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북 김천시 소재의 수도암과 인현왕후길, 청암사를 찾았다.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에 위치한 수도암과 청암사는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관련있는 곳인데, 인현황후는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서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왕후였으며, 유교적 이념이 평배하던 조선시대의 국모로서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었음에도 조정과 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서인이 되었을 때, 이곳 청암사에서 3년간 머물며 복위를 간절히 기원하던 중 숙종의 교지를 받고 환궁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곳이다.
이곳 '인현왕후길'은 왕후가 청암사에서 수도계곡의 절경지 또는 수도암까지 산책하며 애환을 달래던 길이었는데, 구전으로 '왕비길' 또는 '인현왕후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1980년대 초 산림청에서 산불진화용 임도를 개설하면서 확장되었고, 1915년 김천시에서 숲길을 조성하면서 지명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인현왕후길로 명명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8월에 걷기 좋은 길'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오늘의 투어코스는 서울에서 차량으로 출발 수도암에 도착하여 수도암 경내를 먼저 보고, 청암사로 이동하면서 무흘구곡 중 제9곡 용추폭포, 제8곡 와룡암, 제7곡 만월담을 경유하여 청암사에서 주차 후 수도암을 잇는 임도를 걸어 인현황후길을 만나보고 다시 청암사로 회귀하여 경내 구경을 하며 마무리하였다. 다음날 옥천투어를 위해 오늘밤은 조용한 수도산자연휴양림에서 하루밤을 묵고 가기로 한다.
수도암 입구에서 인증샷
수도암은 청암사와 함께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쌍계사의 소속 암자로 창건한 이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현재 본당인 대적광전과 약광전, 나한전, 관음전, 선원 등이 있다. 선원은 1975년에 창건되었는데, 85평에 이르고 창건 직후 외국인 수도자도 많았다고 한다. 나한전은 나한님의 신통력으로 여러가지 영험한 기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어떤 기적이었을까?
수도암 전경
신통력이 영험하다는 나한전
지정문화재인 수도암 삼층석탑(보물)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수도암 대적광전 앞에 서 있다.
인현왕후길에서 인증샷
인현왕후(1667~1701)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계비로서 본관은 여흥 민씨다. 폐서인이 되었을 때 청암사에서 생활하며, 이곳 길을 산책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김천시에서 1915년 '인현왕후길'을 조성하였다.
무흘구곡 제9곡 용추폭포 가는 길 입구 출렁다리
*** 무흘구곡 ***
무흘구곡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한강 정구(1543~1620)선생과 그 후예들이 대가천의 아름다운 계곡을 오르내리며 한시를 지어 무흘의 절경을 노래했던 곳이다. 9곡의 굽이마다 이름을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이학으로 상징화함으로써,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도락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종의 수양과정임을 보였다.
제9곡 용추폭포
폭포의 모습이 「확」처럼 생겨 구폭이라 하기도 하고, 연못 속에 용이 산다고 하여 용추라 하기도 한다. 이곳은 구곡의 종착지로서 자연과 인간이 천리로 하나가 되는 성리학적 최고 이념인 천인합일의 실현 공간이라고 한다.
*** 확 ***
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게 돌절구 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 절구의 아가리로부터 밑바닥까지의 부분
용추폭포에서 인증샷
제8곡 와룡암
바위의 모습이 길게 누운 한 마리의 용과 같다고 하여 와룡암이라고 한다. 한강 정구선생은 이곳에서 맑은 마음을 갖기 위하여 자기 수양을 철저히 하는 한편, 와룡지를 만들어 이 지역의 문화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불령산 청암사 일주문
일주문의 왼쪽에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청암사의 왼쪽편을 지나 수도암에 이르는 임도로 연결된다.
임도를 따라 고즈넉한 청암사 왼쪽편 계곡을 오른다.
인현왕후길 7번 지점에 도달했다.
인현왕후, 그 발자취를 찾아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뒤 곧바로 후회하였지만, 왕으로서 내린 처분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숙종은 1694년 마음을 바꾸어 인현왕후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을 내리고, 이후 서궁으로 입거한 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인현왕후는 복위 후 청암사에 "큰 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복권되었다."라는 서찰과 함께 수도산 일대를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왕후의 자리까지 올랐었던 장씨는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뿐만아니라 장희빈이 지녔던 옥쇄는 부수어졌으며, 장희빈이 부모에게 작호까지 내렸던 교지는 불 속으로 던저져 없던 일이 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은 다시금 바뀌게 되었다.
인현왕후길 안내도
청암사 천왕문
'인현황후의 꿈을 이룬 천년고찰 청암사'라는 상징 글귀가 천왕문 좌우에 새겨져 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을 만나 여쭤보았더니 가장 우측에 있는 건물이 승가대학 석박사 과정의 교육기관이라고 한다.
갈색기둥 건물 뒷편에 대웅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이 보이지 않게 앉아있는 건물 설계가 의아스러웠다. 왼쪽으로 보이는 흰색 벽면건물이 승가대학이다.
청암사 비구니승가대학(1987.3.25 설립)은 4년제 과정으로서 사미과(1학년), 사집과(2학년), 사교과(3학년), 대교과(4학년)로 편성되어져 현재 130명의 학인대중이 부처님의 경전을 배우며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화합과 질서 참여의식 등을 익히며 전통적 수행과 아울러 현대사회에 필요한 수행자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승가교육의 현장이다.
청암사 대웅전과 다층석탑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다층석탑은 조선 후기의 탑으로 1912년 성주의 어느 논바닥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지대석 위에 2층의 기단을 놓고 탑신을 올렸는데 원래는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륜부 장식이 일부 남아 있다. 현재 높이는 4.21m이다.
청암사 보광전(정면에 작게 보이는 건물)
이 건물은 인현왕후가 조선 숙종 15년(1689)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자 원당(기원하는 건물)으로 건립된 청암사 보광전이다. 내부에는 42개의 손을 지닌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사진촬영을 금한다는 글귀가 붙어 있어 내부를 촬영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왼쪽 건물의 끝방이 인현왕후 함원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약 330여 년 전의 인현왕후 처지를 생각해 보니 애닳은 감정이 느껴진다.
인현황후의 함원전(기거했던 방)
오래된 느낌이 나는 출입문과 건축물이 한옥 건물 아름다움의 극치다. 청암사를 뒤로 하고 수도산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