흉노와 결전을 벌이겠습니다.”
위청이 대답했다.
한무제는 위청의 군권이 너무 크고 군중에서 위망이 너무 높아 의도적으로 곽거병이 큰 공을 세워 향후 위청과 함께 군권을 장악하게 하고자 군중에서 먼저 장군을 선택하게 했다. 이광의 삼남인 이감(李敢)을 망라해 사막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흉노와 결전을 벌일 의지를 가진 젊은 장군들은 모두 곽거병이 뽑아갔다. 곽거병은 제후로 책봉된 노장은 한 명도 선택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흉노의 포로병으로부터 선우의 주력부대가 동쪽에 주둔해 있고 선우의 왕실이 대군(代郡)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고 곽거병이 젊은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대군에서 출새하여 동쪽으로 사막을 넘게 하고 위청에게는 정양(定襄)에서 출새하여 서쪽으로 사막을 넘게 했다.
당시 위청의 휘하에는 노장들이 아주 많았다. 한무제는 위청에게 “중랑장(中郞將) 이광은 나이도 많고 운도 따르지 않으니 그를 선봉으로 삼지 말라”는 어지를 내렸다. 위청은 황제의 어명을 따라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에게 오솔길로 우회해서 오른쪽으로 흉노를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좌장군 공손하, 후장군 조양과 같이 정면으로 출발해 흉노의 주력부대를 찾아 나섰다.
일에는 우연이 따르는 법이다. 선우는 조신의 제언에 따라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몰래 서쪽으로 옮겨 힘을 비축하면서 천 리 길을 달려와 피곤한 한나라의 군사와 싸우려 했다. 그 바람에 곽거병이 흉노와 조우한 것이 아니라 천 리를 달려 막북에 이른 위청의 군사가 선우의 주력부대와 만났다. 선우의 군대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열을 지은 것을 보자 위청은 즉시 흉노병과 교전을 벌이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의 진지를 배치했다.
위청은 무강거(武剛車)라 불리는 철갑차를 둥글게 열을 지어 철옹성처럼 진지를 둘러쌌다. 그리고 군사들은 모두 진지에 몸을 숨기게 하고 기마병 5천만 무강거 밖에서 흉노병의 공격을 막게 했다.
흉노의 선우는 1만 명의 기마병을 파견해 한나라 군사를 공격하게 했다. 태양이 막 지려는 그 때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고 모래바람이 불어 천지가 캄캄해졌다. 모래가 얼굴을 때려 눈도 뜨지 못한 군사들은 어두컴컴한 모래바람 속에서 상대방의 얼굴도 분간할 수 없었다. 위청은 이 기회에 두 갈래의 기마병을 파견해 좌우 양쪽으로부터 흉노의 후방으로 우회해 선우의 진지를 포위했다. 선우가 자신이 포위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한나라 군사가 사면팔방에서 나타나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더는 한나라 군사를 막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든 선우는 무척 당황해났다. 이 때 태양이 서산에 지고 어둠의 장막이 내렸다. 선우는 군마에 뛰어 올라 측근의 엄호하에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서북방향으로 도주했다.
날은 어둡고 바람은 차가웠다. 두 군대는 여전히 총칼을 맞대고 피를 흘리며 격전을 벌였다. 위청은 선우가 포위를 뚫고 서북방향으로 도주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가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는 바람에 선우의 탈출을 막을 수 없었다. 위청은 즉시 선우추격을 경기병부대에 명령했다. 지휘자를 잃은 흉노의 군사는 사기가 떨어져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도처로 도주했다. 위청은 대군을 거느리고 추격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2백 여 리를 추격했으나 선우를 생포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포하거나 사살한 흉노군사는 2만명에 달했다. 조신성(趙信城)까지 쳐들어간 위청의 대군은 그 곳에서 하루 휴식하며 흉노의 식량창고를 털어 군량을 보충한 다음 이동이 불가한 물자는 모두 소각하고 개선했다.
당나라 시인 노륜(盧綸)의 <새하곡(塞下曲)>은 이렇게 썼다.
달빛 어두운데 기러기 높이 날고(月黑雁飛高)
선우는 어둠을 타서 도주하네(單于夜遁逃)
기병을 이끌고 쫓아가려 하니(欲將輕騎逐)
큰 눈이 활과 칼을 덮었네(大雪滿弓刀).
위청의 막북 작전은 중국의 군사사상 대표적인 작전으로 꼽힌다. 위청의 서로군(西路軍)이 대첩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곽거병의 동로군(東路軍)은 더욱 눈부신 전적을 올렸다. 그들은 2천 리를 달려 흉노의 두 번째 주력부대인 좌현왕의 군대와 결전을 벌여 7만여 명의 흉노병을 생포하거나 사살했으며 좌현왕은 도주했다.
막북의 전쟁으로 인해 흉노의 주력부대는 원기를 크게 다쳐 선우는 사막의 북쪽, 막북의 깊은 곳에 숨었고 그로부터 사막의 남쪽, 막남(漠南)에는 더는 흉노 왕실의 자리가 없게 되었다. 한나라에 대한 흉노의 군사위협이 기본 제거된 것이었다.
한무제는 이로써 태위(太尉)직을 폐지하고 위청과 곽거병을 군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조정에서 승상과 같은 권력을 가진 대사마(大司馬)로 봉했다. 위청과 곽거병은 당시 지위가 가장 높은 두 대신이었다.
14년 후 위청이 병사했다. 한무제는 축조 중에 있던 자신의 능침인 무릉(茂陵)의 동쪽에 위청을 묻고 흉노를 타격해 나라를 지킨 군인, 평생 흉노와 싸우며 혁혁한 무공을 세운 위청을 기리기 위해 그의 봉분을 음산(陰山) 모양으로 쌓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