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압사(虎壓寺)는 호압사(조). 서울 금천구 시흥 2동 234 삼성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시흥군은 본래 금천현(衿川縣)으로 시흥이라는 말은 ‘일어난다.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조선 정조 때부터 시흥군이라 불리웠고 1963년에 서울이 되었다.
호압사는 관악산의 줄기인 삼성산(三聖山)에 자리하고 있는데, 관악산의 생김새가 숲보다는 바위가 많고 그 바위가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서 호암산(虎巖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사상에 의하여 호암산을 호압산(虎壓山)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즉 조산(朝山;신하의 산이라는 뜻으로 공경하는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함)인 관악산의 호암산이 주산인 백악산(현재의 중앙청 뒷산으로 임금의 산)보다 그 지세가 더 크기 때문에 이를 누르기 위하여 호압산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성산이 또한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서 호암산이라고 한다고 하여 삼성산과 호암산이 혼용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약수암(藥水庵)은 관악구 신림 10동 318번지의 관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신림동은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시흥군이었다가 1963년에 서울이 된 곳이다. 본래 신림동(新林洞)이란 관악산 기슭의 숲이 무성하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관악구의 서남쪽에 있는 신림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관악산 그 자체 모양을 하고 있었고 서울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달동네라는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서쪽 방향에서 관악산 최고봉인 연주봉(629m) 연주암(戀主庵)으로 향하여 올라가다 보면 조선후기의 문신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의 행적이 남아 있는 자하동에 자운암(紫雲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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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암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서쪽 성주암(聖住庵) 가까이 신림 9동과의 접경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산세가 아름답고 숲이 많으며 기암괴석이 우뚝 서있고 골이 깊어 일찍이 남쪽의 금강산 또는 경기도 5악(五嶽) 가운데 하나로 불리던 관악산의 언저리이다.
약수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그 어느 때인지 모르나 김처사(金處士)라는 분이 이곳에 초가 삼간을 짓고 수도하던 것이 절의 시작이라 한다. 그 후 개항기인 1880년(고종 17)에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법당을 건립하여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가 어떠한 연유로 약수암의 법당을 건립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와의 대립 속에서 국가와 왕조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 불사를 하지 않았을까 한다. 명성황후는 이로부터 8년 후인 1888년(고종 25)에 약수암에서 멀지 않은 연주대에 있는 연주암에 일만오천냥을 시주하여 극락전과 용화전을 짓게 하였던 데서도 그러한 일면을 볼 수 있다.
화계사(華溪寺)는 도봉구 수유1동 487번지 삼각산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서울 시내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삼각산의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시내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백운대·만경봉·동장대로 남하한 북한산의 주능선이 서쪽으로 꺾어져서 남장대와 비봉으로 이어지는 지점이 되고, 여기서 다시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내려와 수유동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곳 산기슭의 울창한 숲에 화계사가 자리잡고 있다. 굳세고 길게 내려온 산줄기가 절에 이르러 아늑한 공간을 이루면서 감싸고 있어 수려한 바위와 계곡을 지니고 있다.
화계사의 창건과 중수에 대하여는 1938년에 당대의 석학 안진호(安震湖)스님이 편찬한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略誌)〉에 비교적 상세히 밝혀져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화계사의 내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절은 1522년(중종 17)에 신월(信月)선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원래는 고려 광종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인 부허동(浮虛洞)에 보덕암(普德庵)을 창건하여 이어져 왔는데, 이를 옮겨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화계사의 전신은 보덕암이고, 창건주는 법인대사 탄문(901∼975)인 것이다. 탄문스님은 본래 광주(廣州) 고봉 사람이라고 하니 바로 지금 서울 부근 출신이라 출가 직후에 이곳에 터를 잘고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522년(중종 17)에 보덕암의 신월스님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하여 보덕암이 있던 부허동 남쪽의 화계동으로 법당 3처와 스님들의 요사 50칸을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고쳐 불렀다. 창건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은 1618년(광해군 10) 9월에 화재로 인하여 불전과 요사가 모두 전소되었다. 그러나 도월(道月)스님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창불사를 하여 이듬해인 1619년 3월에 낙성을 보았다.
그로부터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건물이 퇴락하여 1866년(고종 3)에는 용선 도해(龍船渡海)스님과 범운 취견(梵雲就堅)스님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불전과 승방건물들을 중수하였으니 화계사의 삼창(三創)이라 할 만하다. 그 때 지어진 것이 현재의 대웅전과 큰방이다.
용덕사(龍德寺)는 도봉구 우이동 산68-1번지에 자라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삼각산 기슭의 용덕사 주변은 기암괴석이 많고, 특히 용의 명당터로 알려져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세로 보아 용덕사의 동굴은 용의 입에 해당하고, 그 앞의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여의주라 하여 그곳에서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되고 병이 낫게 되는 신통력을 보여 준다고 전해온다. 이곳에 명불당을 지어 기도처로 조성했다.
보성스님에 이어서 은석스님이 이 절을 지켜 왔는데, 협곡임에도 신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993년 홍천스님이 주지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덕사의 가람구성은 대웅전·종각 요사 2동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상을 본존으로 모시고, 석가후불도와 신중도·칠성도·산신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굴 근처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100여 년 전에 이 절에서 시봉하던 한 동자가 큰 불빛이 바위에 부딪히는 것을 목격한 후에 약사여래상을 조각한 것이라고 전해 온다.
첫댓글 감사히 잘 봤네요 ()
멀리 서울쪽의 절들은 첨 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날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