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1주일설교 시편73:1-19
본문: 시편73:1-28
제목: 넘어질 뻔한 세상에서
오늘은 시편73편의 말씀을 가지고
“넘어질 뻔한 세상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넘어질 뻔한 세상에서”
동화책이나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이 고생 고생하다가 성공하고 부자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이야기로 마쳐집니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자는
처음에는 승승장구하지만
그의 끝은 비참한 몰락과 멸망을 합니다.
그런 것을 권선징악으로 줄여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선하게 살기를 권하고
악한 자에게는 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동화 속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은 갈수록 잘 되는 것 같고
선한 사람이 더욱 힘겨워 보입니다.
오늘 시편은 그런 세상살이를 겪는 중에
신앙을 가진 이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내는 시편입니다.
이런 상황을 겪을 때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이는 현실을 살게 됩니다.
믿는 이로서 그런 세상 가운데서
참된 진리를 찾고자 하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답답하였을 뿐입니다.
이때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깨우침을 통해서만
그 상황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잘 되는 것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죽음의 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어떤 생각을 해야 어떤 논리를 가져야
이런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것을 안다고 해도 시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상쾌함이 없는데 어찌 기운이 나겠습니까?
생각을 하면 생각이 우리의 삶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삶이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현실을 알지 못한다면 땅바닥에 기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합니다.
그저 현실에 끌려 고통과 낙심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우리는 마치 높은 기류를 타고 나르는
독수리의 눈매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는 것은 눈 앞에 있는 것에 매여
휘둘리는 세상 사람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선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 신앙과 현실의 괴리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내가 가진 신앙과 현실 속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로 인해 실망과 처참함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의 1-3절에서 시인은
신앙과 현실의 괴리를 묘사합니다.
우선 1절은 신앙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신앙적 격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대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잘 믿던 시인이 비틀거립니다.
신앙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인한 비틀거림은
인생 최고의 위기로 몰아갑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악인들의 형통함으로 보고
질투심에 맘이 상하고 속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배운 신앙적 가르침과
너무 다른 현실을 목격한 시인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악인들의 형통한 현실(4-12절)
시인은 악인들이 형통한 현실을
상세히 묘사하며 탄식합니다.
악인들은 매우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상한 일은 죽을 때마저도
고통을 받지 않고 곱게 죽습니다.
악한 일을 했으면 재앙이 있어야 하는데
재앙은 고사하고
흔한 고난조차도 그들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위세를 강력하게 드러내어 떨칩니다.
7절은 한눈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직역하면 그들의 눈은
살이 비대해 삐져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망상들로 넘친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풍요로 인해 눈이 어두워진 악인들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어긋나게 행동해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일삼는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힘을 믿고
오만방자한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9절은 악인들의 말이
도처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유력한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요즘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높다는 사람들의
하는 말들과 행동이 그려집니다.
악을 행하고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서는
정 때문에 거부할수 없어서 행했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양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악인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여 무엇을 합니까?
한데 모여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
가득한 물을 고갈시켜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듭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악인들은 실재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의 일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로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는 존재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악인들이 어떻게 형통합니까?
“이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참으로 화나고 속상하고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3) 이해할 수 없는 의인의 고통(13-16절)
13-16절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진술입니다.
13절에 언급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손을 씻는 것”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중 “손을 씻는 행위” 무죄를 선언하는 행동입니다.
시인은 제사를 바르게 드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 이웃과 잘 살았는데
그 결과가 고작 “재난”과 “징벌”이었습니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고도 쉽게 피하는 재앙이
의인에게는 끊임없이 징벌로 임합니다.
시인은 이런 억울한 상황을 알고
세상에 소리를 치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폭로하려던 계획을 포기합니다(15절).
시인은 신앙 공동체를 사랑하기에 침묵을 선택합니다.
대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지혜를 찾는 지적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했더니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16절).
그의 그러한 노력은 처참하게 무산됩니다.
지적 탐구만으로는 머리만 아플 뿐
인생의 신비가 벗겨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노력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남으로 들어갈 때
인생의 신비가 하나씩 드러나는 법입니다.
4)악인들의 운명(17-22절)
17-22절은 악인의 운명을 묘사합니다.
17절은 이 시편의 핵심 구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ㅇ르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인은 성소에서 악인의 종말을
맞게 될 것임을 깨닫습니다.
성소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곧 “계시”가 주어지는 장소입니다.
기도는 바로 성소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깨달음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는 계시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뜻이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악인들의 형통에 눈과 마음이 쏠렸을 때
시인은 절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베드로가 풍랑과 바다에 눈과 마음이 쏠렸을 때
갈릴리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을 자기 삶 속으로
다시 모시자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악인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영구히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집 곧 성소란 어떤 곳입니까?
의롭게 살려다 고통과 외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와서 하나님의 정의를 깨닫고
그분의 놀라운 위로를 받는 곳입니다.
18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을 보고 미끄러질 뻔하였지만
다행스럽게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악인들은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임하는 것과 같은 파멸이
의인을 범하게끔 방치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반드시 파멸될 것입니다.
악인의 끝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임합니다(19절).
따라서 악인들이 누리고 있다고 믿는 평안과
안전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20절).
그들의 형통함은 역시 하룻밤의 꿈처럼
허망하게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겉보기 행복” 또는
“허상의 행복”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21-22에서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기 이전의 상황
곧 악인의 형통을 보고 하나님을 의심하여
넘어질 뻔하였던 상황을 반성하는 내용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불의한 현실로 인해
시인의 “심장/마음-이성과 결단의 자리”
“콩팥/신장(감성과 정서의 자리)은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심장과 콩팥은 인체에서
가장 민감한 감각 기관에 속합니다.
그 결과 시인은 감각 기관에 해를 입고
현상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짐승이 되어 버렸습니다(22절).
시편49:20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으면
세상일에 상처를 입고 짐승과 같은 자가 되고 맙니다.
5) 의인의 운명
23-26절은 의인의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늘 동행하시면서
자신을 붙잡아주셨음을 깨닫습니다(23절).
시인은 이제 우둔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현명한 계획으로 인도받음으로써
영광의 길을 나아갈 것입니다(24절).
24절의 “후에는”라는 말을 지금과 앞으로를 포함하고 있는 말로서 현재와 미래를 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악인의 “현재적 형통함”이
“미래의 파멸”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의인의 “현재적 고통”은
“미래의 영광”으로 오는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악인들이 장악한 것 같던 “하늘과 땅”에
남아 있던 그들은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현존재 계십니다(25절).
시인은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모해야 할 대상임을 깨닫고 그 사실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몸과 마음이 완전히 소진되었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마음이 반석”이자
“분깃”이 되심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6)결론적 요약과 맹세(22-28절)
27-28절은 이 시의 결론적 요약과 맹세입니다.
시인은 악인과 의인의 운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권선징악적인 가르침으로 시를 마무리합니다(27절).
“주를 멀리하는 자”와 “주를 떠난 자”는 망합니다(27절).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복입니다(28절).
이런 복 개념을 신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예수님의 팔복입니다(마5:3-10).
마음이 가난함, 온유함, 의에 주림,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해 살아감!
이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번영”으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본직적인 “현존”
곧 하나님이 함께 계신 그 자체입니다.
즉 우리는 물질적 축복이 아닌
하나님과의 내적 친밀감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시인은 1절의 신앙적 격언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증하면서
이를 널리 전하겠다는 맹세로 끝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편의 시인은 시편 1편 곧 시편 전체의 주제인
“의인의 형통과 악인들의 멸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거친 후에는
결론적으로 그 전체 곧 의인의 형통과
악인의 멸망을 수용합니다.
오늘 시인은 어떤 특정 문제로부터
구원받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시인은 생각의 단계에서 하나님을 믿음의 단계로
진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를 통해서 정직한 자신과 세상에 관한 관찰-
그런 지성의 활동이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 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궁극적 시점에 도달해야 비로소
그 결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인의 외형적인 풍족함과
현재의 성공을 보면서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결국 망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나아오려는
정결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물질적인 축복보다는
그분과 누리는 내적 친밀함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과 내적 친밀함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친하십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고 평안하십니까?
물질이나 세상 영광에 마음을 두고 행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르게 되어
하나님과 사이가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함이 복이다.”라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시인의 경험을 통해서 결론에 이른 것처럼
그런 과정을 겪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의 결론을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돌아가는 현상들을 보면서
낙심하여 넘어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나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봄으로
그분과 내적 친밀함을 이루어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