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고구려역사,문화탐방
ㅇ탐방일자 : 9월18일~9월22일(4박5일)
ㅇ탐방지역 : 백암성,망강루고분군,오녀산성,서대묘,찬추묘,집안박물관
광개토왕비,광개통왕릉,장수왕릉,환도산성,산성하고분군
국동대혈,9.18역사박물관,서탑가,선양고궁,요녕성박물관
ㅇ참가인원 : 21명
ㅇ주관 : 충주문화원
백암성(白巖城) : 중국 현지 이름은 연주산성
백암성 성벽의 높이는 5~8m, 너비는 2~3m이다.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약 5m 정도의 장대가 있다. 장대 주위에 내성이 쌓여 있는데, 이를 아성(牙城)이라 한다. 성을 쌓은 지 1500년이 넘었는데도 백암성의 치는 위용이 넘친다. 공성무기의 공격에 견딜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견고함이 돋보인다. 백암성에는 55m 정도와 6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 개의 치가 나란히 있다. 치의 높이는 9m에서 10m 정도이다. 성의 남쪽은 절벽을 이용한 천연의 자연 성벽이다. 절벽 아래로는 태자하가 흐르는데 천혜의 요새이다. 백암성의 흰색 성돌은 바로 석회암이 재료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성의 특성 퇴물림방식의 고구려 성은 중국 성곽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성벽의 밑 부분, 이른바 기단 부분은 퇴물림 방식을 사용한다. 고구려인들은 성을 쌓을 때 기단(밑받침부분)에서부터 조금씩 들여쌓기를 해 성의 안정성을 유지했다. 이것을 퇴물림방식이라고 한다. 퇴물림을 해서 일정 정도 높이가 되면 이후 수직에 가깝게 5~10m 이상의 성벽을 쌓아올린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안시성(安市城)전투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지리적으로 요하(遼河)유역에 위치하여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지대에 있었던 성이었다. 고구려의 양원왕이 백암성을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국경지대의 여러 성을 점령한 후 요하 동쪽에 있는 요동성(遼東城)을 격전 끝에 점령하였다. 그 뒤 공격 목표를 백암성으로 정하여 성의 서남부를 공격하자 성주 손대음(孫大音)이 항복하여 성을 내주었다. 그 뒤 당태종은 안시성전투에 패하여 귀국했지만, 백암성을 위시한 10여개 성과 요주(遼州)ㆍ개주(蓋州)ㆍ암주(巖州) 등의 3개 주가 당나라 영토에 편입되었다.
백암성은 당시 암주에 속하는 성이었고, 발해 때에는 노주(盧州)에 소속된 지역이었다. 백암성은 남만주평야의 하천유역에 있다는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고구려 때에 돌궐족의 침입을 여러 번 받은 적이 있다.
백암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백’이 ‘밝다’ㆍ‘크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큰 산’이 된다. 이는 평야지역의 구릉을 배경으로 발달된 지명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