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탄생]
성서는 동서양의 경전 중에서 문자적으로 가장 오류가 많은 경전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친히 써주시거나 말씀한 내용을 직접 받아적은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던 구전 신화를 후대의 인류가 문서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생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만난 목격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내려오던 설화나 사건 등을 후대에 필사했기 때문이다.
종이가 있던 시절에 문자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암송하였던 것을 채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 27권’은 예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기록자는 예수나 그의 제자가 아니다. 신약 성서의 사복음서는 예수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것이 아니다. 예수도, 제자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목격자들의 했던 말이 전해져 오던 것을 후대가 듣고 쓴 것이다.
성서에는 애석하게도 원본이 없다. 1454년 쿠텐베르크의 활자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문서는 필사본이었다. 신약은 처음부터 27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종이가 없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파피루스라고 하는 양피지(羊皮紙)에 쓴 ‘쪽 복음’이나 ‘쪽 편지서’가 당시에 이미 수천 통이 존재하였다.
신약이 27권으로 정경화 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 후 4세기 무렵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를 통일하고서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뒤, ‘쪽 복음’ 가운데 일부만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이다. 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10세기까지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성서가 기록된 목적은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인터넷을 하며, 인공위성을 쏘는 세상에 살 것이라고 누가 예견이나 했겠는가?
성서는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만약 이 시대에 예수가 세상에 살았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을 전하지, 2천 년 후의 인류의 필요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겠는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 줄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성서는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정신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문자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참고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풍습과 규범을 적용받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구전 설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과학적 논증 역시 특별한 의미가 없다.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여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지역의 신본주의적 ‘헤브라이즘’이나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적 ‘헬레니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성서에 나오는 숱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몽땅 믿어버리는 우매한 발상은 자신을 독단의 도그마에 가두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자는 축자영감설이니 하는 따위의 ‘문자주의’나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는 식의 ‘근본주의’에 자신의 영혼을 가두어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성서 안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는 인생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성서가 인생의 모든 해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서가 우리 손에 어떻게 들어왔는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성서는 신이 우리에게 직접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구전 문학의 산물이므로 오류와 착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서를 공부하는 목적은 어휘나 단어의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있다.
성서가 그 시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이천 년 전 동양의 철학자 맹자는 경전의 편견에 대한 폐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서경(書經)을 맹신하는 것은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하다.”
‘진신서불여무서-盡信書不如無書’
아무리 권위 있는 책이라고 해도 무조건적이거나 무비판 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학문의 길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권위 있는 책이나 자료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검증한 뒤에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여, 맹목적 사고에 갇히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산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독서가의 자세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해 아들을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들의 존재는 아들의 사람됨 그 자체로서 평가받아야 마땅한 법이다. '어른들이 알려준 지름길로만 다니는 아이는 훗날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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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M짜리 예수상을 만든다는 뉴스를 보았다. 무려 1조 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기독교기념관을 짓는 것이 진정 한국 기독교인의 최대 염원이란 말인가? 세계 최고니, 최초니 하면서 등수와 서열을 중시하는 군사문화의 노예답게 이런 얼빠진 짓을 조장하는 한국교회연합은 예수를 앞세워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예수상은 구원의 상징이 아닌 맘몬주의의 우상이요 탐욕의 바벨탑에 불과하다.
그들이 세우고자 하는 조감도에 그려진 예수상 역시 서양인이 만든 허상일 뿐,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갈릴리를 떠돌던 실제의 예수는 푸른 눈의 키가 큰 서양 사람이 아니라 아람어를 사용하는 작달막한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유대인이었다.
사이비 동상 세워 놓고 우상을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짓, 제발 좀 그만두길 바란다.
이 탐욕에 가득 찬 ‘독사의 자식들’아~^^
霞田 拜拜