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춥습니다.
방안에서 시간이 무료할때 메일이나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태종때 영의정 沈溫에게 두 딸이 있어 하나는 세종비 소헌왕후가 되었고 또 하나는 강희안 강희맹의 생모이니 어수선한 건국시기에 이보다 더 믿을 만한 가문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두 아들이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해서 과거에 급제하니 출세의 가도를 달릴수 밖에요.
姜希顔은 세종때 장원급제하여 세조 1년에는 세조 즉위에 대한 謝恩府使로 막중한 사명을 띠고 가서 세조를 조선의 왕으로 인준받고 돌아오는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왔습니다. 벼슬은 가선대부 인수부윤이 되었고 晉山君에 봉해져 공신록에 올랐지요. 이때에 중국에서 돌아올때 南京에 있는 錢堂池에 핀 연꽃씨를 받아와 심었는데 지금도 觀谷池에 연꽃이 피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아서 安山郡의 별호(別號)를 세조 12년(1466)부터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예서(隷書)와 팔분(八分)에도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기록상으로 전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다. 그리고 영모화(翎毛畵)·산수화·인물화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 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 耕雲圖〉는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동생 姜希孟은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우의정에 올라 세조의 아들 세자책봉을 위한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晉城君에 봉해지고 공신록에 오릅니다.
강희맹의 아들 姜龜孫은 성종 10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右議政에 올라 1505년에 명나라 황제즉위를 축하하기위해 賀登極使가 되어 중국으로 가던중 병을 얻어 평안도에서 죽었답니다. 그는 晉原君에 봉해지고 공신록에 오릅니다.
2대에 걸쳐 3명이 공신록에 오르니 나라에서 功臣田을 하사할 때 보이는 곳은 다 갖으라고 했답니다. 이 땅이 경기도 시흥일대고 강희안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연꽃을 기르던 연못이 官谷池인데 이 일대가 蓮城面이 되었고 시흥이 시로 승격하니 이곳이 蓮城洞이 되었습니다.
강희안과 강희맹 형제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때의 名臣이었고, 그 아들 강구손은 성종, 연산군, 중종 때의 명신이었습니다.
오늘 사진은 이 姜씨가의 산소 왼쪽 구능에 있는 안동權씨 묘원을 소개 합니다.
권씨가의 權蔓衡은 강희맹의 사위로서 세조9년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낸 사람입니다.
아들 권상은 가선대부 지중추부사를 했고 손자 권대충은 증손자 권붕은 한림학사를 한 명종,중종, 인종,명종 때의 명신이었습니다. 그 후손 權用正이 헌종 10년에 안산군수에 부임하여 이 관곡지를 중수하였답니다. 특히 "정조 21년(1797)에는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을 행차하는 길에 안산 관아(安山官衙, 안산시 수암동 256)에 유숙할 때 안산관내의 선비를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면서 어제(御題)로 시제(詩題)를 <강희맹이 사신으로 중국 남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당에서 붉은 연꽃씨를 채취해 왔는데. 그로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 이라고 했다>로 정할 만큼 관곡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 곳에 권만형과 아들 권상, 손자 권대충, 증손자 권붕을 비롯하여 일족이 묻혀있고 권만형의 17대손이 지금도 묘역과 관곡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관곡지>

< 권씨묘원 재실 >

==세부 안내문==
관곡지(官谷池)는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은 세조 9년(1463)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남경(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위치: 하중동208)에 재배를 해본 결과 점차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 뒤 수초(水草)가 성(盛)하여 못(池)이 폐(廢)해지자 헌종 10년(1844)에 안산군수에 부임한 권용정(權用正)이 이듬해 봄에 하중동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못을 파냈는데, 여름이 되자 연꽃의 잎이 중국 전당의 것과 같이 두 줄기가 자라난 것이었다. 또 못을 관리하기 위하여 하중동 주민 중에서 여섯 명의 연지기(蓮直)을 두고 여섯 명 중 혹 누락자가 생기면 즉시 하중동 주민으로 대체했다. 이들 연지기에는 각종의 노역(勞役), 부역(賦役), 포세(布稅), 양곡세(糧穀稅)를 제외시켜 주고 오직 못만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관곡지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 달리 꽃의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담홍색이다.
이 못은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權曼衡, 사헌부감찰)의 집가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의 소유가 되어 관리되어 오고 있다. 특히 정조 21년(1797)에는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을 행차하는 길에 안산 관아(安山官衙, 안산시 수암동 256)에 유숙할 때 안산관내의 선비를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면서 어제(御題)로 시제(詩題)를『강희맹이 사신으로 중국 남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당에서 붉은 연꽃씨를 채취해 왔는데. 그로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 이라고 했다』로 정할 만큼 관곡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연당 한가운데에 있던 관상소나무는 관곡지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고 농학자로서의 기품을 상징하고 있는 듯했으나 1990년 9월에 폭우로 고사되었다. 못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인데, 시흥관내의 연성초ㆍ연성중학교 등의 교명과 연성동의 동명 및 시흥시의 향토문화제명인 연성문화제(蓮城文化祭)의 명칭 등은 이 못에서 연유해 명명되었다.
-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8호
- 지정일 : 1986년 3월 3일
첫댓글 강희맹의 사위가 한 묘역에 지내고 있네 권씨 집안과 강씨 집안이 시흥 일때의 공신전을 차지 하였군 좋은 시절에 벼슬 을 하였네 역시 지금이나 옛날이나 부자는 부자끼리 벼슬한 사람은 벼슬한 사람과 혼인를 하고 마자 끼리 끼리 지
그런 곳이 있었군요...하여튼 좀 복잡한데...차근히 읽으면 아주 좋은 내용이네요...겨울 방학 과외 치고는 당당한 수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