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경제사-2nd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변곡점 중 하나가 사람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그들에게 영감을 얻은 좌파들은 시장이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간다는 사실에 아무런 환상도 없이 냉철하게 보았지만, 시장이 종국적으로 스스로를 초월하여 도달하게 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졌다. ‘벤저민’ 등의 우파 정치가들은 시장은 모두가 아니라 일부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마찬가지로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혜택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중도파는 사회의 긴장을 누르기 위해 개혁 조치와 약간의 진압을 사용했다. 그러자 좌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틈을 타 우파는 자신의 기본권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내 것은 내가 지킨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사회진화론자들은 경제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자들이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이라는 과거에 호소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인종적 속성으로 경제적 성공을 설명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했다. 한 세대가 지난 뒤 ’케인스‘가 말한 대로, 사회진화론자들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인류는 마치 질퍽거리는 대양의 갯벌에서 탄생한 아프로디테 여신처럼 찬란하고도 위대한 탄생의 과정을 오늘도 밟아 나가고 있으며, 사회주의 운동은 그 위대한 과정을 늦추려고 계산된 불경스러운 훼방질“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진화를 통해서 유전자 풀을 개선하는 진보적 생존 투쟁의 일환으로 정당화했다. 그렇다면 나라들 간의 관계 또한 진화를 통해 유전자 풀을 개선하는 비슷한 생존 투쟁으로 보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너보다 잘났어‘라는 말은’ 우리는 걔네들보다 잘났어‘로 너무 쉽게 변할 수 있다. 그리고 혹시 싸움이라도 난다면, 그’ 우리‘는 스스로 잘났음을 입증하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케인스‘는 현명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신과 동료들과 선배들 모두가,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이 경고를 무시한 채 수수방관했다고 이렇게 말했다. ”<1914년 이전의 경제성장이라는> 낙원에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적-문화적 경쟁, 독점, 각종 계약, 배제 등의 문제가 스멀스멀 나타나면서 결국 에덴동산의 뱀처럼 낙원을 망쳐놓는 역할을 하게 되건만,“ 이런 문제들은” 그저 일간지에 실리는 재미난 읽을거리 이상으로 보지 않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자신과 자기 무리는 번영을 증대 시켜주는 진보적 시스템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상궤를 이탈한 혐오스러운 것이라 여겼던 탓에 쉽게 외면해 버렸다는 것이다.
대영제국과 견줄 수 있는 제국은 몽골제국 정도였다. 미국도 강대국으로 확고히 한 뒤에도 영국과 달리 비공식적인 형태의 제국을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인도, 이집트, 중국, 일본의 예를 든다. 인도는 벵골 태수가 프랑스 보병과 대포를 빌려 영국군 요새를 공격하고 점령한다. 그러면 영국인의 밀수와 탈세를 막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은 군대를 보내 맞섰다. 그리고 상대의 핵심 부하 셋을 뇌물로 매수해 버렸다. 그리고 ’콜카다‘가 영국령 인도의 수도가 된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무굴제국에 연전연승한다. 이집트는 ’무하마드 알 리‘가 오스만의 용병으로 입대하여 이집트 전쟁에 참전한다. 나플레옹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자신의 동포인 알바니아인의 지휘관이 된다. 스웨즈 운하가 완성되기 전 ’알리‘의 손자가 이집트의 지도자였다.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면화 기근이었다. 이집트는 면화를 재배했다. 이집트 정부에 돈을 댄 빚쟁이들이 이집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고 이집트는 1876년 파산을 선언한다. 왕 ’이스마엘‘은 권좌에서 내려온다.
중국은 ’리홍장‘이 태평천국의 난을 막기위해 ’쩡궈판‘을 시켜 의병-상군을 조직해 훈련 시킨다. 태평천국의 난에 프랑스 영사와 신부 등이 살해된다. ’리홍장‘은 프랑스를 무마키 위한 역할을 한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4살짜리 조카 광서제를 제위에 올린다. 중요 기술이 장군으로서 능력이고 유럽의 분노를 사지 않고 원조를 얻을 능력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중국의 관료는 황하의 제방과 운하도 관리 못할 정도로 부패했고, 지방관은 소금세도 징수 못할 정도임에 주목하여 청국은 외국의 ’금속가공류‘를 사들이고 해군, 병기창, 항만을 건설한다. 그리고 월남을 지배하는 프랑스를 도전할 만하다 오판하여, 덤비다 중국함대가 한 시간 만에 박살이 난다.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한, 청나라가 맞서다가 쓴맛을 마시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 대만, 남만주가 일본의 영향권에 넘어간다. 리홍장은 근대 탄광이 중요산업임을 깨닫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홍콩 상인에게 탄광개발권을 넘긴다. 반대파들이 탄광 재굴 방식이 땅의 용을 노하게 하여 돌아가신 서태후도 무덤에서 쉴 수 없다는 논리를 주장하나, 리홍장은 근대화의 길을 선택한다.
개혁 정치인 ’쑨원‘은 1894년’ 이홍장‘ 밑에서 일을 하려다 거절당했다. 1911년 ’쑨원‘은 반란을 일으켜, ’윈안스키‘ 등이 진압을 거부하니, 청왕조는 무너진다. 6살의 황제는 폐위된다. ’위안스키‘는 스스로 대총통임을 선언하고, 중국은 무정부상태에 빠진다. 이상이 식민지가 될 뻔했던 나라들의 대응에 관한 소찰이었다. 사회주의 경제학자 ’조엔 로빈슨‘은 즐겨말하기를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본가들에 착취당하지 않는 것, 즉 그들에게 무시당해 생산과 교환의 회로 바깥에 놓이는 것”이다 말했다. 특정 제안을 거절한 결과를 누가 감당하게 되느냐도 문제였다. 그 나라의 지배 엘리트인가? 그들의 후손인가? 일반적으로 시장은 주시는 분이니 마땅히 찬양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고, 시장은 빼앗아 가는 존재이며 사람들로부터 빵, 주거, 존엄을 빼앗아 간 자들은 자주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일본이 다른 주변부 나라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1868년 일본인 여섯 명 중 한 명이 도시에 거주했다는 점이다. 당시 대도시 오사카는 200만 명에 달했다. 남성 성인의 절반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도쿄에는 600개의 서점이 있었다. ’네델란드어‘의 대포 주조공장 설명서를 읽고 반사로 대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포를 복제한 것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는 막을 내렸다. ’이토 히로무미‘는 미국에서 화폐와 은행에 대한 공부를 했다. 봉건적 소작료 지불 방식을 금납화로 조세제도를 만드는 법령을 작성한다. 산업경제국들은 정부의 힘을 제도적 여건을 창출하는 데만 집중한다. 바로 철도 및 항구, 교육, 은행, 미래 비교우의를 위한 전략 산업의 보호 관세다. 제국주의 열강은 메이지 일본이 5% 이상의 수입 관세는 부과하지 못 하도록 금지했다. 일본은 승자를 뽑는 방식이 아니라 승자를 인정하고 보조금을 지급했다. 메이지 시대는 대형 은행이 없었으나 정부와 군부 정치가들은 철강과 증기기관의 시대에 일본을 수호하기 위한 병참료를 확보하고 제국을 건설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1914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거리 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한 보스니아 테러리스트가 왕세자 ’프란츠 페른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를 암살한다. 황제와 대신들은 충격적인 암살은 무엇이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신호로 보였다. 그들은 암살자를 처단하고, 세르비아의 기를 꺾고,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의 강국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당시의 여러 전쟁들은 단기간에 모두 끝이 나지 않았던가? 유럽의 귀족들은 마침내 주사위를 던졌다. 순간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게 될지에 대해서 거의 절반도 알지 못했다. 대중의 귀와 입을 막은 채, 거대한 메아리방을 만들어 대중을 몰아넣었다. 그 방안에는 귀족들의 선전과 이데올로기 구호만이 울려 펴지면서 서로를 증폭시켰다.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잘 교육받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던 서양의 문명화된 대중들은 이 귀족층의 외침에 열성적으로 호응했다.
1915년 독일은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했는데 ’염소‘가스였다. 암모니아를 추출해서 비료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이 화학무기로 쓰인 것이다. 독일의 동맹국은 오스트리아-헝거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뿐이였다. 프랑스, 러시아, 벨기에, 영국, 이탈리아가 그들과 맞섰고, 1917년부터 미국과 루마니아가 합류했다. 1918년 말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이 붕괴되었다. 영국의 해상 봉쇄로 독일의 국민들은 기아 상태 직전이었다. 독일은 휴전을 요청했다. 역사가 폭넓은 불가항력적인 구조적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은 1차 대전과 함께 사라진다. 보스니아 문제는 얼마든지 외교적으로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었고, 전쟁이 어느 쪽에서든 신속하게 압도적으로 끝날 수 있었고, 각국 정부와 지배 엘리트들이 이성과 상식을 회복하여 평화 협상에 착수할 수 있었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는 경제적 엘도라도였다. 이 40년의 사용된 기술들이 1500년에서 1870년까지의 기술 발전과 대략 같았다. 생산력뿐 아니라 어느 시대보다 친절하고 온전했다. 노예는 줄고 사람들의 참정권은 확대되었다. 그러니 1차대전의 끔찍한 도살장의 기억 때문에 찍소리 못하던 군국주의자-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전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로이 시작하는 데 합의하기는 쉽고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민족주의는 재앙임이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의 반대라 할 세계시민주의, 즉 모든 사람들이 공동주택에서 살고 따라서 서로를 한 지붕 식구로 대우해야 한다는 이념이 분명한 대안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사이비 고전적인 절반의 자유주의 질서를 변혁하고자 했던 두 사상 조류가 나타났다. ’레닌‘의 현실사회주의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었다. 둘다 다음에 알아보자며 필자는 말을 계속한다.
2024.10.09.
20세기 경제사-2nd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홍기빈 옮김
생각의힘 간행
첫댓글
민족주의
세계시민주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